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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Jan 03. 2024

윔블던 하이스쿨과 작은 딸 이야기




2003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9월 초순이어서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지만여름의 모습은 조금도 흩트리지 않고 있었다. 나무 잎새들은 여전히 푸르렀고, 햇살의 열기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작은 딸은 Year 9, 한국의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이전과 달라진 점은 사립 여자학교인 윔블던 하이스쿨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다.

영국에는 무료로 운영하는 공립학교(State school) 93%의 학생들을 수용하고 있고학부모가 학비를 부담하는 사립학교(Independent,  Public School) 겨우 7%의 학생들만 공부하고 있다. 

한국인인 경우 부모가 영주권 자던가학생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거나영국 주재원의 경우에는 자녀가 공립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나는 그동안 계속 학생 신분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두 딸이 공립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그러나 내년 7월이 되면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고 학생 비자가 만료되기 때문에두 딸은 공립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큰딸은 내년에 A레벨 과정을 졸업하고 대학에 잔학하면 학생비자를 받기 때문에 별 문제없었지만계속해서 하이스쿨을 다녀야 하는 작은 딸은 사립학교로 옮겨야 했다물론 내가 대학원을 공부하는 동안 한 학년을 공립학교에서 더 공부할 수 있었지만서둘러서 사립학교로 옮긴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국은 사립학교가 극히 적기 때문에 입학을 원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다재학생 중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거나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공립학교로 전학을 해서 결원이 생기면 선발 시험을 치러 성적 우수 학생으로 공석을 메웠다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사립학교에 결원이 생기면 서둘러서 신청을 해야 했다

다행히 윔블던 하이스쿨 Year 9 2명의 결원이 생겨 선발시험을 치르게 되었다무려 15명의 학생이 시험에 응시했는데그중에는 사립학교 재학생도 3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학교 인근으로 이사를 온 학생들일 것이었다

7 : 1이 넘는 높은 경쟁률이 신경이 쓰였다과연 15명 중위서 두 번째 안에 성적이 들을 수가 있을까심란스러웠다.

작은 딸이 몇 시간에 걸쳐 선발시험을 치르고 난 후에는 걱정에 좌불안석했다.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기대를 버리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그러나 다행스럽게 1주일 후에 합격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영국의 사립학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집에서 통학하는 데이 스쿨(Day School)모든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보딩 스쿨(Boarding School)이 그것이다

윔블던 하이스쿨은 데이 걸 스쿨로 집에서 통학을 하는 학교였다.

윔블던 스테이션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고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에서 버스를 타면 10여분 거리에 있어서 대중교통 이용에도 편리했다

 

갑자기 학교 환경이 바뀌어진 작은 딸이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는데 기우였다공립학교 다닐 때보다 한결 표정이 밝아졌고학교와 선생님들그리고 반 친구들을 만족해했다. 

윔블던은 환경이 좋은 지역이기 때문에 가정이 부유한 학생들이 많았다부모들이 의사변호사교수사업가나 특수한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이가 허다했다

나는 작은 딸이 등교할 때 가끔 차에 태워 데리고 갔는데 그때마다 입이 쩍 벌어지곤 했다학교 입구에 즐비하게 늘어선 차량들을 보면 명품 차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이태리나 독일에서 생산되는 거리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명차들도 흔히 눈에 띄었다.  

작은 딸은 그런 부모를 둔 친구들 사이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언제나 당당했다.


두 딸과 나는 날씨가 좋은 날은 산책을 즐기곤 했는데 가장 빈번히 택하는 장소가 윔블던 힐이었다. 끝없이 평지로 이어지는 런던에서 야트막하기는 해도 보기 드문 것이 언덕이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역이 윔블던 빌리지인데 런던에서 이름난 부촌이었다. 도로를 따라 유명한 베이커리 하우스안티크 가게꽃집식료품점, 아담한 동네 서점, 갤러리, 등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대부분 2 – 300년 이상 된 빈티지 건물들이었다. 

이곳에는 유난히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많았다연인친구가족이 함께 노천 테이블에 앉아 담소를 하며 음료수나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을 배경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모습은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의 한 장면 같아 보였다.

 

윔블던 빌리지 주변에는 부촌답게 고급스러운 주택들이 즐비했다영국 전통양식을 담은 성처럼 큰 집들은 잘 가꾸어진 정원수와 꽃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몇 개의 가구들이 붙어있는 어태치드 하우스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된 디태치드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차고에는 집에 걸맞은 고급 승용차가 몇 대씩 주차되어 있었다

“아빠 여기서 제일 맘에 드는 집이 어느 거야?

멋스러운 집에 시선이 빼앗겨 있는 나에게 작은 딸이 물었다.

“글쎄 한 집 한 집 너무 멋져서 고를 수가 없네.

“그래도 한 집만 골라봐”

 음.... 그렇다면 저기 저 집. 

나는 많은 집 중에서 눈에 확 띄는 대저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알았어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저 집 사 주께.

“정말?

“그럼기다려”

실현 가능성은 0.00% 허황된 대화였지만나는 미래에 그 집을 시기 위해 예약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헤벌쭉했다.

 

영국의 학교는 11월이 되면 학부모 이브닝 데이(Parents Evening Day)가 있다파티처럼 낭만스러운 타이틀의 이 행사는 학부모들이 담임과 각 교과 담당 선생님들을 만나 자녀의 학교생활 태도와 교우 문제, 학업태도와 성적에 관해서 폭넓게 개별 면담을 하는 시간이었다. 

행사는 학생들이 하교한 4시에 시작하여 늦어도 7시 전에는 끝이 났다

학생수가 20명인 학급단위로 행사가 진행되는 데다가면담시간은 학부모들이 원하는 시간을 예약했기 때문에 전혀 복잡하지가 않았다

교과목당 10분 정도로 면담시간이 주어지지만 주로 담당교사가 학생에 관해서 설명해 주기 때문에 특별한 질문이 없는 한 듣기만 하면 됐다

내 차례가 되어 작은딸과 함께 담임과의 만남을 시작으로열 분 이상의 학과목 선생님들과 면담을 가졌다

입을 열면 칭찬을 달고 사는 것이 영국 선생님들의 특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침이 마르도록 작은 딸을 칭찬해 주는 것이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정작 기쁨으로 들뜨게 한 것은 각 과목 선생님들이 작은 딸의 과제점수실험 점수시험점수 등을 자세히 평가한 자료를 보여줄 때였다. 특히 종합 평가 란에 Excellent라는 글자를 발견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쳐졌다.

한 시간 반 이상에 걸친 상담이었지만 학교를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작은 딸이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 있었다미술에 특기가 있어서 담당선생님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는데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래픽 디자인 공모에 학교 대표로 작품을 출품하게 되었고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컴퓨터를 이용한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작은 딸은 한 번도 그런 것을 배운 적이 없었다

유치원 다닐 때부터 컴퓨터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고초등학생 때도 마찬가지였으며하이스쿨( 과정)에 다니면서도 컴퓨터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는 시간이 있더니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장과 함께 부상으로 엡손(Epson)에서 학교나 관공서회사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성능이 좋은 고가의 대형 컬러복사기를 다섯 대가 주어졌다. 4대는 학교에 기증되었고한 대는 작은딸의 몫이었다.

작은 딸은 자신의 몫으로 받은 복사기를 집에 놓고 사용하겠다고 했다그러나 혼자서 그런 대용량의 복사기를 사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사치일 것 같았다집에 있는 소형 프린터기도 활용하지 않아서 잠만 자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복사기를 팔아서 작은 딸이 원하는 다른 물건을 사줄까? 아니면 손에 돈을 쥐어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은 좋은 대안은 아닌 듯싶었다궁리 끝에 내린 결론은 딸애의 몫까지도 학교에 기증해서 학생들과 선생님들 모두 함께 쓰게 하는 것이었다.

학교에 가서 교장에게 내 의사를 밝혔을 때그녀는 의외라는 듯 놀라운 표정과 함께 고마움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당신의 관대함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다.

작은 딸의 수상 작품은 이미 복제되어 액자에 끼워 휴게실과 복도에 걸려있었다

재단에 소속된 학교가 여러 곳에 있는데 그 모든 학교에도 걸었다고 했다.

 

나의 입에선 연신 웃음이 흘러나왔고, 어깨엔 자꾸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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