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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Dec 20. 2023

아득히 먼 곳




찬바람 비껴 불어 이르는 곳에

마음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먹구름 흐트러져 휘도는 곳에

미련을 두고 온 것도 아니라오

아 ~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먼 곳이라

허전한 이내 맘에 눈물 적시네


황금빛 저녁노을 내리는 곳에

사랑이 머무는 것도 아니라오

호숫가 푸른 숲 속 아늑한 곳에

내님이 머무는 것도 아니라오

아~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리운 사람 있어 밤을 지새고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히 먼 곳이라

허전한 이내 맘에 눈물 적시네


1984년에 발표된 이승재의 아득히 먼 곳이라는 노래이다. 송골매의 구창모가 작곡한 노래로 본인이 직접 부르기도 했다. 

2018년에는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주인공인 이선균이 친목모임에서 가창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노래다. 


노래를 들으며 사람들은 말한다. 

이 노래는 바로 내 노래야.

이 노래는 내 마음을 들여다 보고 그대로 읊은 것 같네.

하! 이 노래 나를 위해 만든 것 맞네.

나도 마찬가지다. 아득히 먼 곳, 이 노래를 들으면 아내와 떨어져서 기러기 가족으로 살며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헤어져 살고 있는지가 8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메일로 소통은 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두 딸이 감기 몸살로 심하게 아프다든가, 내가 오식견으로 왼쪽 팔을 어깨 위로 올리지 못할 정도로 불편함과 통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아내에게 메일을 보낼 때는 이런 내용은 꼭꼭 숨겼다.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내에게 우리의 걱정까지 얹어 놓을 수는 없었다. 추측해 보면 아내 역시도 몸이 아프다든가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우리에게 그대로 소식을 보내지 않을 것 같았다.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보지 않고 서는 진위를 알 수 없었지만, 아내는 아득히 먼 곳에 있어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마음이 무겁고 편치 않았다. 마치 가족을 대표하여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총을 어깨에 메고는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때로는 폭풍한설에 움츠러든 몸으로 전장을 누비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때는 망망대해에서 조그만 배에 몸을 맡긴 채 밀려오는 파도를 넘고, 또 넘으며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계속 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아프게 했다.  


두 딸과 나는 긴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한 달 반이 흘러 8월 초가 되었지만, 두 딸은 9월 초에 개학을 하게 되고, 나는 10월 초에 대학원 석사코스를 시작하기 때문에 아직도 긴 시간이 남아있었다. 

두 딸과 내가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 당장이라도 아내가 있는 한국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아내가 있는 곳은 너무나 멀고 멀었다. 8800km나 되는 아득히 먼 곳이었다. 막상 가게 되면 비싼 항공료가  부담스러웠고, 바쁘게 생활하고 있는 아내가 일을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게 자명했다. 그리고 또다시 이별의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 감당하기 힘든 문제였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따져보면 가지 않는 것이 아내를 도와주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긴 방학 동안 좁은 집안에 갇혀 지내는 것은 답답한 일이었다. 좁은 공간에 있으면 잡념이 생기고 우울해 질게 뻔했다. 우린 넓은 장소에서 자연과 벗 삼아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런 경우 뭐니 뭐니 해도 공원이 제격이었다. 런던 중심가에는 세인트 제임스 파크, 하이드 파크, 리젠트 파크 등 규모가 크고 눈이 놀랄 만큼 잘 조성된 곳이 있었지만, 한 가지 문제점은 관광객을 비롯하여 런더너들이 줄을 이어 찾는 곳이라 복잡했다. 조용하고 쾌적하기로는 런던의 외곽지역에 있는 리치먼드 파크 만한 곳이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차를 운전해서 가면 20여분 소요되고, 무료로 제공하는 규모가 큰 주차장이 있었다.


리치먼드 파크는 왕실에서 관리하는 로열 파크인데, 자전거나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는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그곳에는 성인 여러 명이 손을 맞잡아야 닿을 수 있는 수백 년 된 고목들이 수없이 많았고, 생명을 다하고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형물 같은 고사목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너른 잔디밭이나 풀밭에서는 불쑥 사슴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옛날 왕실의 사슴 사냥터였는데, 지금도 700여 마리가 방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크의 중앙에는 보석같이 빛나는 호수가 둑을 사이에 두고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위쪽 것은 한 바퀴 돌려면 꽤 시간이 걸릴 만큼 넓었지만, 아래쪽은 아담했다.

오리와 백조들이 떼를 지어 유유히 수면 위를 유영하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 평화스러워 보였다.


두 딸과 나는 아름들이 나무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그늘진 잔디밭에 넓은 피크닉 패드를 펴고 누워서 솔솔바람에 속삭이는 나뭇잎들의 신비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소리, 풀벌레의 노래를 감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각자 준비해 온 책에 빠져들곤 했다.

음악감상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 중에 하나였다. 작은 딸은 뮤즈(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비틀즈 노래 중 느린 곡을 즐겨 들었고큰 딸은 퀸롤링 스톤즈핑크 플로이드 밴드의 노래를 즐겨 들었는데그 이외에도 밴드 구분 없이 하드록이라면 무조건 좋아했다

나는 시끄러운 노래보다는 잔잔한 노래를 좋아했다주로 로비 윌리엄스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그는 처음에는 5인조 밴드 테이크 댓에서 활약하다가 솔로로 전향하여 숱한 히트곡을 내놓았다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에서는 국민가수라는 칭호가 따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우리나라의 조용필 같은 존재라고 할까?

Angels, Feel, She’s the One, Come Undone, 등이 내가 즐겨 들은 그의 노래들이다.  


나무 그늘 아래서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도 하고, 음악을 감상하다 보면 점심때가 기울어 있었다. 나는 집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피크닉 패드 중앙에 펼쳐 놓았다. 구운 토스트에 잼을 바른 것, 삶은 감자와 계란을 으깨고, 물기를 제거한 통조림 스위트 콘과 작게 자른 당근을 볶아서 함께 섞은 후에 적당량의 마요네즈를 넣고 고루 저은 것을 식빵이나 모닝 빵에 두툼하게 넣은 간편한 샌드위치도 있었다. 토마토, 당근, 파프리카, 오이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온 것도 있고, 바나나 사과 딸기 포도 등 과일까지 있었다. 음식은 시각적으로 훌륭했고 먹는 즐거움도 쏠쏠했다.  


리치먼드 파크는 가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멋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유독 한 지역만은 예외였다. 바로 카페가 있는 곳이었다. 오래전 영국수상 존 러셀의 저택이었던 하얀 건물 펨브로크롯지 주위는 잘 가꾸어진 잔디밭, 희귀한 꽃들과 나무들이 서로 어우러진 화단이 여러 군데 있어 동화 속에 등장하는 집만큼이나 환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곳에서 추억 만들기를 원한다. 특히 결혼식은 더욱 그렇다. 주말에는 이곳에서 결혼식이 자주 거행되었다. 눈부신 하얀 드레스와 검은 턱시도의 신랑 신부뿐만 아니라 말쑥한 정장차림의 남자들과 드레스로 한껏 치장한 여성 하객들을 보는 것도 흥미로운 눈요기거리였다.


영국은 물론 유럽에서 최대의 공항인 히드로는 리치먼드 파크에서 그리 멀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잔디 위에 누워서 하늘을 보든가, 산책하며 머리를 들면 고도를 낮춘 비행기들이 히드로 공항을 향하여 날아가는 모습이 줄을 잇고 있었다. 비행기는 색깔과 항공사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파란색에 꼬리 부분에 태극마크가 선명한 우리나라의 국적기가 날아가는 것도 보였다. 그럴 때면 가슴이 콩닥거렸다. 저 안에 있는 승객들은 얼마 후에는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 혹은 친구들을 만나서 감격스러워할 장면을 상상하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리 가족은 그럴 수 없다는 현실에 우울해졌다. 아내는 우리가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내가 올 수도 없는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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