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아파트가 널리 보급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옥에 살았다. 우리 집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옥에는 법으로 정해 놓기라도 한 듯이 어느 집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대청이나 마루, 안방의 벽에 걸려있는 흑백 사진이 들어있는 사진틀이었다. 그 안에는 가족들의 사진이 촘촘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가족 구성원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사진틀은 여러 개가 걸린 집도 있고, 단출하게 한 두 개 걸려있는 집도 있었다.
대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가정에서는 조부모부터 시작하여 부모, 그리고 자녀들의 사진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사진을 훑어보면 가족이 함께 찍은 것, 부모님의 결혼사진이나 젊었을 때 한껏 멋을 부린 모습, 자녀들의 코흘리개 어린 시절 모습과 초 중 고 학생 때의 모습, 대학 졸업 사진,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 자녀들의 약혼과 결혼사진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처음 방문하는 집이라 하더라도 사진틀 안에 있는 사진을 눈여겨보면 가족 구성원이나 그 집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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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까지 내가 살았던 시골집 대청에도 예외 없이 사진틀이 몇 개 걸려 있었다. 가족들이 특별한 날을 기념하면서 찍은 것, 여행길 멋진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것, 형제자매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찍은 것들이 사진틀에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모두 흑백 사진이었지만, 그중에 오래된 것들은 갈색으로 바래 있었다.
엄마는 유독 내 사진들을 틀에 많이 끼워 넣으셨다. 백일과 돌 사진, 꼬마신사처럼 양복을 입고 있는 모습, 엄마와 손잡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 형제자매들과 함께 찍은 사진 등.
초등학교 입학기념으로 하얀 칼라가 달린 검정 교복에 학생모자를 쓰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은 크게 확대하여 별도의 사진틀에 넣어져 걸려 있었다.
여러 장의 내 사진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백일 사진이었다. 그것을 바라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졌고,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특히 손님들이 와서 사진을 훑어볼 때면 창피함이 극에 달했고 슬쩍 그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3학년이 되면서 문득 창피한 것을 느꼈고, 그 후로는 보면 볼수록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사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젖 살이 올라 두 볼은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 것처럼 탱글탱글 했고, 머리숱은 적어 대머리 같은 데다 뱃살에는 두 개의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뭐가 그리 좋은 지 이가 없는 입을 활짝 벌리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것 까지는 그래도 봐줄 만했다. 요는 보이지 말아야 할 아랫부분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남아선호 사상이 강하던 시절이라 아들 낳은 것이 자랑스러워 이런 사진을 찍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 집은 3남 2녀의 형제자매가 있었기 때문에 아들이 귀한 집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막내여서 위로 형이 둘 있었지만 이런 황당한 사진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엄마는 왜 나에게만 이리 흉측한(?) 모습을 연출하여 사진을 찍게 하셨던 것일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몇 차례나 매달려 사진을 빼내라고 졸랐는데도 그때마다,
“무슨 말이야. 이렇게 이쁜 사진을 왜?!. 엄마는 이 사진이 여기서 제일 귀여운데.....” 하시며 내 청을 한 귀로 흘리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눈에 거슬리는 백일 사진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반드시 내 손으로 제거를 해야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안이 텅 비어 있었다. 드디어 사진을 빼내어 찢어버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싶어 엄마가 재봉틀 돌리실 때에 앉는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두 손으로 사진틀을 받쳐 들고 벽에서 분리시켜 의자에서 내려오려는 순간 한쪽손에 무게감이 쏠리면서 균형을 잃고 그만 사진틀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사진틀은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고 파편이 주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멈칫거리고 있는데 불쑥 엄마가 나타나셨다. 밖에서 볼일을 보시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자 서둘러 집에 돌아오신 것 같았다.
“아니 이게 웬 난리야?! 사진틀은 왜 깨뜨렸어?!”
“….…”
“사진틀을 왜 건드렸어?”
“내가 사진 빼라고 했는데 안 빼니까 그렇지.” 내가 뾰로통하게 성을 냈다.
엄마는 나에게 발바닥에 유리 조각이 박히면 큰일 나니까 꼼짝 말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오셔서 말끔히 제거하셨다.
나는 엄마가 손에 쥐고 있는 문제의 사진을 빼앗아 찢어버리려고 했지만 엄마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셨다.
다행히 유리를 다시 끼운 사진틀에는 내 백일사진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만 해도 큰 수확이라고 안도할 수 있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다른 모습으로 변했고 변해간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아파트들이 주거지역을 잠식해 밀림처럼 빈틈없이 들어찼다. 서양식의 주택들이 늘어나면서 한옥들은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지자체에서 보호하는 한옥마을을 찾아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주거 형태뿐만 아니라 사진에도 많은 변화가 일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칼라사진이 일반화되면서 흑백사진은 물에 가라앉는 돌덩어리처럼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은 추억을 저장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사진틀에 끼워 집안에 걸어 놓는 것은 좀처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저장해서 보고 싶을 때 화면에 비치는 사진을 훑어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화질 좋은 사진들이 무한정 저장되어 있지만 훑어볼 때면 감흥이 별로 일지 않는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채워진 사진에 대한 그리움만 커진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나는 오래전 시골집 대청에 걸려있었던 그 문제의 백일사진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한가한 시간이면 들춰 보시던 앨범이 여러 권 있었는데, 그중 하나 제일 첫 장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꺼내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세월의 흐름을 일깨워주려는 듯이 색이 많이 바래 있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나라는 단서를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집어낼 수 없는 아기는 여전히 방실방실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렸을 때 그토록 찢어버리고 싶어 안달했던 사진이었지만 나는 그대로 제 자리에 꽂아 놓았다.
어머니의 영혼이 하늘나라에서 내려와 앨범을 들춰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극히 유아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