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과 곰은 두 딸의 별명이다. 부를 때는 옹아, 곰아 라고 한다. 귀엽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별명이지만 아내와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애칭으로 사용하고 있다.
옹은 작은애의 별명이다.
아가들은 생후 18개월이 되면 10-20개의 단어를 말하게 되고, 그 후부터는 습득속도가 빨라져서 두 돌이 되면 50-250개의 단어를 사용하게 된다고 한다.
작은 아이는 첫돌 즈음에 엄마 아빠라는 말은 구사했지만, 18개월이 되도록 다른 말은 제대로 발음하는 게 없었다.
아내와 나, 큰딸은 작은 애가 말을 배울 수 있도록 옆에서 단어들을 계속 들려주며 따라 하게 했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내 때문에 육아와 살림을 돕기 위하여 함께 생활하고 계신 장모님 또한 여간 애쓰시는 게 아니었다.
가족 모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은 애의 말 배우기는 진전이 없었다. 단어를 들려주고 따라 하라면 엉뚱한 발음을 했다.
아내 : 할머니! 할머니 해봐.
작은애 : 야냐니.
아내 : 야냐니가 아니라 할 머 니.
작은애 : 야 냐 니.
아내 :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해봐.
작은애 : 앙끼.
아내 : 샤워,
작은애 : 뽀까
아내 : 우리 아가 이름은 ㅇ원이, ㅇ원이 해봐.
작은애 : 옹.
이런 식이었다. 은근이 걱정되었다. 언어장애가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단어와 너무 생뚱맞은 이상한 발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를 하머니, 또는 할머이 같이 어지간이 들어맞는 발음을 했어도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를 야냐니라니?
두 돌을 넘기며 작은 애는 우리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증명시켜 주려는 듯이 정확한 발음으로 교정되었고, 또래 아이들보다 더 많은 단어를 구사하게 되었지만, 옹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큰 애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셌다.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막무가내식 고집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장난감 가게를 지나가다 맘에 드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하면 총알같이 달려가서 그것을 움켜쥐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동네 산책이라 지갑을 안 가지고 나와서 다음에 사자고하면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가게가 들썩들썩할 정도였다. 강제로 가게에서 데리고 나오면 울음소리는 더 커졌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하는 수없이 내가 집에 달려가서 지갑을 들고 나와 장난감을 사주어야 울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가끔씩 이동용 회전목마가 등장했다. 규모가 작고 사람이 직접 손으로 돌리는 놀이기구였다. 50대의 아저씨가 리어카에 싣고 와서 설치해 놓으면 큰애는 용케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가 태워 달라고 했다. 문제는 한번 타고 내리는 게 아니라 연거푸 타려고 하는 데 있었다. 아이들이 적을 때는 아무 일 없지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때는 난감한 일이었다. 강제로 내려놓으려 하면 악을 쓰며 울었다. 오죽하면 다른 아이들의 부모들이 양해를 해주어 계속 태울 수밖에 없었다.
큰애는 놀이기구 타는 것 못지않게 동물들 보는 것을 즐겨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어린이 대공원이나 용인 자연농원(1996년 에버랜드로 개칭)을 찾는 게 정해진 일과였다. 놀이기구를 이것저것 맘껏 타다가, 동물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 마음에 드는 동물 앞에서는 도통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큰애는 특히 곰을 좋아했다. 곰의 움직임을 보면서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서 까르르 웃으며 손뼉까지 치곤 했다.
큰애의 꽉 막힌 막무가내의 고집스러움이 곰을 닮았는데, 게다가 곰을 좋아하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곰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머무를 것 같던 두 딸애는 어느새 30대가 되었다.
옹아, 곰아,라는 별명은 어렸을 때부터 불러왔는데, 지금도 여전하다.
작은애는 하버드 로스쿨(Harvard Law School)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의 한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귀국하여 우리나라에서 일을 하고 있다.
큰애는 현재 예일 대학교에서 포스트 닥터 코스를 하고 있다.
지인이나 친구들은 나를 보면 작은 딸을 하버드 로스쿨에 보낸 비결이 뭐냐 묻곤 한다.
큰 딸이 예일 대학교에서 포스트 닥터 코스를 하게 된 비결이 뭐냐 고도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의 입에서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비결? ….. 비결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찾아낼 수 없다.
애초에 하버드나 예일을 목표로 정해 놓고 차근차근 준비했더라면 그 계획서 내용이든가, 실천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썼는지 소상히 밝힐 수 있겠지만, 단 한 번도 그 학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애나 큰 애는 학부생부터 하버드와 예일대에서 공부를 한 것은 아니다.
미국 대학에선 내신(GPA), SAT 점수, 대외활동(EC), 에세이, 추천서, 인터뷰를 종합해 실력과 인성, 잠재력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학생을 선발한다
하버드와 예일 대학교를 입학시키기 위하여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하고 스펙 쌓기에 공을 들이는지 애들은 물론 아내와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부유층이나 권력을 쥔 높은 사람들 중 일부는 자녀들의 스펙을 만들기 위하여 대학교수들의 논문에 공동 저자로 끼워 넣는 일까지 있었다.
두 딸이 하버드나 예일대학교 학부에 지원을 했더라도 합격될 확률은 미미했다. 엄청난 스펙으로 무장되어 있는 경쟁자들과 대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예리한 검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나무 막대기를 쥐고 싸우겠다는 덤비는 무모한 짓이었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하버드와 예일대에서 학부생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그곳에서 공부할 기회를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상류층 자녀만이 아니라 우리같이 평범한 가정에서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돈을 쏟아부어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스펙을 만들지 않아도 그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지난 일을 뒤돌아보며 두 딸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의 편린들을 하나하나 건져 올려 정리해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더 미루다 가는 기억이 희미해져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한몫했다. 그리고 무엇 보다도 절실하게 쓰겠다고 각오를 단단히 하게 된 것은, 추억을 먹고사는 나이가 되었을 때 오래된 추억의 사진을 보듯이, 회상할 수 있는 자료를 준비해 놔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