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고 변함없이 흐르는 게 시간이고 공평하게 하루 24시간이 주어지지만, 어떤 일을 경험하는가에 따라서 느끼는 길이는 사뭇 다르다.
어느 때는 정신을 차릴 수없이 빠르게 지나가버리는가 하면, 또 다른 때는 한순간을 하루처럼 길게 늘려 놓는다
9. 11일 테러와 그 뒤를 이은 내 친구 S의 죽음은 시간을 제자리에 꽁꽁 묶어 놓고 아픔만 내 몸속에 욱여넣어 주었다.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살아가는 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겠지만, 또 다른 살아 볼만한 일들이 슬며시 배어들어 시간 흐름의 물꼬를 터준다.
5월이 되었다. 집 앞 공원에 듬성듬성 서있는 거대한 고목들의 연녹색 잎들은 꽃처럼 고왔다.
나는 가을학기부터 석사 학위과정을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디 아트 스튜던츠 리그 어브 뉴욕에서 공부를 시작한 지도 2년이 다가오고 있었고, 가을학기 전까지 출석하면 2년 3개월이 되었다. 이제는 환경을 바꿀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그동안 나는 토플(TOFLE)과 아이엘티에스(IELTS)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는 아니지만, 뉴욕에 있는 대학교와 런던에 있는 미술 대학교에서 원하는 점수를 확보해 놓고 있었다. 이제 그 증명서를 학교에 보내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두 가지의 성적 증명서를 손에 쥐고 뉴욕에 머물 것이냐 아니면 런던으로 떠날 것인가를 두고 저울질을 해야 했다.
친구 S가 제안했던 대로 갤러리를 하게 되었으면 당연히 뉴욕에 터를 내려야 하겠지만, 친구의 죽음으로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에 이곳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9월 11일 테러가 발생한 지도 8개월이 지났지만 미국인들은 그날의 경악과 공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들은 하나로 뭉쳤고, 강한 애국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상처 입은 조국의 모습에 아직도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고, 집집마다 성조기를 창이나 현관문 앞에 내걸었다. 심지어는 집의 벽면 전체를 감싸기도 했고, 지붕을 덮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생소한 풍경이었다.
이방인과 유학생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멸시와 차별의 수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고 면전에서 고함을 지르며 위협을 하고, 무차별적인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이방인이 운영하는 가게에는 불매운동을 벌이고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였으며 병이나 오물들을 투척하기도 했다.
미국은 경찰국가로 재정비되어 있었다. 역이며 거리, 건물 앞에는 경찰들이 수도 없이 깔리고 감시와 검색을 일삼고 있었다.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예방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방인이나 유학생으로 살아가는 것은 목구멍 속에 생선 가시가 박힌 것처럼 불편한 시간이었다.
국수주의로 변한 미국인들이 이방인에 대해 적대시하는 눈빛과 차별에 아내와 두 딸도 불편해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9. 11 테러 이후, 두 딸은 런던에서의 평화롭던 생활을 불쑥불쑥 입에 올리곤 했는데, 무척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도 큰일을 두 번씩이나 겪고 나서는 문득 런던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고 있었다.
2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평화로운 도시를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런던에 싫증이 난 사람은 인생에 싫증이 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 속에 볼거리들을 두루두루 숨겨 놓고 있다가 반겨주는 멋진 도시를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나는 이미 조건부 입학 허가를 받아 놓았던 런던에 있는 윔블던 스쿨 오브 아츠(Wimbledon School of Arts)에서 공부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금의 학교 명칭은 윔블던 칼리지 오브 아트로 바뀌었고, 런던 예술 대학교에 소속된 하나의 학교이다.) 런던의 남서쪽 윔블던 머톤 로드에 위치해 있는데 크게 무대미술 분야와 순수미술 분야로 나뉘어 있는 학교였다.
시간은 강물처럼 어느 구간에서는 흐름이 주춤거리기도 하고, 어느 구간에서는 서둘러 흐르기도 하면서 8월 하순에 닿았다. 이젠 런던을 향해 떠날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2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의 뉴욕 생활을 되돌아보니 의외로 알차고 값진 시간들의 흐름이었다
9. 11 테러와 그 후, 미국인들이 이방인을 향한 비신사적인 행동, 그리고 내 친구 S의 죽음으로 너무 큰 충격과 아픔이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좋은 시간까지 가리어지고 있었다.
우선 나의 시간만 하더라도 의미 있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랭귀지 스쿨에서 공부한 것도. 아트스쿨에서 다양한 판화를 공부한 것도, 좋은 친구들과 교류한 것도 값진 시간이었다.
아내가 뉴욕에서 보낸 시간도 의미 있고 알찼다.
오랫동안 꿈이었던 영어공부를 라구아디아 커뮤니티 칼리지 랭귀지 스쿨에서 최고의 레벨까지 마치고 수료증까지 거머쥐었으니까.
아내는 이곳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한 번도 같은 레벨에 머무른 적이 없었다. 나이 40대 중반에 매 레벨 테스트를 통과한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었다. 최고 레벨에서 공부할 때에는 마틴 루터 킹의 생애에 대해 20여 분간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선생과 학생들의 눈물샘을 터뜨리기도 했다.
큰 딸도 나름대로 내실 있게 보낸 시간이었다. 특출 나게 활동한 것이 없고 학교 성적 또한 특별히 내세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과학이나 수학, 미국의 역사, 세계사는 언제나 상위권을 유지했으며, 그 밖의 과목들도 중간단계를 웃돌았다.
뉴욕 생활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을 보낸 것은 작은딸이었다.
책 읽는 습관이 몸에 배여 독서량이 크게 늘었고, 글쓰기와 그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Grade 6(6학년) 초에는 달(Moon)에 관해 쓴 글이 뉴욕의 교육청 게시판에 게시되기도 했다
여름 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태양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 더위를 몰고 오지 못하던 6월 하순, 작은 딸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식장의 풍경은 우리나라와 다르지 않았다. 강당에는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의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이나 선물도 익숙한 모습이었다.
졸업식에서 작은딸은 미술 특기상과 졸업생을 대표하여 백인 남학생과 공동으로 최고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사전에 수상자를 알려주고 상을 받는 리허설까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정보가 없어서 전혀 낌새를 알 수 없었던 터라, 졸업식장에서 작은딸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아내와 나는 놀라움과 감격이 뒤섞인 야릇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곳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초등학교 3학년에 외국에 나와서 공부를 한 지 3년 남짓 되었기 때문에 졸업생을 대표하는 가장 큰 상을 받으리라 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뉴욕생활 중 잊지 못할 일이 있었다. 갤러리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시간을 흘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맨해튼을 누비며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세계 인종의 전시장이란 곳에서 다양한 문화와 사람 사는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거기에 롱 아일랜드 깊숙한 곳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기회까지 가진 것은 특별한 시간이었다.
친구 S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가 운영하던 사업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염려했는데, 기우였다. 전문 경영인을 영입했고 친구 아내의 두 남자 형제가 합류해 운영하고 있었다. 형제 중 한 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친구 S의 밑에서 경영을 배워온 터였다. 이 정도면 큰 흔들림 없이 순조로운 항해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친구는 떠났지만, 그가 피와 땀으로 일궈 놓은 성이 건재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했다.
뉴욕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슬비에 옷이 젖듯 정이 마음속에 스며들어 자리 잡은 곳이 많았다.
많은 책들이 웃으며 반가이 맞아주던 맨해튼 유니온 스퀘어에 있는 반스 앤 노블, 허드슨 강을 따라 뻗어있는 산책로,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던 센트럴 파크, 다양한 예술의 세계로 안내해 주던 모마, 구겐하임, 휘트니, 뉴뮤지엄, 소호와 첼시 지역의 숱한 갤러리들…..
청설모와 반딧불이의 놀이터인 아파트 단지 내 소 공원, 숱한 우리 가족의 대화가 넘실대던 집 근처의 스타벅스, 일주일이 멀다 하고 빈번히 찾았던 암흑도서관이라 부르던 동네 시네마.
뉴욕을 떠나 런던에 살 때에는 문득 머릿속에 정든 이곳들이 떠올라 그 시간들을 그리워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