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는 고목들을 품고 있는 타원형의 공원이 있었다. 큰 나무들이 조밀하게 서있는 것도 아니고 사방으로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데도 무성한 가지들과 잎사귀들이 하늘 한 점 보이지 않게 가리고 있었다.
공원은 청설모들의 놀이터였다. 누가 빨리 달리나 경주라도 하듯이 고목의 까마득한 곳까지 올라갔고, 잔디밭에서는 미어캣처럼 두 발로 서서 오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여름밤에는 반딧불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청정지역에서만 산다는 반딧불이가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물론 내가 살던 지역은 외곽이긴 하지만—불빛으로 수놓는 것을 보는 건 특별한 선물 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대단지라 정확한 세대수를 알 수 없었고, 더군다나 교민들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는 더욱 알 길이 없었지만, 주위에 세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나이도 나와 엇비슷한 데다 자녀들도 또래여서 그 가족들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네 가족은 가끔 커피숍이나 던킨 도넛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고, 돌아가며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초대를 했다.
어느 때는 소고기, 돼지고기, 야채, 쌈장을 싸가지고 인근 공원에 가서 바비큐 파티를 했다. 미국은 공원이나 바닷가에 바비큐 시설이 되어있는 곳이 있어 땔감(숯)만 준비해 가면 그 시설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고기를 실컷 구워 먹은 후에는 아이들은 공원에서 신나서 뛰어놀았고, 어른들은 후식으로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외국어 학습엔 결정적인 시기 (critical period)가 있다고 말한다. 6-13세 때가 적기라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영어를 배우게 될 경우 몇 배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7-8년 동안을 영어권 사람과 함께 생활하며 배워야 어느 정도 감정표현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성인이 되어 영어공부를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이론에 머리를 끄덕여 수긍하리라.
언어학자들의 이론대로 작은딸은 적기에, 큰딸은 약간 넘긴 시기지만 얼추 그 언저리에서 영어를 시작했고, 1년 이상을 영어권 학교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많은 발전이 있었다. 두 딸은 단어나 문법 상관없이 마치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문장 전체를 받아들였다.
큰 딸의 학교 성적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 정도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 정도이면 만족이었다. 영어권이 아닌 외국에서 온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어서 학교의 배려로 선생님들로부터 특별 지도를 받는데 큰딸은 제외된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일이었다.
작은 딸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학생들이 수학이나 과학이 아닌 영어문제를 질문할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어 있었다.
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어브 뉴욕에서 판화작업을 끝나고 건물을 빠져나오면 가끔 렉서스, 혹은 벤츠 승용차가 건물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안에는 대학 동기 동창인 S가 타고 있었다.
S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과 동시에 미국에 건너와서 대학원 공부를 마친 후, 개인사업을 해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홍콩, 중국, 대만 등 여러 나라에서 미술품들을 수입하여 미국 전역의 상업 갤러리들과 유럽에 있는 일부 화랑들에게 공급해 주는 사업이었다.
한국에는 직영으로 운영하는 회사가 있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을 수백 명 채용하여 미술작품을 그리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제작되는 작품들은 전부 미국과 유럽에서 판매되었다.
초창기에는 경험이 없는 데다 거래처가 확보되지 않아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성실을 바탕으로 꾸준히 노력하여 얼마 안 가 사업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다.
뉴저지(New Jersey)에 있는 공장 같은 커다란 건물 안에는 그림이며 조각, 공예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많은 종업원들이 액자를 만들고, 작품을 그것에 끼우고, 포장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로봇이 움직이는 것처럼 일사불란했다.
작품을 쌓아 놓은 진열대마다 바이어들이 작품을 고르느라 시장 같은 분위기였다.
친구 S와 나는 아트스쿨 주변의 레스토랑이나 영국식 펍(pub)에서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펍은 주류만 파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음식을 제공하고 있어서 술을 좋아하지 않는 친구도 즐겨 찾는 장소였다. 술집 분위기를 맞추려 와인을 시켰지만 몇 모금 마시면 끝이었다.
대학교 때 S와 나, 그리고 H와 M, 네 명은 본드로 붙여 놓기라도 한 듯이 언제나 함께였다. 주위에서 사총사라는 별명까지 붙여줄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고, 세 친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미국에서 공부를 했다.
그들은 나에게 미국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전화와 이메일로 수도 없이 권유했다. 방학 때 한국에 오면 나를 설득하려고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때는 공부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머리에서 쥐가 나고,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 같았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 친구는 한국에 귀국하여 모 광고회사에 중책을 맡고 있고, 한 친구는 뉴욕에 있는 한 디자인 회사에 근무하다 자영업으로 업종을 바꾼 상태였다
레스토랑이나 펍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화자는 주로 친구였고, 나는 귀를 열어놓고 열심히 듣는 쪽이었다.
그는 15 년을 밤낮없이 노심초사하며 사업을 이끌어온 이야기, 바쁘게 생활하느라 가족에게 소원했던 이야기, 끊임없이 계속되는 스트레스와 누적된 피로로 건강을 잃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가을이 되자 집 앞 공원의 고목들은 열정적인 옷으로 단장을 했다. 노랑, 오렌지, 주황, 다홍, 빨강…… 다양한 난색계통의 색들이 어우러져 활활 타는 거대한 불꽃같았다. 그러나 늦가을이 되고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이 제법 시리게 느껴지자 열정으로 불을 태워 만들어냈던 무수한 이파리들을 아낌없이 떨쳐버렸다. 나무들은 겨울나기가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짐이 되는 것은 모두 떨쳐버리고 겨울에로의 긴 여행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
겨울은 머뭇거리는 가을을 매섭게 덮쳐버렸다.
옷을 벗은 나무들로 무채색이 된 집 앞 공원엔 눈송이들이 나비처럼 날다가 나무에 날개를 접었다.
눈송이에 묻힌 고목은 짙은 회색의 가지와 강한 대비현상으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겨울의 피어난 꽃 같았다.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이는 설화는 무수한 보석들의 집합체 같았다.
2001년 1월 초의 어느 날, 엄청난 눈이 내렸다. 보이는 것은 온통 흰색뿐이었다.아이들에게 풍경을 그리라고 했다면 아마도 화지 위에 온통 흰색만 가득 칠해 놓았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니 눈은 더욱 쌓여 있었고, TV에서는 모든 학교와 관공서, 회사들이 휴무에 들어갔다는방송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학교가 휴교여서 신이 난 두 딸과 아내, 그리고 나는 밖에 나가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길 잃은사슴처럼헤맸다.
그러다 우리는 영화관 앞에 다다랐다. 모든 가게들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지만 영화관만은 예외였다. 우리는 만장일치로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다. 눈밭을 헤매느라 지쳐 있었기 때문에 영화 감상은 산뜻한 피로회복제가 될 것 같았다. 양동이 만한 통에 들어있는 팝콘과 음료를 사서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관객은 오직 우리 가족뿐이었다.선전과 예고편이 끝나고 본 영화가 시작되었는데도 입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거대한 극장은 우리 가족만을 위해 봉사를 해주었다.
아내는 드디어 라구아디아 커뮤니티 칼리지 랭귀지스쿨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작은딸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 등하교를 하게 되고, 학교 앞의 도로가 안전하다는 것을 그동안의 학습을 통하여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내는 평소에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랭귀지 스쿨을 옮긴 후에는 새벽 1시 혹은 2시까지 책과 씨름을 했다. 잠을 자다 눈을 떠보면 아내의 시선은 여전히 책에 꽂혀 있었다.
새로운 단어와 문장들을 빽빽이 A4용지에 써서 주방과 거실에 도배를 하듯이 붙여 놓고, 음식을 준비하면서도 청소를 하면서도 암기하였으며, 지하철, 버스 안에서도 단어장을 손에서 놓는 적이 없었다.
우리 가족 중에서 공부를 가장 열심히 하는 모범생은 단연 아내였다.
그러고 보면 아내, 두 딸 그리고 나는 뉴욕에 잘 스며들고 있었다. 뉴욕의 참 맛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