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이 어렵지 한 번이라도 경험이 있다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법이다. 1년 동안 런던에 살았던 경험이 뉴욕에서의 정착을 거짓말처럼 수월하게 해 주었다. 언어소통에서 오는 불편함이 조금은 사라진 것도 일을 순조롭게 진행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집 렌트 하는 일, 두 딸 학교에 입학시키는 일, 아내와 내가 다닐 랭귀지 스쿨을 등록하는 일, 그리고 내가 다닐 미술학교, 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어브 뉴욕(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 등록하는 일도 순조롭게 마무리 되었다.
우리 가족이 정착하게 된 곳은 뉴욕 퀸즈 지역 외곽에 자리 잡은 프레시 메도우스 (Fresh Meadows : 신선한 목초지)였다.
세계에서 큰 도시 중에 하나이며 마천루를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되는 뉴욕에서 이런 시골냄새가 풍기는 지명이라니 너무 생뚱맞았다. 까마득한 옛날에 소와 말,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던 곳이어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었다.
우리가 렌트 한 집은 런던의 단독 주택과는 달리 아파트였다. 엄청난 면적에 자리 잡은 대단지였다. 15층짜리 건물 세동을 제외하고는 2층 혹은 3층의 무수한 건물들이 수백 년 된 고목들 사이로 듬성듬성 들어서 있었다.
우리 집은 거실과 주방, 화장실, 방 두 개가 딸린 단출한 구조였다. 그러나 모든 공간이 널찍하고 벽면은 온통 흰색이어서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렌트 비는 그리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해야 하는데 굳이 비싼 비용을 지불하며 큰 집에 살 필요 없다는 생각으로 선택한 집이었다.
집은 이상적인 주거환경이었다. 앞에는 온통 너른 잔디밭과 고목들로 둘러 쌓여 거실에서 밖을 바라보면 전원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파트 정문을 벗어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정문과 맞닿는 곳에 수백 대를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주차장이 있고, 한편에는 케이 (K) 마트가 육중한 몸을 도도하게 드러내놓고 있었다. 케이 마트는 대형 건물에 백화점처럼 모든 물건들이 구비되어 있어 멀리서도 쇼핑을 오기 때문에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 주위로는 영화관, 음식점들, 옷가게들, 안경 가게, 보석상, 스타벅스 커피숍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도로를 건너면 애플비 (미국의 유명한 체인 음식점)가 있고, 델리, 은행, 옷 가게들, 그리고 아이스크림 집, 전자 제품을 파는 가게들이 연이어 늘어서 있었다. 가까이에 우체국과 도서관이 있어 생활이 편리했다.
우리 가족은 주위 환경을 하나하나 익힌 후, 시야를 넓히기 위하여 뉴욕의 심장부인 맨해튼으로 진출했다. 아파트 정문 가까이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플러싱 메인스트리트까지 가서, 7번 지하철을 타면 종점이 맨해튼 42번가였다.
맨해튼에는 타임스퀘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브로드웨이, 자유의 여인상, 무역센터 트윈 빌딩(2001년에 테러 공격으로 붕괴됨), 브루클린 브리지, 록펠러센터, 센트럴파크..... 등, 명소가 많았다. 하늘을 깊숙이 찌르고 있는 수많은 고층빌딩들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은 특별한 볼거리이기도 했다..
뉴욕은 모든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답게 현대 미술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규모가 큰 미술관들이 여러 곳 있었다. 뉴욕 현대 미술관 (MoMA), 구겐하임, 휘트니, 뉴 뮤지엄 등. 그곳에 가면 말로만 듣던 쟁쟁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맘껏 감상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런던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대부분 무료인데 반해서 뉴욕에서는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다.
9월 초,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작은 딸은 초등학교 Grade(학년) 5이고, 큰 딸은 하이스쿨 Grade 10이었다.
영국에서는 학년을 Year로 사용했는데 미국에서는 Grade로 사용하는 게 달랐다. 미국에서도 영국처럼 중. 고 과정을 통합해 하이스쿨이라고 했지만, 일부 학교에서는 중학과정을 구분하여 주니어 하이스쿨이라고 부르는 곳도 있었다.
미국이 영국과 또 다른 점은 사립학교를 제외한 공립학교에서는 교복이 없는 자율 복장이라는 점이었다. 신발도 편한 운동화를 신으면 됐다. 영국이 전통을 중시하는 나라라면 미국은 개방적이고 실용성, 편의성을 중시하는 나라라는 것을 학생들의 자유로운 복장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두 딸이 다니는 학교는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작은 딸의 학교는 아파트 단지에서 도로 하나를 건너면 있었고, 큰딸은 도보로 15분 정도 소요됐다. 집 가까이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학교 정문 앞에서 내릴 수 있어 바쁜 날은 이용할 수 있었다.
미국도 영국처럼 만 10세까지 학생들의 등하교 시에는 부모나 보호자가 동반해야 했다.
작은 딸은 만 11세이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았지만, 아내는 여전히 동행하는 것을 고집했다.
아파트 단지와 학교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도로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차량들 소통이 뜸한 도로였고, 등하교 시간에는 자원봉사자들과 경찰들이 나와서 학생들의 안전지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지만, 아내는 그래도 마음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라구아디아 커뮤니티 칼리지 랭귀지 스쿨에서 공부했다.
플러싱에서 7번 트레인을 타고 맨해튼 진입하기 전 역에서 내려 6 - 7분 정도만 걸어가면 되는 퀸즈 롱 아일랜드 시티에 자리 잡고 있었다.
ESL 과정은 하루에 4시간의 수업으로 짜여 있었고(금요일은 특활시간이 있어 5교시), 문법, 독해, 듣기, 말하기, 작문, 각 파트마다 전담 강사가 맡고 있었다.
레벨이 1 – 7로 편성되어 있고, 각 레벨마다 여러 개의 반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건물 자체도 엄청난 큰 규모였지만 학생들 수도 웬만한 학교 학생수와 맞먹을 정도였다.
아내도 이곳에서 공부를 할 계획이었으나 작은딸 등하교에 동행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아 계획을 변경했다. 당분간 하루에 두 시간으로 진행되는 랭귀지스쿨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라구아디아 칼리지에서 수업이 끝나면 나는 지하철을 타고 센트럴 파크 인근 57번가 서쪽에 위치해 있는 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어브 뉴욕으로 향했다. 먼 거리가 아니고 지하철 망이 거미줄처럼 되어 있어서 이동이 편리했다.
아트스쿨은 오전반, 오후반, 야간 반, 주말반으로 구분해서 각각 3시간 단위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나는 오후 3시간 동안 판화수업을 신청해서 공부했다. 다양한 판화 중에서 동판화 작업(에칭과 애쿼틴트)을 선택했다.
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어브 뉴욕은 나이가 든 학생들이 많았다. 5-60대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고, 70대 이상의 노인들도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전문적인 직업 작가에서부터 이제 그림에 첫발을 내딛는 아마추어들이 서로 어우러져 공부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유명한 예술 학교가 많은 프랑스, 영국, 이태리, 독일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아는 바와 같이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은 대학 교육까지 무상이고, 심지어 생활비까지 보조해 주는 나라도 있다. 그런데 수업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비싼 생활비를 자비로 부담하면서 굳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유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배출한 세계적인 작가인 잭슨 폴록, 로이 리히텐슈타인, 조지아 오키프, 바넷 뉴먼, 알렉산더 콜더, 마크 로스코, 죠셉 스텔라....... 그리고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많은 젊은 작가들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추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뉴욕에서의 생활은 긴장이 풀리고 여유로워졌다. 한국에 살고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주위에 교민들이 더러 살고 있고, 마켓에 가도 거리를 나서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차를 타고 20여 분만 가면 플러싱(Flushing)이라는 곳이 있는데, 교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코리아타운이 있었다. 복잡한 메인스트리트를 비롯하여 사방으로 뻗어 있는 도로에는 교민들이 운영하는 다양한 가게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가끔 가족이 함께 그곳에 가면 고려당 제과점에서 빵을 먹었다. 두 딸이 아직 어린 나이라 빵을 좋아했고, 특히 오랫동안 입맛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주위에 뉴욕제과, 가나안제과가 있었는데 이 집을 고집하는 이유는 빵의 종류가 다양했고, 손님들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두 딸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요리로 소문난 삼원각에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기도 했다.
교민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한양, 혹은 한아름 슈퍼마켓에 들려 필요한 한국식료품을 사기도 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한국에서 날아온 과일이며 과자류 식료품들이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두 딸은 이제 이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것처럼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에 아무런 불편함 없이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아내와 나 또한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