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한 조건이나 환경 따위에 맞추어 응하거나 알맞게 되는 것을 적응이라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은 유순한 동물이어서 모든 것에 적응하는 존재라고 했고, 톨스토이는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환경이란 없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살다 6년을 훨씬 넘겨 돌아온 나와 나보다 몇 달 일찍 돌아온 작은 딸은 한국생활에 적응이 필요했다. 정신 못 차리게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변하는 한국에서 6년 이상의 공백은 외형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내부적인 시스템도 많이 변해 그것들을 하나하나 적응해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8월 말에 한국에 돌아온 작은 딸은 변변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집에서 보도로 10분 거리에 있는 남녀공학 중학교에서 2학년 2학기 공부를 시작했다. 영국에서 Year 9, 즉 중학교 2학년을 마쳤기 때문에 3학년 공부를 해야 했지만, 영국은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국은 3월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2학년 2학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영국에 처음 갔을 때 초등학교 3학년 1학기가 채 끝나기 전이었는데 3학년을 건너뛰어 4학년부터 시작했었으니 한국에서 한 학기를 늦추는 것은 나이에 맞게 제 학년을 찾아가는 셈이었다.
작은 딸은 유치원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고, 외국에서 보낸 초등학교와 하이스쿨(중. 고 포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러한 외향적인 성격은 쉽게 친구들을 만들 수 있었다.
작은 딸에게 문제는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각 학과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6년 이상의 긴 공백이 있는 한국에서 혼자 힘으로 적응하고 극복하기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학원이나 과외지도, 즉 사교육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작은 딸에게 권유했지만, 일단 혼자 힘으로 해보고 감당하기 어려우면 도움을 받겠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염려하며 우려하는 시선으로 지켜봤는데, 의외로 차근차근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영어는 제외시키더라도, 과학이나 수학은 외국이나 한국에서 배우는 내용이 유사해서 문제 될 것이 없었고 국어, 도덕, 역사, 과목도 깜냥껏 곧잘 따라 했다. 다만 외국에서 영어로 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어의 어휘력이 부족했다. 모르는 낱말들이 교과서마다 곳곳에 숨어있었다. 작은 딸은 그런 낱말들을 발견할 때마다 사전을 펼쳤다. 한국어 사전이 아니라 한영사전이었다. 영어로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를 했다. 교과서에는 영어로 뜻을 적어 놓은 포스트잇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작은 딸은 중 3이 되자 학급 반장을 맡게 되었다. 학기 초에 반장 선거가 있었는데 자원한 학생이 1명뿐이 없었다. 담임은 후보자를 4명을 추천을 받았고, 그중에 작은딸이 포함되었다. 투표결과는 5명의 학생들 중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었다.
친구를 좋아하고 활달한 성격이 가져온 결과인 듯했다.
담임은 교직생활을 시작한 지 3년째 접어든 여교사로 국어과목을 가르쳤다.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로 학생들과 친구처럼 격의 없이 대하고 거리를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
작은 딸은 그런 선생님을 좋아했고 따랐다. 반 학생들 과도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노력했다. 거칠고 반항기 있는 남학생들에게도 먼저 파고들었다.
반 학생들은 작은 딸의 말에 잘 따르고 협조해 주어 반장 활동하는 것을 만족해했다.
아내는 그런 작은 딸을 대견해하며 신바람이 나서 반장 엄마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교내 체육대회 날이나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는 날은 학급 학생 전체가 먹을 수 있는 피자와 치킨, 음료를 배달시켰고, 소풍날은 담임선생님의 점심을 정성껏 준비해서 보냈다. 담임은 그때마다 장문의 손 편지를 써서 감사한 마음을 아내에게 전해왔다.
중학교를 졸업한 작은 딸은 집에서 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가야 하는 곳에 위치한 여고에 배정받았다.
아내와 나는 특목고인 외고나 과학고를 고려해 보라고 했지만, 본인이 인문계 고등학교를 고집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평준화되어서 다 엇비슷했지만, 학교 주위의 주거환경, 교풍, 교사들의 열성도에 따라 학교 간에 미미한 차이점은 존재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작은 딸이 다니는 학교는 비교적 평이 좋았다. 작은 딸은 그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을 만족해했는데, 학교의 평보다도 중학교 같은 반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여러 명 배정되어서였다.
작은 딸의 담임은 50대 중반의 남성으로서 권위적이었다. 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위에서 군림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영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오랜 교직 경력임에도 불구하고 발음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고, 해석 또한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담임은 수업을 진행하며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읽게 하고 해석도 시켰으며 문법적인 것을 질문하기도 했으나 작은 딸은 완전히 배제시켰다.
학생들이 작은 딸을 지목하며 교과서 내용을 읽게 해달라고 건의했지만 그때마다 묵살해 버렸다. 아마도 자신보다 학생이 잘하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영어담당 선생님은 40대의 여교사였는데 교과서 본문은 꼭 작은 딸이 읽게 했다. 학생들에게도 자신은 흉내 낼 수 없는 원어민 발음이니 잘 듣고 배우라고 까지 했다. 교사로서 자신의 위엄을 낮추는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런 방법은 쉽지 않았으리라. 그러고 보면 학생을 대하는 교사들의 태도가 극과 극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채 두 달이 안되었을 때 작은 딸은 담임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학생들을 심하게 편애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담임의 그런 행동은 분명 학부모들의 촌지에 따른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9년 전교조(전국 교직원 노동조합)가 합법화된 후, 학교에서는 학부모로부터 촌지를 받지 말자는 운동을 전개하며 실천하는 교사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러나 2016년 김영란 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촌지가 암암리에 성행했고, 심지어는 같은 학교 근무하는 교사 간에도 건넬 정도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듯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모른 척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차일피일하며 기회를 보고 있는데 담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상담을 할 일이 있으니 학교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기다려도 찾아가지 않으니 드디어 호출을 한 것 같았다.
담임을 만났다. 그는 작은 딸이 외국에서 오래 생활했기 때문에 학교생활을 잘 적응하는지 궁금해할 것 같아 설명을 하기 위해 불렀다고 했다. 그리고는 작은 딸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대화를 나눈 후 촌지를 건넸는데 당연한 것인 양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그 후로 담임은 두 달이 멀다 하고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고 나는 그때마다 학교 밖에서 만나 식사를 대접하고 촌지를 건네야 했다. (작은 딸 중학교 담임 선생님은 절대로 촌지를 받지 않았다.)
영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큰딸은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한국에 왔다. 3개월이나 되는 긴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겨울 휴가는 길어야 2주였고, 이스터 홀리데이는 학교 재량에 따라서 4주까지 하는 곳도 있지만, 보통 2주여서 한국에 오는 것을 포기했다. 오고 가는데 각기 하루 씩 걸리고 시차 적응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더욱이나 가족을 두고 혼자 영국으로 돌아가는 아픔을 경험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초. 중. 고 학생들을 상대로 영어 과외지도를 하고 있었지만, 여름방학 동안은 수업시간을 최대한 줄였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생활할 때는 방학이면 특강과 보충수업을 늘려 오전부터 늦은 밤까지 가르쳤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방학 동안 우리 가족은 종종 브런치 카페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기도 했고, 오후 수업을 일찍 끝내고 저녁산책을 했으며, 더운 여름밤을 시원한 카페에서 오순도순 이야기 꽃을 피우느라 자정을 넘기기도 했다. 일주일을 휴가 내어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고, 강원도의 유명한 산과 바닷가에서 자연을 맘껏 즐기기도 했다.
작은 딸은 우려했던 학교 폭력문제나 사교육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교우관계도 원만했고, 학업성취도도 높았다. 반에서 1 – 2 등을 다투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위권이었고 학년 석차도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어휘력이 부족하여 의미 파악이 힘들었던 우리말을 이제는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생활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었다. 외국에서 토론 방법의 수업에 길들여졌기 때문에 교사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은 학습효과가 크지 않은 것을 깨달았고, 서술형 시험에 길들여져 있는데 4지 선다형 시험은 깊이 있는 학습을 저해하는 요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작은 딸은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자신에게는 미국이나 영국의 교육방법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한국 학교에서 얻는 이점보다는 외국에서 공부하며 얻는 것이 한결 크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가겠지 했는데 1학년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작은 딸의 말을 들으니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것이 기특하면서 한편 혼자 떨어져서 생활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면 걱정으로 심란스러웠다. 작은 딸은 아내와 나에게 이제 충분히 홀로서기할 수 있도록 성장했으며 모든 일을 잘할 수 있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작은 딸은 인터넷에서 학교 정보를 찾아 비교해 보며 이메일을 주고받았고 학교에서 필요한 서류를 우편으로 보내는 절차를 통해 공부할 학교에서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기숙 시설이 없는 사립학교라서 영리 재단에서 운영하는 기숙사까지 신청하여 예약을 마쳤다. 이 모든 일들을 스스로 해결했다.
이제 런던으로 떠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