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과 런던에서 체류하다가 3년 반 만에 귀국한 아내는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우리 소유의 아파트는 전세를 놓은 상태였고 임대기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오빠 둘과 언니가 살고 있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방 셋의 아파트에 자녀들이 두 명씩 딸려 있어 여유 있는 방을 소유한 집이 한 곳도 없었다.
아내는 나의 누님 집에 짐을 풀었다. 아파트가 아닌 개인 주택이었고, 장성한 자녀 셋이 모두 결혼하여 독립하였기 때문에 남아도는 방이 여럿 있었다. 누님과 매형은 적적하게 지내다가 아내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러나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닌 이상 각별히 신경 써 준다고 해도 아내가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결혼 후 줄곧 내 집에서 두 다리 쭉 펴고 살아온 아내에게 남의 집에 얹혀산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불편하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아내는 돈을 벌기 위해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교사 경력이 전부였던 아내에게 직업 선택의 폭은 제한적이었다. 무슨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일반 기업체에는 문을 두드릴 수도 없었다.
교사로 복직하는 것이 가장 수월한 일이었다. 교직생활을 20년 한 후에 명예퇴직을 했지만, 퇴직 명목으로 수령했던 돈을 상환하면 교사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학원에서 강사를 하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교직생활을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어느 과목이든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했다. 영어도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런던과 뉴욕에서 랭귀지 스쿨을 다녔고, 가장 높은 레벨까지 마친 터라 초. 중학교 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까지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었다. 그 밖에 아내가 할 수 있는 것은 1 : 1이나 그룹으로 과외를 하는 방법이 있었고, 학원을 직접 운영하는 것이 있었다.
수입을 고려했을 때 교사나 학원 강사는 우선적으로 제외시켜야 했다. 재정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남은 것은 과외지도나 직접 학원을 운영하는 방법이었다.
아내는 궁리 끝에 학원을 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주요 과목인 국어, 영어, 수학, 과학, 그리고 한창 관심이 많아진 한자를 가르치게 되면 많은 학생을 상대할 수 있고 수입면에서 그 어느 일보다 유리할 것 같았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서 줄어들기만 하는 통장 잔고의 결손을 막아야 했다.
아내는 영국에서 귀국한 후 충분한 휴식이나 시차적응이 안 된 상태로 학원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자금을 여유 있게 손에 쥐고 있다면 지리적으로 위치가 좋고, 반듯한 건물을 임대해서 규모가 큰 학원을 할 수 있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적은 돈으로 좀 더 나은 조건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 분주하게 발 품을 팔아야 했다.
신정이 지나면서 추위는 더욱 기승을 떨치고 있었다. 눈이 와서 쌓이고 언 빙판길은 한 발자국을 옮기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추위에 움츠러든 몸으로 며칠 동안을 이곳저곳 휘젓고 다녔다. 고생한 것에 보상이라도 받듯이 어느 정도 맘에 드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가 인접한 골목길 4층 건물로, 3층이 임대로 나와있었다. 음악학원을 하던 장소였으나 이미 폐업한 상태여서 인수인계 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는 계약과 함께 인테리어 업자들에게 작업을 의뢰하고, 시설물과 도구들을 사들여 배치하는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관할 교육청에서 학원허가를 받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은 아내 스스로 진행하거나 지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귀한 집 막내딸로 자랐고, 성장하여서는 교직생활을 하느라 세상물정 몰랐던 아내에게 이런 일들은 감당하기에 녹록지 않았다.
학원을 오픈했다. 장소를 임대한 지 한 달 남짓 걸린 2월 중순이었다. 아내는 매일 아침 일찍 학원에 나와 청소를 하고 정리정돈을 했다. 강의실이 네 개나 되고 사무실 겸 상담실로 사용하는 공간이 별도로 있어 시간이 만만찮게 소요되었다.
청소가 끝난 후에는 학생들을 지도할 교재연구를 했다. 국어, 수학, 과학, 한자는 전담강사를 채용했지만, 영어과목은 아내가 직접 가르쳤다.
강의할 내용을 훑어보고 정리하다 보면 저학년 학생들이 들이닥칠 시간이었다.
학원을 오픈하고 세 달 동안은 수입이 형편없었다. 강사들과 차량 운전기사 월급, 임대료, 소모비, 관리비를 지출하고 나면 아내의 몫으로 떨어지는 돈은 얄팍했다. 교사의 월급에도 모자라는 액수였다.
학원을 시작하고 4-5개월이 되면서 학생들이 꾸준히 늘어 외관상으로 알차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노출되는 문제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학원 차량 운전기사는 걸핏하면 보수를 올려줄 것을 요구했고, 학생들을 제대로 실어오거나 데려다주지 않아 학부모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사들은 수업시간을 성의 없이 대충 때우고, 예고도 없이 결근하거나, 심지어는 갑자기 그만두는 일까지 있어 아내의 속을 까맣게 태우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위에서 동동거리고 있는 것처럼 불안한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학생수가 늘어나고 비례로 수입이 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침부터 학원에 출근하여 쓸고 닦고 교재 준비를 하고, 밤까지 가르치는 것을 감안하면 빈약한 수준이었다.
아내는 학원을 계속해도 큰 비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야말로 많은 돈을 투자하여 기업형으로 운영하면 모를까 영세 학원에서는 수입을 크게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강사들과 운전기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무거운 짐이 되어 몸과 마음을 짓눌렀다. 사람을 관리한다는 것은 아내에게 넘을 수 없는 높은 산같았다.
학원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초등학교와 인접한 위치에 있었고, 등록한 학생들도 꽤 있었으며, 시설물도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생각보다 일찍 나타났다.
학원을 넘기면서 오픈하기 전에 들어간 경비에 약간의 권리금을 챙길 수 있었다.
아내는 학원을 하는 동안 영어를 가르치는데 최선을 다했다. 학생들이 쉽고 흥미를 가지고 배울 수 있도록 교재 연구를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그런 덕분에 학원을 하는 동안에 영어만 배우게 해 달라는 학부모의 건의가 끊이질 않았었다.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학부모들은 아내에게 자녀의 영어 공부를 1 : 1 개인지도 해달라고 부탁하거나, 5-6명씩 팀을 만들어 그룹지도를 요구하기도 했다.
아내는 누님집에서 나와 대단지 아파트에 큰 집을 전세로 얻어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국어나 수학을 가르쳐 달라는 부모도 있었지만, 전문성을 고려하여 과감하게 거절했다.
아파트는 방이 여러 개 있어 학생들이 일찍 와서 예습할 수 있는 공간과, 과외가 끝난 후 복습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었다.
아내는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에 막연히 영어를 배우러 유학을 가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것도, 나이가 들어 가족과 런던과 뉴욕에서 3년 반 이상을 산 것도, 그곳에서 랭귀지 스쿨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가장 높은 레벨까지 이수했던 것도, 시간만 나면 혼자서 영어 공부에 매달린 것도 앞날을 내다보고 준비해 온 것만 같았다.
과외는 초등학생들로부터 시작했으나, 중. 고등학교 학생으로 범위를 넓혀 나갔다. 한 명이라도 더 가르쳐야 돈을 더 모을 수 있다는 절박한 계산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수는 계속 증가했다. 배우는 학생들의 실력이 늘고, 학교 시험에서 성적이 향상되자 학부모들 간에 열심히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났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은 친구들을 데리고 오고, 학부모들은 다른 곳에서 공부하던 자녀들마저 아내에게 보냈다.
아내는 오전에는 교재준비를 하고 오후 1시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수업을 하기 시작하여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밤늦게 배우러 오는 고등학생들의 수업이 끝나면 새벽 1시가 지나 있었다.
방학은 교사들과 학생들에게는 휴식을 가질 수 있는 달콤한 시간이었지만, 아내에게는 더욱 바쁘고 힘들었다. 학생들의 수업 시간을 2배로 늘리고 특강과 개인지도를 확대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수업으로 꽉 채웠고, 일요일은 물론 국경일까지 수업을 감행했다.
한가한 시간을 가지게 되면 가족생각에 휘말리게 되고,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우울한 시간이 될 것이 두려워 차라리 몸을 혹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했다. 아파트 단지는 조경이 잘 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다양한 꽃들이 피어나고, 나무들은 변신을 하며 아름다움을 뽐냈지만 그런 것에 시선을 줄 여유가 없었다.
식사할 시간도 부족해서 잠시 학생들이 문제를 풀거나 암기하는 시간을 이용하여 주방에 서서 제대로 음식을 씹지도 못하고 삼켜야 했다. 음식을 조리할 시간이 없으니 반찬인들 오죽했을까? 그나마 가끔씩 누님이 음식을 이것저것 준비하여 냉장고에 채워주어서 다행이었다.
아내는 혼자 사는 동안 제대로 된 휴식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친구들과 만남도 없었고, 친인척들과 왕래도 없었다.
약한 여자의 몸으로 아내는 어떻게 이런 어려운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이런 초인간적인 힘으로 버텨낸 것은 것은 오직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 누구보다도 강했기 때문이었다.
아내의 이런 생활은 두 딸이 대학과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