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일에 직면하기도 한다. 나는 단 한 번도 자영업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특히 외국에 살면서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 S가 상업 미술 갤러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응한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영업을 하게 되면 두 딸이 외국에서 계속 공부를 할 수 있는 길이 트인다는 것과, 체류에 자유로운 영주권을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사업을 한다고 해서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외국에 나온 나의 목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현지에서 돈을 벌며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면 경제적인 부담감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바람직한 길이었다.
아내와 나는 본격적으로 갤러리에 적합한 장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랭귀지 스쿨에서 수업이 끝나면 약속장소에서 만나 활동을 시작했다.
언제나 사람들이 물밀처럼 밀려들어 소용돌이치는 맨해튼이 우선순위였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면적이기 때문에 꼼꼼히 훑어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주거지역이 가까이 밀집되어 있고 상가가 활성화된 곳을 선별하여 둘러보았다. 관광객보다는 뉴요커들의 활동무대를 타깃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헤집고 다니다 보면 여건에 부합하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주위에는 이미 오픈한 갤러리가 턱 버티고 있어 기운이 빠졌다.
벌집처럼 사방으로 끝없이 늘어선 상가들 중 간혹 비어 있거나 임대로 나온 곳이 있었지만, 규모가 협소하든가, 주변여건이 갤러리 자리로서는 신통치 않은 곳이었다.
아내와 나는 롱 아일랜드를 주목했다. 맨해튼 허드슨 강어귀에서 동북쪽으로 190km 뻗어 있고 너비는 19 -37km로 폭이 좁고 긴 섬이다.
롱 아일랜드는 고 연봉의 직장인들과 사업가들, 은퇴한 여유 있는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그림에 대한 관심과 소비가 높을 것 같았다.
2001년 9월 11일 화요일이었다. 하늘은 부드러운 붓으로 파란색을 곱게 칠한 듯 티 없이 맑았다.
아내와 나는 랭귀지 스쿨을 결석하고 소풍이라도 가듯이 들뜬 마음으로 오전 9시에 롱 아일랜드를 향해 출발했다.
좀처럼 하지 않는 결석까지 감행하고 이른 시간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그곳 지리에 훤한 교민 한 명이 우리를 안내해 주기로 했는데, 오전부터 오후까지 시간을 내준다고 해서 하루를 알차게 답사할 요량이었다.
롱 아일랜드는 행정구역으로 크게 퀸즈 카운티(뉴욕시티에 포함), 낫소 카운티, 서폭 카운티가 있다. 동쪽으로 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서폭 카운티는 은퇴한 경제적으로 안정된 노인들이 선호하는 전원주택들이 많은 곳이다. 가는 곳마다 숲 속에서 드러나는 그림 같은 집들을 볼 수 있고, 특히 해변을 따라 늘어선 모습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환상적이다. 85%에 가까운 백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낫소 카운티는 섬의 중간 부분에 위치해 있는데, 학군이 좋고, 대중교통 이용이 용이하며, 쇼핑몰과 백화점, 다양한 물건을 취급하는 상가들, 음식점과 카페, 영화관, 도서관, 역사적 건물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살기 좋은 곳으로 정평이 나 있는 곳이다.
어느 정도 생활기반을 잡은 교민들이 선호하는 지역 중 한 곳이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낫소 카운티에 있는 많은 타운들 중에서 몇 군데를 선별해 둘러보기로 했고, 가장 먼저 남쪽에 위치한 학스빌을 찾았다.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길게 뻗은 도로를 따라 걸었다.
거리에는 생각보다 사람의 왕래가 많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묘했다. 모든 사람들은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것처럼 표정이 없었고 어두워 보였다. 두 명, 혹은 여러 명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는데 웃음기가 싹 가신 침울한 표정이었다.
미국 어느 지역에서도 이런 경직되고 냉랭한 분위기는 경험해보지 못했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 패스트푸드 가게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은 뒷전인 채, 한쪽 벽에 걸려있는 TV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
시계를 보니 10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TV화면에는 맨해튼 남쪽에 있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 두 곳에서 검은 연기가 무섭게 피어오르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처럼 잿빛 연기가 온통 하늘을 덮고 있었다.
실내에 있는 사람들은 ‘오 마이 갓’ (‘으악’ ‘어떡해’) 소리와 함께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TV에서는 화재로 불타던 빌딩 두 곳이 차례로 붕괴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주위 사람들은 감정이 더 격해져 No No를 연발하며 두 손을 불끈 쥐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철근과 콘크리트로 지어진 육중하고 견고한 빌딩이 한순간에 사라지다니 충격적이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일행은 빌딩에 화재가 발생한 원인을 모르고 있었는데, TV는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이 저공으로 날던 비행기가 북쪽 타워를 충돌하는 장면과, 뒤이어 또 한대의 비행기가 남쪽 타워에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여객기는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 외곽에 위치한 거대한 미군 본부인 국방부(펜타곤)의 서쪽 면에 충돌하고, 또 다른 비행기는 펜실베이니아 들판에 추락하면서 훑어진 잔해들을 보여주었다.
너무 비현실적인 장면이라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고,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TV화면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도저히 실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세계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강대국의 최대 도시 뉴욕과,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런 끔찍한 테러가 발생했다는 것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공포심이 극에 달하여 진정할 수 없이 몸이 떨렸다.
학교에 간 두 딸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무섭고 불안해할까.
이런 경황에서 도저히 갤러리 자리를 보러 다닐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일정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되돌아왔다.
학교는 사건이 터진 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해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두 딸은 아내와 나보다 미리 집에 도착하여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정오가 훨씬 지났는데도 쌍둥이 빌딩 붕괴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히 두 딸은 공포감을 갖는다든가 불안한 기색 없이 의연해서 안심이 되었다.
9.11 이후로 뉴욕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추가적인 테러 우려가 있는 건물들은 공항처럼 검색대가 설치되고 출입하는 사람들의 가방과 몸수색을 철저히 했다.
다양하게 계획된 크고 작은 행사들은 줄줄이 취소되었다.
지하철역, 거리, 건물들은 경찰의 경비가 삼엄해졌다.
평화스럽고 자유롭던 분위기는 경직되고 감시하는 통제체제로 바뀌었다.
랭귀지 스쿨과 아트스쿨을 오갈 때면 플러싱과 맨해튼 타임 스퀘어를 내왕하는 7번 트레인을 이용해야 했다.
맨해튼에서는 지하로 운행되지만, 퀸즈 지역에서는 고가로 세워진 철길을 따라 기차가 달리는데, 주위에는 높은 건물들이 별로 없어 맨해튼이 한눈에 들어오는 구간이 많았다.
그동안 무수히 오가며 차창을 통하여 보아 왔던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은 위용이 당당했으며 맨해튼을 가득 채워주는 역할을 톱톱히 했었다.
그러나 테러로 두 빌딩이 사라진 지금은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뼈대가 제거된 것처럼 불안하고 허전해 보였다. 그리고 슬퍼 보였다.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된 그쪽을 바라만 봐도 슬픔이 목 끝까지 차 올랐고,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희생된 숱한 사람들, 그들은 누군가의 사랑하는 딸이며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엄마이고 아빠였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남편이었으며, 누군가의 연인이었으며, 형제였다.
졸지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가족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까?
얼마 전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서로 마주 보고 대화하며 웃던 사람이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까. 영영 만날 수 없다는 괴로움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슬픔에 잠기고, 눈물지을 게 자명했다.
타인과의 관계도 소원해질 것이며, 존재의 허무함까지 느끼게 되고, 마음은 언제나 두터운 어둠이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조직 알카에다가 일으킨 테러, 그날의 놀랍고 아픈 기억은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ㅡ 월드 트레이드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9. 11 테러를 추모하는 기념비와 박물관, 그리고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 프리덤 타워가 세워졌다. 그 높이는 무려 541미터로 원래의 417미터였던 타워보다 훨씬 높다.
공사는 2006년 11월에 첫 삽을 뜨고, 2014년 11월에 완공해서 개방하였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