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준 Jun 28. 2023

런던에서의 새로운 시작






런던의 여름은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황홀하다는 게 더 잘 어울릴 듯하다. 고풍스러운 역사적인 건물들 사이로 내려앉는 여름의 햇살은 보석같이 빛이 난다. 오후 9시가 넘어도 태양은 뭐가 그리 아쉬운지 서쪽하늘에 머뭇거리며 고운 노을을 만들고 있다. 그림처럼 예쁘게 조성된 수많은 공원의 잔디밭에 하늘을 보고 누워서, 일광욕을 하거나 독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 바로 천국이 이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상황은 반전된다.

아침 8시가 되어서야 게으름을 피우며 해가 얼굴을 내밀고, 오후 4시가 되면 서둘러 어둠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회색 빛 하늘은 시도 때도 없이 비를 흩뿌리고, 심술궂은 바람은 거리를 훑는다. 눈이 내리거나 영하로 떨어지지는 일은 좀처럼 없지만, 찬바람과 습기로 인해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는 몸을 잔뜩 움츠리게 만든다.

영국을 가리켜, 여름은 천국이고 겨울은 지옥이다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1999년 6월 초순, 천국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초여름에 우리 가족은 런던에서 새로운 삶의 문을 열었다.

우리가 살게 된 집은 2층 단독주택이었다. 1층은 넓은 거실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욕실과 3개의 침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런던의 남쪽 지역인 윔블던의 외곽에 위치한 곳이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이층 내지는 삼층 주택들이 끝 간데 없이 늘어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주택가였다.

영국의 대부분 주택들은 앞과 뒤에 정원이 딸려 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 앞에 예쁘게 조성된 화단에는 빨강, 노란 장미와 탐스러운 수국이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집 면적의 두 배 이상이나 되는 꽤 넓은 뒤정원은 잔디가 깔려 있었고, 3면의 울타리를 따라서 사과나무, 사철나무, 단풍나무가 보기 좋게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서울에서 살 때는 회색조 아파트 숲으로 뒤덮여 숨이 막힐 것 같이 답답함을 느끼다가 이곳에서는 주위를 훑어보기만 해도 체기가 뻥 뚫리는 것 같은 개운함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딸은 9월 초순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세 달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이 시간을 활용하여 본격적인 영어 공부를 해야 했다.

아내는 두 딸의 수준에 맞는 단어장을 만들어 건네주어 외우게 하고 문법을 가르치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원어민 교사의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사교육이라면 머리를 저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장본인이었지만, 이곳에선 어쩔 수 없는 두 딸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영어를 가르쳐줄 사람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게시판을 훑어보면 배울 사람을 찾는 강사들의 메모가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보면 간략하게 본인의 약력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전적으로 그것에 의존하여 강사를 구한다는 것은 신뢰감이 없어 망설여졌다.

나는 내가 다니는 랭귀지 스쿨에서 교사를 섭외하기로 마음먹었다. 과외비에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격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고, 가르치는 스킬도 검증되었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랭귀지 스쿨에서 수업을 시작한 지 열흘 남짓 되었지만, 그동안 강사들을 눈여겨본 바에 의하면 호감이 가는 이가 있었다.

쥬리앙이라는 이름을 가진 30대 중반의 남성인데 벌써 앞머리가 빠져 이마가 훤히 드러나고, 붉은 피부 색깔에 말처럼 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잘생긴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지만,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 마음씨 하나만은 그 누구와도 비교대상이 안되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두 딸에게 영어지도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는 랭귀지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후에는 파트타임으로 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일거리가 없어 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잘된 일이었다. 지체할 필요도 없이 그다음 날부터 과외를 진행하기로 했다.


쥬리앙은 두 딸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한 방법을 동원하여 영어를 지도했다. 그는 수업 중에 놀이를 통한 학습 보조 기재들을 활용하여 두 딸이 흥미를 잃지 않게 신경을 썼다. 큰딸에겐 어쩌다 기분전환용으로 사용하였지만, 작은딸에게는 수시로 이용했다.

작은딸은 그런 지도방법에 흥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어느 땐 신문지를 둘둘 말아 칼싸움을 하느라 쿵쾅거리며 층계를 오르내리기도 했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쥬리앙과 작은딸의 웃음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우기도 했다.


아내는 가끔 불고기, 김밥, 오므라이스 같은 서양사람들이 좋아할 음식을 준비하여 주리앙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식탁에 빙둘러앉아 식사를 할 때면 줄리앙은 두 딸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화제는 주로 영국의 문화와 생활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영국생활에 빨리 적응시키기 위한 배려가 깔려 있었다.

두 딸의 대답이 불충분하거나 문법적으로 맞지 않으면 즉석에서 보충 설명과 함께 교정을 해 주었다.


나는 랭귀지 스쿨에 다니고 있었고, 두 딸은 쥬리앙으로부터 영어 과외를 받느라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4시까지는 외출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이 지나서야 집을 나서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고,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기도 했으며, 상가지역을 거닐기도 했다.

그러나 주말이면 샌드위치를 만들고 과일과 음료수를 준비하여 일찍이 집을 나서 지하철이나 버스에 몸을 싣고 시내로 향하곤 했다.

런던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많다.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 내셔널 갤러리, 자연사 박물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로열 아카데미 어브 아츠 (유서 깊은 미술학교 미술관), 대영박물관.....

더욱이나 이곳들은 특별 전시가 아니면 모두 무료로 개방하고 있어 부담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유물들과 예술작품들을 즐길 수 있었다. 미술이 전공이고 공부하기 위해 이곳에 온 나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아내와 두 딸에게도 예술품에 눈을 뜨게 해 주고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장소였다.

트래펄가 광장, 버킹엄 궁전, 빅 벤, 웨스트 민스터 사원, 런던 타워와 타워 브리지, 코벤트 가든 같은 관광객들이 물밀처럼 밀려오는 명소들도 순례하듯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세인트 제임스 파크, 리젠트 파크나 하이드 파크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고, 너른 잔디밭에서 자연을 벗 삼아 준비해 온 음식을 펼쳐 놓고 먹곤 했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서울과는 많은 차이가 이었다.  

서울에 살 때는 여름이면 동해안이나 서해안의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떠났고, 제주도를 여행했다. 시원한 계곡을 찾기도 하였으며 두 딸이 좋아하는 에버랜드나 롯데월드 어드벤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이런 시간은 주체할 수 없는 행복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다.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는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제임스 오펜하임(James Oppenheim)의 말을 깊이 새기며, 우린 이곳 런던의 생활에서 행복을 찾고 키워가고 있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고, 역사적인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걷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공원을 산책하는 것은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원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 푸른 하늘과,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바라볼 때, 상쾌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책을 읽을 때, 그 여유로움과 평화스러움은 서울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이었다.

집 정원 잔디밭에서 가족과 배드민턴을 하고, 줄넘기도 하였으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노는 것도 서울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정원 잔디밭 간이 테이블에 음식을 차려 놓고, 나무에 놀러 온 새들의 청아한 노래를 감상하며 식사를 할 때면 멀리 캠핑을 나온 것 같은 행복감을 느꼈는데 이곳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런던에서의 달라진 생활은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대화 시간이 길어졌으며 화제가 풍성해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행복이었다.


시간은 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행복하고 설레는 시간은 빠르게 흘려보낸다. 어느새 두 딸이 학교에 입학할 날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이전 04화 변화와 도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