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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Aug 30. 2023

뉴욕에서의 잔잔한 일상



바람이나 물결 따위가 가라 않을 때, 분위기가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 태도 따위가 차분하고 평온할 때, 우리는 잔잔하다고 말한다. 잔잔하다. 이 말을 들으면 왠지 마음에 안정감이 생기며 평화로워진다. 

심한 기류변화로 기내에서 고충을 겪어본 경험이 있기에 비행기를 탑승할 때 오늘은 기류가 잔잔하기를 바란다.

거친 풍랑에 뱃멀미를 심하게 했던 경험이 있기에 배에 오르면서 오늘은 잔잔한 물결이기를 염원한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외국에 살면서 힘들거나 괴로운 일을 경험해 보지 않았는데도, 매일 자고 일어나면 습관처럼 오늘 하루도 잔잔하게 흐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이런 바람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하루하루가 잔잔한 강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내가 판화를 공부하고 있는 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어브 뉴욕에 20대 후반의 옷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는 건장한 체구의 한국 유학생이 있었다. 나와는 열손가락을 쥐었다 펴기를 두 번 해야 될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옷에 투자를 많이 하네.”

그의 끝없는 옷의 변화를 보면서 어느 날 내가 입을 열었다.

“네에?”


“매일 바뀌는 그 옷들, 게다가 상표가 다 만만치 않은 브랜드”

“아 이것이요? 다 싸구려들이에요. 이 티셔츠는 15달러, 바지는 30달러예요.”

“공(0)하나씩 빼고?”

“아뇨 진짜.”

“그럼 짝퉁?”

“그건 아니고요. 우드버리 아웃렛 가면 싸게 팔아요.


좋은 정보였다. 두 딸이 런던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교복을 입었기 때문에 옷차림에 대해 그리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뉴욕에서는 자율 복장이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서 적합한 옷이 필요했다. 한 계절에 달랑 한 가지 옷으로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장기라서 그전 해에 입었던 옷은 작아서 입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경제적인 부담감 때문에 옷은 중저가 브랜드인 갭이나 올드 네이비에서 해결해 오던 터였다.


우드버리 아웃렛은 뉴욕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상당히 큰 규모였다. 명품에서부터 대중적인 브랜드까지 독립된 가게들이 겹겹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진열된 의류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값이 생각보다 놀라울 정도로 착했다. 정상 매장에 비해 50%, 혹은 7-80% 할인하는 곳도 있었다.

이월 상품이거나 하자가 있는 제품들일 수도 있지만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려웠다.

두 딸이 원하던 스포츠 브랜드 의류들, 이를테면 나이키, 아디다스, 폴로도 있고, 할인율이 커서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었다.

어디에 살던 정보가 필요하다. 우드버리 아웃렛을 몰랐다면 두 딸이 원하는 의류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뉴저지에 살고 있는 친구 S가 우리 가족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의 집은 뉴저지의 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다. 집들이 나란히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깝게는 수십 미터 멀게는 수백 미터 간격을 두고 하나하나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한결같이 성공한 자의 상징처럼 도도한 모습이었다.

친구의 집은 울창한 나무숲에 둘러싸여 아늑해 보이는 영화에서나 보아왔던 저택이었다.

상당한 크기의 거실은 천장이 높아 호텔의 연회장 같아 보였고, 클래식한 가구들이 적소에 놓여있어 품격을 더해주고 있었다.

한쪽 벽면의 너른 통유리창은 밖에 있는 푸르른 잔디밭이며 나무들을 그대로 빨아들이고 있어 깊은 산속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다이닝룸은 거실과 주방 사이에 있었다. 회의실의 테이블만큼이나 큰 식탁을 둘러싸고 편안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회의에 참석한 것처럼 서로 얼굴을 맞대고 나란히 앉아 미리 준비되어 있던 다과를 들며 대화를 나누었다.


다이닝룸에는 뒤 뜰로 연결하는 문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하여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너른 잔디밭에는 갖가지 나무들이 보기 좋게 줄지어 서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넓지는 않지만 계곡이 있었다. 그 위로 완만한 아치형의 나무다리가 설치되어 있었고, 가장자리에 한국에서 공수해 온 듯한 돌하르방 모양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작은 동양의 조형물 하나가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두 딸과 친구의 딸들은 껌 딱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공교롭게도 두 딸보다 친구의 딸들은 한 살씩 많았다. 자연스레 언니라는 호칭이 오가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 

그들은 맘껏 뒤뜰을 헤집고 다니고, 집에 딸린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더니 친구의 큰 딸 방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친구 부부와 아내와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미국에서의 생활, 아이들 교육문제 등이 화제에 올랐다. 주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다.

친구는 가까운 곳에 또 다른 집을 한 채 소유하고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는 작은 규모라고 했다. 거실 두 개에 화장실 두 개 베드 룸이 넷인 이층 주택인데 넓은 정원이 딸려 있다고 했다. 지금은 자영업을 하는 교민에게 세를 주고 있는데, 계약 만기일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만약 내가 원하면 와서 살 수 있게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가까이 살면 서로 외롭지 않게 생활할 수 있으며, 아이들에게도 어울려 사는 사회성을 기를 수 있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친구의 말처럼 나도 그런 멋진 주택에서 살고 싶었다. 세상에 좋은 집에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요는 돈이었다. 다달이 비싼 집세를 내는 것은 한국에서 돈을 가져다 쓰는 우리 여건에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는 그냥 살아도 되지만, 마음이 불편하면 지금 살고 있는 집 세만큼만 내라고 했지만, 남의 도움이나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는 내 성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웃으면서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지만, 답은 이미 내려진 상태였다.


친구는 우리를 중국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집에서 차로 20여분 걸리는 곳이었다. 주위에는 큰 슈퍼마켓, 커피숍, 빵집, 피자, 햄버거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중국 음식점은 건물 외관부터 실내 인테리어까지 범상치 않은 곳이었다. 출입하는 손님들의 차림새도 단정했다.

아늑한 룸으로 안내받은 우리는 종업원들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코스요리를 즐겼다.


친구와 헤어져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유난히 작고 초라해 보였다. 중고 가구점에서 사들인 가구들은 오늘따라 낡고 초라해 보였다.

어른의 마음도 이런데 하물며 두 딸은 친구의 집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을까?

비단 집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친구의 두 딸이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옷을 보면서 얼마나 부러웠을까?

매주 토요일이면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에서 첼로와 바이올린을 배우는 친구의 두 딸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주말이면 백화점에 가서 쇼핑을 하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는 친구의 두 딸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뉴욕에서 처음 맞이한 두 딸의 여름방학이 특별한 일없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내는 여전히 라구아디아 커뮤니티 칼리지 랭귀지 스쿨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나 또한 랭귀지 스쿨과 아트스쿨에서 공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내와 내가 집을 비운동안 두 딸은 독서를 하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학과 공부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

여름방학 동안 두 딸이 달라진 것은 운동(수영, 헬스)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런던에 있을 때 데이비드 로이드 스포츠 센터에서 운동을 했던 것처럼 뉴욕 생활을 시작하면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스포츠 센터에 패밀리 회원으로 등록을 했었다. 

런던의 스포츠센터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였지만, 큰 수영장과 헬스장이 있어서 운동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학기 중에는 보통 일주에 2 – 3회 정도 운동을 했으나, 여름방학 동안에는 5회였으니 거의 두 배 가량 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전에는 수영만 하였는데 지금은 아내와 함께 헬스장에서 운동을 병행했다. 다루기 쉬운 기구로 유산소 운동이 대부분이었지만, 체력을 향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여름방학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개학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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