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은 A레벨을 마쳤다. A 레벨은 Sixth Form 이라고도 하며 2년 동안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과학, 예술, 인문학 등에서 세분화된 많은 과목 중, 최소 3에서 5 개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매년 5 - 6월 교과별로 시험을 치르고 결과는 8월 중순에 발표한다.
이 시험이 특이한 점은 개인사정으로 불참했거나 성적이 나쁜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1월과 10 - 11월 2회에 걸쳐 추가로 시험이 시행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5 – 6월에 치르는 시험 한 번으로 끝낸다.
대학교 입학 신청은 A레벨 1년 차(Year 12) 성적만으로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대학 입시 지원 시스템인 UCAS(Universities & Colleges Admissions Service)에 가입해야 한다. 희망학교는 5곳까지 지원할 수 있고, 이때 자기소개서와 교사 추천서 등의 서류를 첨부하고 수수료를 납부한다.
지원 마감일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비롯하여 명문대학, 그리고 대부분의 의과대, 치대, 수의대 등은 입학 전해인 10월 중순까지 원서를 접수시켜야 하지만, 그 이외 대다수 대학은 입학 연도 1월 15일까지 완료하면 된다.
A level 시험성적은 절대평가로 A플러스는(140점), A(120점), B(100점), C(80점), D(60점), E(40점) (으)로 분류된다.
명문대학이나 인기학과의 경우에는 AAA, 성적을 요구한다. AAA를 점수로 변환하면 360점이 되고, ABC는 300점이 되는 것이다.
큰 딸이 공부하는 과목은 화학, 생물, 히스토리, 심리학이었는데 A레벨 1년 차 시험 점수는 히스토리와 심리학은 A이고 나머지 과목은 B였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는 지원할 수 없는 점수였고, 런던에 위치한 임페리얼 대학이나 UCL(University College London)도 합격 가능성은 희박했다. 성적에 맞는 학교 중 과학분야를 전공할 수 있는 대학교는 런던 킹스 칼리지, 바스, 맨체스터, 리즈, 버밍엄 등이 있었다.
학교를 지원하기 전에 해당 학교 안내 책자를 살펴보았지만 백문이 불여 일견이라고 작년 여름 방학 때 A레벨 1년 차 성적이 발표된 후, 두 딸과 함께 대학들을 견학했었다.
런던에 있는 킹스 칼리지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제외시킨 4개의 대학들이었다.
런던에서 맨체스터까지는 기차로 2시간 거리이고, 맨체스터에서 리즈까지는 한 시간 거리이기 때문에 당일로 두 학교를 방문했다.
맨체스터 대학교는 영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대학으로 세계 30위권 안에 들었고, 리즈 대학교는 세계순위 50위 안에 드는 영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학교로, 안전하고 물가가 비교적 낮은 조용한 도시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스와 버밍엄은 기차로 한 시간 거리이지만 런던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 서로 반대 방향이어서 각각 하루 씩 다녀왔다.
바스 대학교가 있는 곳은 로마 유적인 온천으로 유명한 곳으로 안전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고, 버밍엄은 자동차공업과 기계 공업이 발달한 도시에 자리 잡은 학교였다.
큰 딸은 대학 입시 지원 시스템인 UCAS에 다섯 개의 대학과 학과를 신청했다.
다음단계는 A-level 2년 차(Year13) 시험을 치른 후 그 성적이 UCAS로부터 지원학교에 보내졌고 조건이 충족된 학교에서 8월 말에 UCAS를 통해서 최종 합격을 통보해 주었다.
신청한 다섯 학교 중 세 학교에 최종 합격되었다. 아쉽게도 가장 합격을 원했던 런던에 위치한 킹스 칼리지는 제외되어 있었다.
나는 두 딸과 상의하고 아내와는 이메일을 통하여 의견을 주고받은 후 최종 한 학교를 결정했다. 런던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세계 대학 순위에서 50위 권의 학교였다.
9월 중에 등록을 해야 하고, 10월 초에 입학과 함께 학기가 시작된다.
작은 딸은 Year 9를 마치고 9월 초에 Year 10(중학교 3학년)이 된다.
작은 딸이 다니는 학교는 기숙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립학교 이기 때문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숙식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또한 부모가 현지에 없는 유학생들에게는 부모 역할을 대신하는 보호자, 후견인 즉 가디언(Guardian)을 의무적으로 두어야 했기 때문에 적임자를 물색해야 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교민 중에 30대 중반의 자녀가 딸리지 않은 부부가 있었다. 남자는 한인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여자는 플로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실하고 상냥했다. 뿐만 아니라 방이 셋 딸린 단독 주택에 살고 있어 작은 딸의 숙식과 가디언을 부탁할 셈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은 성심성의껏 돌봐 줄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작은 딸도 그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의사를 타진했을 때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개학이 점점 다가오면서 작은 딸은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이나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작은 딸은 중학교 2학년을 마쳤지만 아직은 어린 나이였다. 부모와 떨어져 외국에 혼자 산다는 것은 건널 수 없는 강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했을 것이다.
작은 딸의 마음을 충분히 읽으면서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3학년 1학기를 마치기 전에 외국에 나와서 6년 이상이 흘렀기 때문에 한국으로 되돌아가면 다시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었다. 더욱이나 교내 학생 폭력의 문제, 사교육에 의한 감당하기 힘든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점도 우려되었다.
그러나 작은 딸의 결심은 확고해서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아내는 처음에는 영국에 남아있기를 종용했으나 어린 딸을 혼자 외국에 남겨두는 것이 불안한 생각이 들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였다.
작은 딸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큰 딸은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이젠 나도 외국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그동안 정들었던 장소들을 돌아보며 나의 소중했던 시간들을 마음에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윔블던 칼리지 어브 아트에서 가까운 도로 코너에 A 갤러리가 있었다.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곳인데 규모가 꽤 컸다. 집의 골조를 살렸기 때문에 크고 작은 전시 공간이 여럿 있었다. 그곳에서는 영국에서 잘 알려진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고, 젊은 작가들, 특히 우리 학교 대학원 생들의 작품도 전시에 참여시켰다. 나도 그중 한 명에 포함되었다. 큐레이터는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였는데 나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자주 작품을 전시할 기회를 주었고, 작품을 디스플레이할 때는 좋은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어느 때는 조그만 공간을 통 채로 내 그림만 걸기도 했다. 마치 규모가 협소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픈하는 날은 화가들을 소개해 주었고, 고객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도 참석하게 해 주었다. 심심치 않게 작품이 팔려 내 손에 수표나 현금을 쥐어 주기도 했다. 페인팅이 아니라 판화 작품이었고 사이즈가 크지 않아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A갤러리에서 도로를 건너 좁은 골목길을 접어들면 이태리에서 온 50대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빵집이 있었다. 실내는 협소했고, 빵의 종류는 몇 가지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모양을 내지 않아 투박해 보였다. 그러나 빵 맛은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 특출 났다. 영국에서 먹어본 것 중에 으뜸이었다.
빵을 만들고 굽는 것은 남자 몫이었고, 여자는 홀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팔며 계산하는 역할을 했다.
빵을 사러 가면 가끔은 주인 남자가 홀을 서성이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빵을 사고 계산하면 먹어보라며 다른 종류의 빵을 봉지에 덤으로 넣어 주었다. 어느 땐 돈을 지불하고 산만큼의 양을 덤으로 주기도 했다. 유통기간이 지난 것도 아니고 풍부하게 준비해 놓은 빵도 아니어서,
몇 시간 내에 다 팔릴 것을 덤으로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윔블던 라이브러리 2층에 갤러리가 있었다. 규모가 꽤 컸다. 그곳에서 페인팅과 판화작품 35점을 전시한 것도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었다. 갤러리 담당자는 내 포트폴리오와 한국에서 전시했던 카탈로그를 보여주자 순순히 전시를 허락해 주었다. 전시를 하는 동안 1층 도서관에 들렸던 사람들이 찾아오고, 건물 앞에 전시를 알리는 걸개그림과 입간판을 보고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2주간 전시하는 동안 매일 성황을 이루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성원으로 따뜻했고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두 딸들과 함께했던 장소들도 꼼꼼히 둘러보았다.
무수한 발자국이 새겨진 두 딸이 다녔던 학교들, 윔블던 역 앞에 워터스톤즈 서점, 백화점을 품고 있는 거대한 쇼핑몰, 하이 스트리트에 오데온 극장, 보더스 서점, 영국의 전통음식 피시 앤 칩스 레스토랑, 이태리 피자 집, 포르투갈 닭 요리 전문점……..
계절에 따라 피어나는 꽃들로 화사하게 치장을 하고 나무 그늘에 빈 벤치들을 비워 놓고 나와 두 딸을 반겨주던 집 앞의 홀란드 가든, 커피 향이 짙고, 잉글리시 블렉퍼스트가 일품인 동네카페, 윔블던 힐, 그리고 윔블던 빌리지......
두 딸과 함께했던 장소는 어디든 마르지 않는 깊은 샘처럼 추억과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마음속에 하나하나 그것들을 소중하게 담았다.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잊히지 않고 그대로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