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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Oct 17. 2022

꽃 피는 저 나무처럼



나무는 꽃을 피운다. 화사하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사람들도 나무처럼 꽃을 피운다.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것을 성취하고 명예와 부를 얻는 건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리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꽃을 피우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예술가들, 그중에서도 미술 분야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은  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돋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 같다.

내가 그림을 하는 사람이라 주위에 화가들을 적잖이 알고 있는데  한결같이 지지리 궁상이다. 그나마 교직에 몸담고 있거나 강의로 수입을 얻는 화가들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지만 그건 빙산의 일각이다.

직장을 잡지 못해 본의 아니게 전업작가가 된 이들은 그림을 팔아야 생활비와 재료값을 충당하게 되는데, 그건 작두 위를 맨발로 걷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예부터 예술가들은 춥고 배고프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말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K라는 화가를 알고 있다.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서 혹은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서이다.

십수 년 전, 제법 반듯한 규모의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고 있는 K 작가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작품은 대부분 대작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는데 사실적인 표현이 아니라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변형시켜 창조한 형상들로 매우 호감이 가는 작품들이었다. 한 눈에도 그의 열정과 내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날, 우연히 그 미술관의 큐레이터와 한 상업 갤러리 관장과 함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는데 자연스레  K 작가가 화제에 올랐다.

그는 60을 눈앞에 둔 나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긴 세월을 오직 캔버스와 물감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인양 한눈팔지 않고 살아왔단다.

가진 것이라고는 코딱지만 한 작업실과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완성해 놓은 그림이 전부인 가난한 화가라고 했다.

그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작업실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다고 했다.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라도 한 잔  기울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그에게는 그만한 여유도 없단다.
친구나 지인이 개인전 소식을 전해와도 초라한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 두려워 선뜻 집을 나서질 못한단다.
시간이 흐름은 완성된 작품을 쌓이게 만들고 협소한 작업실에 보관이 감당키 어려워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불에 태워 없애버리는 일도 감행했다 한다.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혀를 쯧쯧 차거나 머리를 좌우로 크게 저었지만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주위에 힘들게 살아가는 화가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그를 까마득히 잊고 지내왔는데, 몇 달 전 한 관공서 현관 로비에 걸려있는 그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대작이었다. 십수 년 전 그의 전시에서 보았을 때의 작품보다 추상성이 가미되고 색조는 갈색 조로 단조로워졌지만 깊이감이 더해져 있었다. 그가 한 눈 팔지 않고 얼마나 열심히 작품을 해 왔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 후로 간혹 신문이나 미술 잡지에 그의 작품전에 대한 기사를 읽을 수가 있었다. 미술계에서 어느 정도 주목받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봐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어느 정도 벗어던졌을 것 같았다.


그의 근황을 알게 된 것은 지방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 한 고등학교 동창을 통해서였다.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의 K 화가가 찾아와 임대 주택에서 살고 있는데, 오랫동안 세를 내지 못하여 쫓겨날 상황에 처해 있고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며 그림 몇 점만 팔아달라고 매달리더란다.

눈물과 한숨으로 하소연하는 그가 딱했지만 워낙 장기간 계속된 화랑계의 불황으로 갤러리 운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선뜻 그림을 살 수가 없었는데,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힘없이 갤러리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지더란다.


내 생각과 다르게 그는 여전히 가난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60대 중반이 되도록 외롭게 외줄에 매달려 자신과 싸워온 그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것 같았다.

꽃 피는 저 나무처럼 그도 어서 꽃을 피워내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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