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라는 새가 있다. 오리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목이 길고 다리가 짧으며 강, 바다, 늪지에서 서식한다. 우리나라에는 주로 가을에 와서 겨울을 나고 봄에 시베리아, 사할린, 알래스카로 가는 겨울 철새이다.
기러기 아빠라는 말이 있다. 자녀의 조기 유학으로 자식과 아내를 해외로 보내고 자신은 국내에 남아 돈을 벌어 보내는 가장을 이르는 말이다.
기러기 엄마는 자녀의 교육을 위하여 남편과 떨어져 외국에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기러기 가족이란 자녀들의 외국 유학이나 부모의 취업 따위의 이유로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을 일컫는다.(네이버 사전 인용)
그렇다면 두 딸과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국내에서 돈을 버느라 아내와 떨어져 생활하는 우리 가족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기러기 가족이라고 해야 하나?
아내가 없는 기러기 가족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동안은 그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파에서 책을 읽던 아내가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것 같았고, 마트에서 필요한 식료품을 사서는 종이백을 두 손으로 받쳐 가슴에 안고 집안에 들어서는 것 같기도 했다.
주방에서 허밍과 함께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집을 나설 때면 오늘 일찍 오지? 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지낼 때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막상 떨어져 있으니 그 자리가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런데 하물며 두 딸에게는 엄마의 부재로 오는 빈자리가 얼마나 큰 것일까?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가 불가할 것 같았다. 마음 한구석에 항상 공허함으로 가득 채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아내가 전담했던 가사와 음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아내에게 배운 대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었다. 전기밥솥을 이용했지만, 어느 날은 죽처럼 질었고, 어느 날은 쌀이 살아있기도 했다. 반찬은 짜거나 싱겁기 일쑤였고, 도통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실수의 연발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음식 솜씨가 조금씩 향상되는 것이 눈과 혀로 증명이 되었다.
음식을 하면서 터득한 것은 서두르거나 대충대충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재료의 특성을 살려 다루고 양념을 알맞게 조절할 때 맛은 배반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아내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통하고 있었다. 가장 편리하고 빠른 방법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전화통화였으나 우리는 전화를 기피하고 있었다.
처음에 몇 번은 전화 통화를 했는데, 서로가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목이 메어서 한동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수시로 말을 잇지 못하고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전화요금도 버거운 수준이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카톡을 이용하여 무료로 무제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스템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화 요금을 절약하기 위하여 전화 카드를 구입하여 사용했는데, 20파운드(그 당시 한화로 약 삼만 삼천 원) 짜리를 구입하면 한번 통화에도 빠듯했다.
계속 사용할 경우 한 달이면 백만 원이 넘는 돈을 지출하게 될 판이었다.
우리는 생각 끝에 e메일로 소통을 하기로 했다. 런던과 서울의 시차는 9시간 서울이 빠르지만, 3월의 마지막 월요일 오전 1시부터 10월 마지막 월요일 2시까지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기간에는 8시간 빨랐다.
두 딸과 나는 하루일과를 마감하는 밤 11시를 전후해서 그날 있었던 일,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돌아가면서 컴퓨터에 글을 써서 이메일로 보냈다.
아내는 아침에 기상하면 우리가 보낸 이메일을 읽은 후 답장을 보냈고, 우리는 아침 기상과 함께 아내의 이메일을 읽었다.
파운데이션 코스가 시작되고, 3개월이 지나자 지도교수인 튜터(Tutor)와 진학 상담이 시작되었다.
나는 윔블던 스쿨 어브 아츠 순수미술 석사과정 입학을 확정해 놓고 있는 상태라 튜터와 학교선택에 대해서 면담할 때, 이 사실을 밝혔다.
“이해할 수 없군요. 왜 이 학교 한 곳만 집착하죠? 다른 학교도 시도해 봐야 죠.”
담당 튜터인 금발의 앤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나에게 로열 아카데미 어브 아츠(왕립 예술원)를 추천해 주었다. (로열 칼리지 어브 아츠와는 다른 학교임)
그 학교는 페인팅, 조각, 판화 3 과가 있었는데, 통 털어 1년에 60명만 선발했다.
다른 학교는 석사과정이 1년인데, 이 학교는 2년(그 후에 3년제로 됨)이었으며 전액 장학금 혜택이 주어졌다. 경쟁률이 치열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자신이 없다고 거절했지만, 튜터인 앤과 강사인 닉은 우선 학교부터 견학하자고 어느 날 오후 나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학교 오픈 데이 이외에는 출입이 까다로웠으나 앤은 튜터였고, 특히 닉은 이곳 출신이기 때문에 쉽게 출입이 가능했다.
학교는 역사적인 건물에 복도를 따라 오래된 조각작품들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 마치 박물관에 온 것 같았다. 작업실과 복도에 걸려있는 학생들의 작품은 이미 전문가 수준이었다.
나는 그 학교의 분위기와 학생들 작품에 주눅이 들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았다.
앤과 닉은 그 학교 입학원서까지 챙겨주며 신청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끝내 포기했다. 그곳은 내 능력밖의 세계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딸은 오데뜨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6개월이 안되어 반 친구들 과의 격차를 따라잡았고, 얼마 후에는 그들을 추월할 수 있었다. 작은딸의 노력이 있었지만 성실하게 지도해 준 오데뜨의 덕분이었다.
그녀가 더욱 고마운 것은 아직 성장기에 있는 두 딸을 완전한 인격체로 대우했으며, 끈끈한 사랑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녀는 두 딸과의 대화 주제를 사회문제나 인생, 예술에 관한 것 등 폭을 넓혔으며 고향인 프랑스나 다른 나라에 여행을 다녀올 때는 기념이 될 만한 선물을 잊지 않았다.
이스터(부활절) 홀리데이가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큰 명절이다.
이스터 데이는 매년 날짜가 바뀌는데, 이는 춘분 이후 보름달이 뜬 첫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이스터데이 전 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둔 날이다. 슬픈 날을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이 죽음으로 부활하여 이 세상에 다시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날 영국 사람들은 핫 크로스 번이라는 십자가 모양의 크림이 올려진 달콤하면서 매콤한 맛의 빵을 먹는 것이 전통이다. 우리나라에서 부활절에는 삶은 달걀을 주고받는 것처럼 영국은 주로 계란 모양의 초콜릿을 주고받는다.
매년 이스터 데이 이틀 전인 금요일부터 다음 주 월요일(뱅크 홀리데이)까지. 공무원이나 직장인들은 휴가에 들어간다. 초등학교와 하이스쿨 학생들은 2주간의 휴가를 가지게 되며, 대학교에서는 학교의 실정에 맞게 조절하여 2주 – 4주의 긴 휴가를 갖는다.
2003년의 이스터 데이는 4월 20일로 다른 해 보다는 늦은 편이었다. 본격적인 봄의 풍경이 펼쳐지는 시기였다. 꽃이 피어나고 나무의 잎들은 싱그러웠다.
사람들의 표정도 계절처럼 밝게 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없는 기러기 가족인 우리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두 딸과 함께 미술관을 가고, 맛있는 파자 집을 가고, 워터스톤스(대형서점)를 가고, 오데온(시네마)을 가고, 천국을 옮겨 놓은 듯한 규모가 엄청난 식물원인 큐 가든(Kew Garden)을 산책하고, 동네 카페에서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를 먹고, 템스 강변을 거닐고…..
무엇을 해도 마음이 빈 것처럼 허전했다.
오데뜨는 이스터 휴가 중에 우리 가족을 집으로 초대했다. 아내와 떨어져 사는 두 딸이 쓸쓸하게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조금이라도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모성애 같은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꽃과 와인을 준비해 초대 시간에 맞춰 그녀의 집을 찾았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차로 30여분 거리인 우스터 파크 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오데뜨의 집은 주택가에서 흔히 보이는 외관을 하고 있었지만 실내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집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중고책을 팔고 있는 서점 같았다. 집안을 고급스러운 가구와 장식품으로 꾸민 것보다 한결 격이 있어 보였다.
두 딸과 나는 오데뜨 가족과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오데뜨 가족은 남편과 시어머니뿐이었다. 두 자녀는 대학생인데 독립해 산다고 했다. 이스터 휴가 중 딸은 남미를, 아들은 동남아시아를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청소년 축구클럽 감독을 맡고 있다는 그녀의 남편은 전형적인 영국인으로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교양 있어 보이는 곱게 나이 든 시어머니는 웃음을 잃지 않는 인자함이 이었다.
우리는 오데뜨가 정성 들여 준비한 영국인들이 이스터데이에 즐겨 먹는 양고기 요리와 프랑스식 요리까지 곁들여 맘껏 즐겼다.
레스토랑의 음식 같지 않게 정성이 가득 입혀진 음식이었다.
두 딸과 나는 그들과 대화하고 웃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기러기 가족인 우리에게 시간은 고장 난 시계처럼 움직일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스럽게 더디기는 하지만 쉬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