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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Sep 13. 2023

내 친구, S (1)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큰 축복이며 위안이며 힘이 된다. The 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판화 공부를 하면서 분에 넘치는 좋은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 

미치코는 10여 년 동안 동판화 작업을 하는 키가 크고 품위 있어 보이는 40대의 일본 여성이었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항상 단정한 정장 차림이었다. 심지어는 작업을 할 때도 그랬다. 물론 앞치마를 걸치기는 하였지만. 한 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내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재료가 있으면 망설임 없이 주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할 때는 몸소 시범을 보이며 설명까지 해 주었다.

미치코의 주선으로 판화 반 학생들 작품을 일본의 오사카에서 전시할 기회가 있었는데, 리플릿을 내 작품으로 디자인할 정도로 배려가 컸다. 


마고는 프랑스에서 온 60대의 여성이었다. 동판화 작업을 오랫동안 해 온 그녀는 자신이 작품들을 테이블 가득히 펼쳐 놓고 작품 하나하나 제작 과정 특히 테크닉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해 주곤 했다. 시간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그녀가 고마웠다.
 
홍이라는 30대 초반의 중국 친구는 부모가 맨해튼 차이나타운에서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꽤 반듯한 건물에 내부 시설도 고급스러웠다. 맛집으로 소문이 나서 말쑥한 정장차림의 월스트리트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비즈니스맨, 시청 직원들이 주된 고객이었다. 뉴욕 시장도 가끔 들렀고,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연예인 중에 뉴욕에 오면 꼭 찾는 고객이 있다고 했다.

유유상종이랄까? 홍은 아시아 학생들과 잘 어울렸다. 미치코를 비롯하여 3명의 일본 학생, 그리고 나를 가끔씩 음식점으로 초대해 갖가지 요리를 맘껏 즐기게 해 주었다..


9월 초순이 되었다. 강하게 쏟아져 내리던 햇빛의 열기도 제풀에 지친 듯 기세가 꺾이었고, 하늘은 푸르름이 더해가고 있었다.

두 딸은 방학이 끝나서 학교로 돌아갔다. 

두 달 반이라는 긴 휴가였지만 우리는 변변한 여행 한번 못했다. 아내는 랭귀지 스쿨에서, 나 또한 랭귀지 스쿨과 아트스쿨에서 공부하느라 시간이 없었다. 

친구 S의 초대로 뉴저지에 다녀오고, 주말에 롱 아일랜드의 존스 비치, 롱비치, 섬의 끝자락에 위치한 몬탁을 당일치기로 다녀온 게 고작이었다.. 

이번 학기를 시작으로 작은 딸은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인 그레이드 6이 되었고, 큰딸은 고등학교 2학년인 하이스쿨 그레이드 11이 되었다. 

런던에서 1년, 뉴욕에서 1년의 외국학교 생활을 경험한지라 새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두 딸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차분했다. 그만큼 성장한 두 딸이 대견스러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울을 가리켜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예측할 수 없는 해괴한 일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서울에서 줄곧 살아왔지만 황당하고 괴이한 일을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뉴욕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했다.

학교가 개학을 하고 첫째 주 토요일, 뉴저지에 살고 있는 친구 S가 가족과 함께 우리 집을 찾았다. 토요일이어서 친구의 두 딸이 쥴리어드 음대 예비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첼로 레슨을 마친 후였다. 

집 앞에 주차공간에는 이미 차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어서 가까운 케이(K) 마트 주차장을 이용해야 했다. 

차를 파킹 한 친구는 안에서 선물로 가져온 꽃과 와인, 케이크를 꺼내고, 트렁크를 열더니 하드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부피가 큰 바이올린과 첼로까지 꺼내는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친구는 “여기선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아.” 이 말 한마디를 하고는 우리 집으로 향했다. 


아내가 정성 들여 준비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친구의 집까지는 차로 두 시간 이상 거리여서 서둘러 출발해야 했다. 

차를 주차한 곳으로 가서 문을 열려던 친구가 주춤했다. 다가서 보니 문이 열려 있었고, 차 안은 어지럽게 물건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심지어는 두 딸의 가방에 들어있던 책이며 노트, 악보까지 좌석과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차량 털이범의 소행이었다. 다행히 차 안에는 귀중품이 없어서 피해는 없었다. 

친구가 왜 그 부피가 나가는 악기를 집으로 옮겼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악기를 차량 안에 그대로 두었다가 털렸으면 어찌했을까. 명품악기들이라 값이 만만치 않은데.....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친구 S가 우리 집을 다녀간 그다음 날 연락을 했다. 자신의 회사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대화가 필요하면 내가 공부하고 있는 아트스쿨 앞에서 만나서 나누곤 했는데, 자신의 회사로 오라는 것은 의외였다. 그의 회사를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지만 그의 요청이 아니라 내 자의에 의해서였다.  

친구가 만나자는 시간에 맞추어 가니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공간에 놓여있는 테이블이며 책장, 서류를 꽂아 놓은 중후한 가구들이 엄숙감을 느끼게 했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은 따로 분리되어 있어서 조용하고 쾌적했다.

“오늘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해.”

중역 회의라도 하듯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친구가 입을 열었다. 

“………”

여느 때와는 다르게 진중한 목소리여서 무슨 이야기일까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뉴욕에서 생활한 지 일 년이 훨씬 넘었는데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어. 큰 것은 모르지만 웬만한 것은 도와줄 만한 능력이 있는데….. 내 책상 서랍엔 항시 비상금으로 오만불은 있어. 돈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갔다 써. ”

“…… " 

전에도 친구는 이런 제안을 몇 차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돈을 빌려야 할 만큼 쪼들리지 않았고, 솔직히 돈거래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는 뭐냐면, 상업 갤러리를 해보는 것 어때?”

“상업 갤러리?”

“응. 웬만한 곳에 운영하면 먹고살고, 애들 학교 보내는데 지장이 없을 거야. 한국에 있는 돈 언제까지 가져다 쓸 수는 없잖아”

“………”

의외의 제안에 나는 대답을 찾지 못하고 멍청히 그를 바라보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국 전역에는 헤일수없이 많은 상업 갤러리가 있었다. 맨해튼을 비롯하여 변두리 지역에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파는 그림의 종류는 다양했다. 르네상스, 17, 18세기 거장들의 작품을 그대로 모사한 작품들, 외국의 풍경들을 사실적 혹은 인상파 화가들의 스타일로 그린 그림들,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의 작품을 모방한 추상화들, 심지어는 사군자나 산수화, 화조화 같은 동양화도 눈에 띄었다. 작품의 질도 천차만별이었다. 대가들이 농익은 테크닉으로 그러낸 듯한 격조 있는 작품에서부터 아마추어 냄새가 풀풀 나는 어설픈 그림들도 있었다.  

미국에는 워낙 다양한 민족과 문화 차이, 예술에 대한 안목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하기 때문이었다


“비용 신경 쓸 것 없어. 상가 얻을 때 디파짓(보증금)은 내가 부담하고, 작품들이야 여기 있는 것들 얼마든지 공급해 줄 수 있고.”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그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림 많이 팔면 결국 나도 돈을 버는 일이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야.” 

“…… “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다분히 도와주고 싶은 의도라는 것을 빤히 알 수 있었다.


며칠 동안 친구 S의 제안을 재보고 또 재보았다. 나에게 충분한 창업 자금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한국에서 계속 돈을 가져다 쓸 만큼 풍족한 돈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곳에서 수입이 생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일이었다.. 내가 공부를 마치면 두 딸은 학업을 중단하고 우리나라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갤러리를 하게 되면 이곳에서 오래도록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체류하는데 안전한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갤러리 운영은 그리 문제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내와 내가 시간을 내어 관리하면 되고, 친구가 회사 직원을 한 명 지원해 준다고 했으니 미비한 점은 배우면 될 것 같았다.

솔직이 남의 신세나 도움을 받는 것이 생리에 맞지 않고 큰 부담이 되긴 했지만,  수익이 나면 그가 투자한 돈을 갚을 수 있을뿐더러 이익이 크면 그에게 득이 될 것 같았다. 

만약 갤러리를 하다가 중도에 접게 되더라도 건물 임대 디파짓(보증금)과, 작품들은 친구가 회수할 수 있으니 피해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 S의 제안을 받아들여 갤러리를 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내와 나에겐 새로운 숙제가 생겼다.

갤러리 장소를 물색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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