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햇살이 조명처럼 쏟아지던 8월 하순, 우리 가족은 다시 런던 품 안에 안겼다. 런던을 떠난 지 2년 3개월 만이었다. 긴 공백이었지만, 마치 어딘가 여행을 떠났다가 하루나 이틀 만에 되돌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눈에 익었고 편안했다.
우리가 둥지를 튼 곳은 윔블던이었다. 전에 살았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는 정이 듬뿍 들었던 곳이기도 했고, 더욱이나 내가 앞으로 다닐 학교가 인근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두 개의 베드 룸과 주방, 거실, 화장실이 딸린 아담한 플랏(아파트)을 렌트했다.
한국에서 처음 런던에 왔을 때는 앞뒤로 정원이 딸린 2층으로 된 단독 주택에 살았지만, 외국에서 사느라 3년 반 가까이 만만치 않은 돈을 지출했기 때문에 지금은 렌트 비에서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만 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레인즈 파크 역에서 더램 로드를 따라 올라가면 야트막한 언덕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었다. 3층으로 되어 있었고 한 층에 3 가구가 생활하고 있었다.
집 앞에서 도로를 건너면 풍경화처럼 예쁘게 조성된 홀랜드 가든이 있고, 가까운 곳에 면적이 상당히 큰 잔디가 곱게 깔린 공원이 있어 쾌적하고 평화로운 동네였다.
대중교통 이용에도 편리했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면 윔블던 다운타운까지 10여분 만에 갈 수 있었고, 레인즈 파크 스테이션에서 기차를 타면 런던의 중심가까지 30분이면 충분했다.
작은 딸이 다니는 하이스쿨(중. 고 과정)은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다. 고풍스러운 전통 주택들이 즐비한 조용하고 안전한 지역에 위치한 남녀공학이 아닌 여학교였다.
작은 딸은 뉴욕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하이스쿨 Year 8, 한국으로 치면 중학교 1학년 생활을 시작했다.
큰딸은 뉴욕에서 하이스쿨 Crade 11 (고등학교2학년)을 마쳤기 때문에 런던에서는 Year 12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Year 12. 13은 A레벨(Sixth Form) 과정으로 2년 동안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과학, 예술, 인문학 등에서 세분화된 많은 과목 중, 최소 3개에서 많게는 5 개를 선택하여 공부하게 된다. 매년5 - 6월 교과별로 순차적으로 시험이 치뤄진다, 시험 결과는 8월 중순에 발표한다. 이 시험이 특이한 점은 개인사정으로 시험을 치루지 못했거나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1월과 10 - 11월 2회에 걸쳐 추가로 시험이 시행된다.
A 레벨을 공부하는 2년 동안 2회의 시험을 치른 결과에 의해서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단 한 번 수능시험 결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우리나라는 수능시험조차도 선다형 문제이지만, A 레벨 시험은 논술형 시험이다. (물론 영국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모든 시험은 논술형이지만)
큰 딸은 A 레벨을 공부하기 위해서 집에서 10 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학교를 다녀야 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는 공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큰 딸은 생물, 화학, 심리학, 히스토리 4과목을 선택했다. 2년에 걸쳐 이 과목을 심도 있게 배우게 된다.
과목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 몫이었다. 유치원 때 적성이나 취미를 무시하고 피아니스트를 만들겠다는 부모 욕심에 레슨을 시켰다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 그만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후로는, 모든 결정은 전적으로 본인 의사에 맡겨왔다.
하이스쿨 Year 8에 공부하는 작은 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뉴욕에서는 외국어로 스페인어를 배웠었는데, 이곳에서는 불어를 배우고 있었다. 이미 일 년 전부터 시작한 학생들과는 큰 갭이 있었다. 본인 스스로 공부를 해서 따라가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초부터 닦아줄 선생님이 필요했다. 마침 우리가 사는 아파트 2층에 프랑스 태생의 60이 다 되었을 초로의 남성이 살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작은 딸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한 번도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이 없고 문법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무리라며 선생님을 소개해주었다.
오데뜨라는 이름을 가진 선생님이었는데, 프랑스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인과 결혼하여 런던에 살며 오랫동안 한 사립 하이스쿨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쳐온 베테랑이었다.
190cm의 큰 키에 마른 몸매를 가진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인상을 주는 5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큰 키 때문에 보기만 해도 시원하게 느껴졌는데 약간 굵은 톤의 남성 같은 목소리는 더욱 시원스러웠다.
그녀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면 시곗바늘처럼 정확하게 우리 집에 도착하여 작은 딸을 지도했다. 정해진 시간은 두 시간이었지만 언제나 초과했다. 10-20분은 보통이고 어느 때는 30분 이상을 더 가르쳐 주기도 했다. 단 1분 1초라도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 서양 사람에게서 그것은 흔치 않은 배려였다. 게다가 큰딸이 불어를 배우고 싶은 의사를 표하자 작은 딸과 같이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그녀는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토요일 집안행사나 개인적인 용무가 있을 때는 날짜를 앞당기거나 늦추어 철저하게 보충을 해주었다.
수업은 두 딸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카드게임은 물론 어린이들을 위한 책 중에서 쉽고 재미있는 부분을 복사해 와서 읽게 했고, 영화 테이프를 가져와 시간이 있을 때 보라며 놓고 가곤 했다.
오데뜨가 두 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시간이 되면 아내와 나는 집을 나섰다.
공부 장소가 거실이어서 방에 있으면 방해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존재가 신경을 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베이커리 카페를 찾았다. 같은 장소에서 3대째 내려오는 역사가 깊은 곳이었다. 건물 앞에는 넓은 공간이 있어서 노상 카페로 활용하고 있었다. 빵의 종류가 다양하고 커피의 맛이 특출 나 손님이 끊기지 않았다.
아내와 내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10시가 넘었지만 주말이라 늦잠을 즐긴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즐기기 위하여 속속 찾아들었다. 이곳은 정성 가득한 가정식 샌드위치와, 잉글리쉬 블랙퍼스트 (스크램블 에그 혹은 계란 프라이, 베이컨, 소시지, 삶은 콩, 버섯, 토마토로 만든 음식을 토스트와 같이 먹는다)가 소문난 맛집이어서 그것을 즐기기 위해 찾는 손님들이 많았다.
가까운 곳에 이런 카페가 있어 여간 편리한 게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을뿐더러, 빵을 위주로 아침 식사를 하는 우리가족에게 신선하고 맛있는 것을 제공해 주는 곳이었으니까.
계획이란 앞으로 할 일을 미리 설계하는 것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변경이 필요할 경우가 있다. 나의 석사과정 계획이 그랬다.
영국은 석사과정이 1년이다. 보통 10월 초에 시작하여 그다음 해 7월에 졸업을 하기 때문에 실상 공부하는 기간은 채 10개월이 안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짧은 시간에 제대로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성공적인 끝맺음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왕좌왕하다가 헛되이 시간만 흘려보낼 것 같았다.
영국에는 파운데이션 코스가 있다. 대학 예비과정 이라고도 불리는 전공분야와 관련된 사전지식을 1년 동안 습득하는 과정이다.
성공적인 학부 생활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어서 대학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 코스를 공부하면 석사과정을 공부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마침 윔블던 스쿨 어브 아츠에는 파운데이션 과정이 있었다. 메인 빌딩에서 윔블던 중심가 쪽으로 걸어서 10여분 거리에 독립된 빌딩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공부를 시작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 과정을 포함해도 석사과정을 마치는 것은 2년이면 충분했다.
윔블던 칼리지 어브 아츠 파운데이션 코스에는 페인팅, 조각, 무대디자인 세 과로 나누어져 있었다. 나는 당연히 페인팅을 선택했다.
학교에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꽃처럼 피어나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어쩌다 20대 후반이나 30대로 보이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나처럼 나이가 든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교수들도 대부분 젊었고, 나보다 연장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나는 개별적으로 주어진 조그만 작업 공간에서 교수가 주는 프로젝트에 따른 리서치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학생들과 함께 강의를 듣고,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파운데이션 과정을 보내고 있었다.
9. 11 테러 후에 뉴욕에서 사는 동안은 항상 잿빛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았고, 마음은 우중충 했었다. 런던에 살면서는 머리 위엔 언제나 밝은 빛이 빛나고 있었고 깊은 바다처럼 파랬다. 이런 환경은 마음에도 그대로 스며들었다.
우리 가족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은 것도 이런 마음 때문이었을 게다.
데이비드 로이드 스포츠 센터에서 패밀리 회원에 등록하여 운동을 재개하였고, 미술관이나 갤러리들도 신바람 나서 찾아다녔다. 테이트 모던, 테이트 브리튼, 내셔널 갤러리, 화이트 큐브, 서펜타인 갤러리.....
뉴욕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미술관들이 많았지만, 비싼 입장료 때문에 출입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6세 이하는 무료이고, 학생들은 할인이 되었지만). 그러나 입장료가 무료인 런던에서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유영했다.
그뿐 아니라 하이드 파크와 세인트 제임스 파크, 리젠트 파크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