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정준 Jun 14. 2023

사교육 열풍 속에서




80년대 중반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가정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고액 연봉을 받는 직장인들이 늘어나고, 창업이나 자영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주식도 한몫 거들었다. 중화학 공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자리 잡으면서 주식시장이 활기를 뛰기 시작한 것이다. 눈을 감고 아무런 종목의 주식을 찍어도 얼마 후엔 구르는 눈덩이처럼 돈이 불어났다. 그야말로 주식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국민의 약 45%가 주식에 매달릴 정도였으니 그 열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나 80년대 후반에는 저금리, 저유가, 저 달러라는 호재로 연 12%라는 고도성장을 이루었고, 경상수지도 큰 흑자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 각종 조사를 보면 적게는 60%, 많게는 80%의 국민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답할 정도였다.

삶이 풍요로워지면서 부모들은 자녀들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사교육이 열풍으로 번진 것은 1991년부터이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사교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70년대에도 만만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7월에 전면 과외 금지조치를 내려, 학생들은 학교 수업 외에 사교육을 일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과외를 하는 교사나 시키는 학부모도 단속 대상이었다. 

그러나 단속을 피해 불법 과외가 성행했고, 학생들의 학력 저하를 우려하는 부모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991년 완전 백지화 시켰다. 이제 70년대 보다 경제력이 막강해진 부모들은 보란 듯이 자녀들을 사교육의 장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하교할 시간이 되면 학교 교문 앞에는 학원 차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가 학생들을 싣고 학원을 향해 떠났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자가용 운전기사나 학생의 어머니가 직접 운전을 하여 학원이나 과외 교습소로 실어 날랐다. 

재력이 있는 집에서는 개인교사를 집으로 불러들이기도 했으며, 아예 입주시키고 침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사교육이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게 만든 원인 중 하나는 특목고(과학고. 외국어고)의 등장이었다.

1983년 경기 과학고등학교가 문을 열고, 그다음 해인 1984년에는 대원 외국어 고등학교가 문을 연 후, 특목고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곳 졸업생들이 명문대, 소위 말하는 SKY진학률이 월등하게 높자 부모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원래 사교육은 명문 대학이나 인기 학과에 진학시키기 위하여 고등학교에서 극성을 부렸으나, 이제는 특목고에 보내기 위하여 중학생들도 사교육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심지어는 중학교에서 시작하면 늦는다며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1996년, 큰애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아내와 나는 큰애를 특목고에 보낼 의사가 없었고, 사교육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공부를 강요하고 억압하기보다는 건강하게 뛰어놀며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하고 싶었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많은 학생들이 학원이나 과외 교습소로 향할 때, 큰애는 수영을 하고, 스케이트를 타기 위하여 체육시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가 사는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잠실 롯데월드가 있었다. 이곳에는 수영장과 아이스링크가 있었고, 학교 수업이 끝난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강습이 있었기 때문에 큰애에게 제격이었다.

백화점 대형 버스가 수시로 아파트 단지를 순회하며 손님을 실어 날라 이동에도 편리했다.   


큰애가 유일하게 학원에서 학과 공부를 하는 것은 영어였다. 1997년 초등학교에 정식 교과목으로 도입되었지만, 그 이전부터 조기 영어 교육 붐이 일어 배우지 않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심지어는 유치원 원아들도 영어를 배우느라 난리였다. 

다행스럽게 큰애는 영어에 관심이 있고 잘 따라 했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학원에는 원어민 강사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백인도 있었고 흑인도 있었다. 

큰애는 흑인에 대한 낯가림증이 심해서 어려서 어려운 일을 겪기도 했는데, 지금은 잘 적응된 상태였다. 


큰애가 네 살 때(만으로 3세)였다. 아파트 단지 내 중앙상가에 우리나라 최초의 편의점인 세븐 일레븐 1호 점이 입점해 있었다. 

산책길에 큰애는 과자를 사겠다고 앞장서 쪼르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와 나는 뒤따라 가서 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큰애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악을 쓰는 듯한 울음소리가 심각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놀래어 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구의 흑인 남성이 서 있었고, 큰애는 그 앞에 파랗게 질려있었다. 손에 쥐고 있었던 것 같은 과자봉지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흑인남성은 미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하얀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큰애는 더 자지러졌다. 

“왜 그래? 괜찮아 괜찮아”            

아내가 다가서  다독여주자,  큰애는 뒤로 몸을 숨기며.

“시커멍스! 시커멍스! 소리 지르며 계속 울었다.

큰애가 TV에 흑인을 등장하면  ‘시커멍스다. 시카멍스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TV로만 흑인을 보다 실제로 바로 눈앞에서 마주치니 무척 당황했던 것 같았다.


큰애와 다섯 살 터울인 작은애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다. 유치원이 끝나면 외할머니(장모님)의 보호아래 놀이터에서 진탕 놀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 후부터는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렸다. 컴퓨터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다루지 못하였지만, 자판을 제 멋대로 두드리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나는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작은애를 한 번도 제지하지 않았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컴퓨터에 거리감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며 칭찬을 주어야 할 일이었다. 


큰애는 집에 있는 시간이면 먼 나라 이웃나라라는 만화책에 빠져 살았다. 책상 앞에서, 침대에 뒹굴며. 소파에 앉아서도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만화가 이원복의 학습 만화인데 세계 각국의 문화와 역사, 생활모습을 담은 시리즈였다.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재미가 있었고, 교육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유럽 편으로는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소개하는 내용이 각기 한 권의 책으로 되어 있었고, 3권으로 편성되어 있는 미국 편이 있었다. 그 밖에도 일본 편, 중국 편 등이 있었는데, 나는 유럽 편과 미국 편을 사다가 책장에 비치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쉽게 꺼내어 읽을 수 있었다.


큰애는 그 책들을 한번 읽은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읽었다.

만화책을 손에 쥐고 빈둥거리는 큰애를 본 우리 집을 방문한 손님 중에는 의아한 듯 질문을 하기도 했다. 

손님 :  “ㅇㅇ야 넌 학원에서 무슨 과목 공부해?”

큰애 :  “수영, 스케이트, 아 맞다. 영어.”

손님 :  “다른 과목은?”

큰애 :  “안 해요.”

손님 :  “수학, 논술, 과학, 이런 건 공부 안 해?”

큰애 :  “네.”

손님 :  “음 이상하다, 공부 열심히 해야지 안 그러면 훌륭한 사람 못되는데…...”

손님의 이 말에 큰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큰애 :  “그야 뭐,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사는 거죠 뭐.”

이런 대답을 했다.

손님 :  “어머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속에 노인 들었어 “

손님은 배꼽을 쥐고 웃었다.


큰애는 사교육 열풍에 휘말리지 않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이전 02화 부모의 욕심이 자녀의 미래를 망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