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에서 금맥을 캐다.
Keith Haring, Andy Mouse, print, 96.8 ×96.8cm
낙서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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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처럼 낙서로 얼룩진 도시가 또 있을까?
유럽의 도시들도 낙서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뉴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건물의 벽이나 담장, 상가의 셔터, 전화 부스, 지하철 역 벽, 기차의 플랫폼은 낙서가 덕지덕지해 어지러울 지경이다.
낙서에서 금맥을 찾은 사람이 있다.
키스 해링(Keith Haring)이다.
그는 낙서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회화 양식을 탄생시켜 세계적인 팝 아티스트가 되었으니 말이다.
세상일은 참 묘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에게 홀대받던 낙서가 예술작품의 한 분야로 꽃을 피우게 될 줄이야 감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욱이나 지금은 일부 건물주들이 낙서그림(그라피티) 화가들에게 큰돈을 지불하고 건물 벽이나 담장을 온통 그림으로 채워 놓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Keith Haring, USA 19-82, print, 1982
키스 해링이 누구냐고 물으면 머리를 가로젓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보여주면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어 이 그림 내 티셔츠에 있는 그림이네.
이건 내 속옷에 있는 그림이야.
이 그림은 내 모자에 있는 것인데.
이 그림은 내 운동화에 있어,
내 장갑에 있는 그림이네.
내 노트에 있는 그림이야.
내 머그컵에 이 그림이 있는데,
내 천 가방(캔버스 백)에 그려진 그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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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마디쯤 보탤 것이다.
키스 해링,
팝 아티스트,
그라피티 아티스트.
낙서화 (그라피티)를 예술로 승화시켜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키스 해링,
그의 작품을 보며 사람들은
귀엽다.
재밌다.
유아적이다.
기분이 좋아진다라고 말하지만,
그는 작품을 통해 마약과 에이즈 예방, 동성애자 인권 보호, 전쟁과 폭력 근절, 어린이의 건강 문제, 인종차별 금지 같은 문제들을 환기시키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Keith Haring, Icons2, print, 1990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에서 출생한 키스 해링은 어린 시절 월트디즈니 캐릭터와 TV만화 등 대중문화에 빠져 살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만화를 주제로 한 드로잉이나 낙서에 심취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만화 그리기와 낙서를 좋아해서 키스해링을 포함한 자녀들과 함께 큰 종이에 맘껏 놀이처럼 즐겼다. 어머니는 남편과 자녀들이 그린 만화나 낙서를 벽이나 냉장고에 붙어 놓고 감상하곤 했다.
이렇듯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맘껏 만화를 그리고 낙서를 하며 성장한 키스 해링에게 그라피티(낙서그림)로 성공한 것은 예정된 수순이 아닐까(?)
1976년 고등학교 졸업 후 키스 해링은 피츠버그의 아이비 상업 예술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지만,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중퇴한다. 이년 후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고 맨해튼에 있는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s)에서 공부한다. 그는 이때부터 뉴욕 지하철역의 광고판과 벽을 캔버스 삼아 즉흥적으로 낙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의 독특한 이미지에 점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키스 해링은 1978년 스무 살의 나이로 피츠버그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후, 80년 이후부터는 개인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그룹전과 세계적인 비엔날레등에 참가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친다.
팝아트계의 거장인 앤디 워홀과도 친분관계를 가지고 교류한다.
Keith Haring, Untitled - Dance, 1987, 출처 : WikiArt
1986년 키스 해링은 뉴욕 소호에 팝 숍(Pop Shop)을 열고, 자신이 창조한 이미지로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배지 등을 상품화하여 판매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보고 즐기며 구입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실크스크린으로 작품을 대량 제작하여 저가로 판매했다.
키스해링은 자신과 그림에 관해서 숱한 말을 남겼다. 그중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연구하고 세상을 연구하면서 배웠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그는 예술가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오래 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소원과는 다르게 1990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에이즈 감염 통보를 받은 지 2년 후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어떤 거장의 것보다 많이 알려졌고 사랑받고 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가 작업을 한 것은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다른 이들의 삶에 감동을 주고 그들이 삶에서 살아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나는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그의 작품을 즐겨 감상하고, 그가 창조한 이미지로 만든 아트용품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앞으로도 그는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영원히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Keith Haring, Radiant Baby from Icons series, print,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