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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준 Oct 18. 2022

깊은 샘

                                                                                

어렸을 적 내가 살았던 시골집 앞에 깊은 샘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깊어서 동굴처럼 어둠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동안만 크지 않은 둥근 모양의 푸른 하늘을 저만치 담고 있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샘에서 길어 올린 물은 수정처럼 맑았고 시원했다. 삼복더위에 땀이 범벅이 될 때도 물 몇 모금만 들이키면 소름이 돋았고, 진저리 쳐졌다. 여름 장마철 억수 같은 비에 개울이 범람하여 논과 밭이 물바다가 될 때도 깊은 샘물은 그 깨끗함과 시원함을 잃지 않았다. 어쩌다 가뭄이 심해 논과 밭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저수지나 강에 물이 말라도 샘물은 항상 같은 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여름에 친구들과 바다나 저수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역 감다가 갈증으로 달려와 마시던 샘물의 맛은 달콤했고, 온몸이 날것처럼 개운했다.  


그 샘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면서 묻혀 버렸다.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꽐꽐 쏟아지고, 냉장고에서 꺼낸 물은 얼음처럼 시원했기 때문에 샘물의 고마움을 더 쉽게 잊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까마득한 기억 속에 묻혀있던 그 샘물이 머릿속을 헤집고 나온 이유는 R선생님 때문이었다. 항상 변함없는 넉넉한 마음 가짐, 남에 대한 배려와 베풂을 볼 때면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물만큼이나 청량감을 준다.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년이 훌쩍 넘었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을 길고도 긴 세월이다. 그의 외형은 세월의 길이만큼 변화가 있지만 내면은 한결같다. 선생님은 친구나 스승, 선후배, 심지어는 스쳐 지나가며 인연을 맺은 지인에게 까지도 수시로 안부를 묻고, 모임을 주선하여 밥과 차를 대접하고, 대소사가 있으면 앞장서 도와준다. 

R선생님과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셨던 선배 선생님 중 한 분의 사모님이 심한 관절염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 신세를 지고 계신 분이 있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집안을 벗어난 적이 없으셨다. R선생님은 그런 사모님을 안타까워했다. 사모님이 칠순을 맞이 했을 때, 선생님은 자신의 승용차에 선배 선생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2박 3일 남해여행을 시켜드렸다. 창공을 훨훨 나는 새처럼 자유를 만끽하며 흐뭇해하시는 사모님을 보면서 자신은 더 행복했었다고 한다. 


R선생님은 어려운 친구를 도와주려 은행에 보증을 섰다가 잘못되어 돈을 떠맡아야 하기도 했다. 교사의 수입으로 상상도 하지 못할 큰 액수였다. 그 여파로 신용불량자가 되어 10여 년 이상을 곤욕을 치러야 했다. 가까스로 신용 불량자 신분에서 풀렸을 때, 그는 또 같은 일을 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친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자신에게 이렇게 하겠느냐며 오히려 친구를 걱정했다. 


R선생님과 나는 돈독한 관계다. 내가 가족과 함께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날 때 헤어짐이 아쉬워 몇 번씩이나 가족 모임과 식사자리를 만들었고, 한국이 그리울 때 감상하라면서 서정성 있는 음악 CD와,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에세이, 시집을 한 보따리 선물해 주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도 변함없이 한국 소식과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근황을 전해 주었으며, 따뜻한 격려로 나에게 힘을 보태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한두 번 연락을 주고받다가 흐지부지 소식이 끊겼지만, R선생님은 한결같았다. 


7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는데 그는 깊은 샘 물처럼 변함이 없었다. 

나는 외국에서 생활하는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건네주는 맑고 시원한 샘물로 고국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내가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을 때 가장 반겨준 것도 그였다.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세심한 데까지 배려해 주었으며, 내 일이라면 자신의 일을 밀쳐놓고 나섰다. 

개인전을 가질 때면 나는 뒷짐만 지고 있어도 될 정도로 여러 사람들을 동원하여 돌봐 주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세상을 산다고.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이기적이고 손해 보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고. 이런 세태이기 때문에 R선생님은 더욱 빛나 보인다. 내가 갈증을 느낄 때마다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린 시원한 물을 내밀어 주는 선생님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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