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사교육이문제이지만, 그 못지않은 것이 학교폭력이다. 아니, 소중한 인명이 딸린 일이니 사교육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사안이다.
학교폭력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주먹으로 상대방을 가격하거나 발길로 차고, 칼을휘둘러 상처를 내거나 몽둥이로 때리는 신체 폭력이 있고, 상대 학생의 성격이나 외모를 비하하고 장애 학생을 놀리며 욕설을 퍼붓는 언어폭력이 있다.
돈이나 고가의 개인 물품을 빼앗는 금품 갈취 행위도 있고, 어느 한 학생을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왕따 행위가 있다. 강압적으로 성행위를 하고, 은밀한 신체의 부분을 접촉하거나 말과 행동으로 상대에게 수치심을 주는 성희롱 같은 성폭력도 있다.
학교폭력의 종류를 이렇게 즐비하게 나열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 세분하면 얼레에서 실을 풀어내듯이 끝이 없다.
이토록 많은 학교 폭력이 그물처럼 펼쳐져 있으니 걸려들지 않을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학교 폭력 피해 학생들은 걱정과 두려움, 불안,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고, 자기 존중감과 정체성이 낮아져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올곧게 쑥쑥 자라야 하는 식물의 줄기가 꽃을 피우기도 전에 꺾이고 시들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일로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기에 버거워 스스로 목숨을끊는 일이끊이질 않고 있다.
교사의 안전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교사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져 이 빠진 호랑이가 된 지오래다.
학생들조차도 교사를만만한 존재로 여겨 짓궂은 행동을 하거나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학부모는 한술 더 떠 하찮은 일에도 교사에게 항의 전화를 하고, 상부에 민원을 제기한다. 어떤 학부모는학교에 득달같이 달려와서 마치 중죄를 저지른 범인처럼 몰아세우기까지 한다.
학생의 잘못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찾아와 수업 중인 여교사의 머리채를 쥐고 흔들며 ‘네까짓 게 뭔데 남의 소중한 자식을 나무라느냐’고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한 남자 고등학교에서는 자식 체벌에 불만을 품은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가 교장실의 기물을부수고, 담임교사에게 폭력을 가한 일도 있었다.
이런 끔찍한 봉변이나 폭행을 당한 교사들은 병원에 입원하여 장기간 정신과 치료를 받는 일이 번번이 있고,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일까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학교폭력과 그 외 다른 범죄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찰을 학교에 상주시키고 있다. 초등학교는 예외지만 하이스쿨(중. 고 과정) 에는 이미 1950년대부터 이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1999년 콜로라도주에 있는 한 하이스쿨에서 총기 사건으로 13명의 학생이 숨진 일이 발생하자 각 주마다 경찰을 두는 학교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났다.
큰 딸이 뉴욕에 있는 한 하이스쿨에 입학하던 날 동행했던 나는 교문에서 출입을 확인하고, 복도를 순시하는 경찰을 보고 적잖이 놀랐었다. 학교에 경찰이라니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학교가 아니라 우범지역의 한 건물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와 영국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생소한 일이었기에 더 의아했고 충격이 컸다.
큰 딸의 말을 빌리면 학교에서 학생들 간에 괴롭히거나 폭력행위는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복도나 운동장에서 서로 불쾌감을 주는 거친 행동조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경찰이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이 염두에 두고 스스로 조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찰은 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안전한 보호막이 되어준다고 했다.
교사와 학부모 간에 면담이 있을 시, 경찰은 가까운 곳에 머무르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뛰어들어 방패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뉴욕에 있는 학교에 뉴욕경찰 (NYPD) 이 투입된 것은 1998년인데, 그 기점으로 해서 학교폭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그 이전에는 갖가지 학교폭력이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는 교내에서 갱단까지 조직해 활동을 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되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경찰을 학교에 상주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미국 내에서도 찬반의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부 주의 몇 학교는 여론에 밀려 경찰을 철수시키기도 했다.
뉴욕도 마찬가지로 의견이 분분한데 찬성 쪽에 무게가 더 실려 있고, 경찰을 퇴출시킨 후,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게 많다는 이유로 현행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고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어머니는 앞을 막고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녹음이라도 한 듯 매일마다 반복하셨다. 그 말씀은 곧 공부 열심히 하고 학교에서 생활을 바르게 하라는 것을 함축한 것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 내가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할 때, 매년 3월, 새 학년이 시작되고 3주 정도가 되면 으레 학부모회의를 개최했다.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하기 위해서 학부모와 담임교사가 정보를 주고받는 자리였다. 회의가 끝난 후에는 개별면담으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학부모들이 공통적으로 부탁하는 것은 제발 우리 자식 꾸짖고 매를 들어서라도 올바른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교사를 대하는 학부모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선생님을 존경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학부모가 더 많다. 그저 교사라는 한 직업을 가진 월급 생활자로 생각할 뿐이다. 학부모 중 일부는 자신이 고용한 일꾼같이 만만하게 보는 경우도 있다.
담임교사에게 자신의 자녀는 집에서 귀중한 존재이니 무슨 말을 할 때는 안된다,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말로 기죽이지 말라고 협박(?) 같은 요구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
언젠가 햄버거 집에 갔다가 한 어머니와 중학교 2 -3 학년으로 보이는 아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대화가 여과 없이 생생하게 날아왔다. 담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선생님이란 호칭은 실종되고 그 여자 혹은 아무개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입에 오르내렸다.
심지어 어머니의 입에서는 '제까짓 게 뭐 안다고 그런다니?'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왜 그리 잘난 척이야' 이런 말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고학력 시대라 선생님들보다 어머니들의 학력이 높고, 자녀들 학습은 학원이나 개인 지도에 의존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이라면 당연히 선생님을 신뢰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를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잡아주고 이끌어주는 부모와 같은 존재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야 선생님의 가르침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가 선생님을 하찮게 생각하고 무시한다면 자녀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내가 교직에 몸담고 있었을 때, 한 기업의 회장 아들이 있었다. 위로 누나 두 명에 막내로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보물단지보다 더 귀한 존재였다. 그 정도면 부모는 아들을 과잉보호하고 신변안전에도 신경을 쓸 만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력이 뛰어난 강사에게 학습을 전담시키고,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서 생활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할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다.
회장 부부에게 학교 선생님이란 하찮고 무시할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는데 전적으로 아들의 교육을 일임했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자신들의 몸을 낮추었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예우를 받기만 하는 회장 부부가 선생님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은 아들에게 자신보다도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인지도 몰랐다.
회장부부는 선생님들과 아들의 학업, 생활에 대해 자주 상담을 하고, 잘못이 있으면 체벌을 해서라도 바르게 잡아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회장의 아들은 항상 밝은 표정이었다.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이나 얼굴에는 항상 웃음을 달고 있었다. 매사에 솔선수범했고, 궂은일도 회피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잘했다.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거나 편가르지 않았다.
방과 후에는 땀이 흥건해지도록 농구나 축구를 하고, 환경이 안 좋은 친구 집에 놀러 가기도 하였으며, 허술한 분식집에서 라면이나 떡볶이를 먹기도 했다. 부유한 집, 아니 재벌집 아들에게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이었다.
회장의 아들은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올바른 방향으로 인격이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선생님을 무시하는 학부모들,
선생님을 존경하는 학부모들,
그들이 얻는 것은 무엇이고, 잃는 것은 무엇일까? 한 번쯤 깊이 있는 생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흔들리는 학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교사들을 소생시키는 일이 시급하다. 땅에 떨어진 교권을 끌어올려 바로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교사가 제 목소리를 내고 제 역할을 할 때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기 위해선 교사들의 자발적인 자정 노력이 필요하고, 교육 당국자들의 제대로 된 정책이 필요하다. 학부모들이 교사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자녀를 학교에 보냈으면 학교를 믿고 교사를 믿고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는 부모의 자세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