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현대미술에서 소비문화, 대중문화, 광고, 등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 예술적, 대중적,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며 팝아트 거장으로 우뚝 섰고 세계적인 명성을 한 몸에 받았으며 엄청난 부까지 축적하였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팝 아트의 창시자를 앤디 워홀로 알고 있지만, 영국의 리처드 해밀턴이란 작가가 이미 팝아트를 창시하여 많은 작품을 그보다 먼저 남겼다.
그러나 팝아트의 작품으로 활짝 꽃을 피웠고 거장으로 우뚝 선 것은 앤디 워홀이었다.
그에게는 시대적인 운도 뒤따랐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예술가들이 앞다투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의 기업들과 자본가들은 유럽에서 온 예술가들을 적극 후원해 뉴욕 곳곳에서 전시회가 끊이질 않았다.
뉴욕은 현대미술의 주요 무대로 부상했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술가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미국의 평론가, 언론, 자본이 힘을 쏟아 잭슨 폴록을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44세인 1956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앤디 워홀이라는 작가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Andy Warhol, 캠벨 수프 캔, 합성 페인트, 51 x 41cm, 32개, 1962,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앤디 워홀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슬로바키아 이민자 부부 사이에서 1928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학교에 갈 수 없는 날이 많을 정도로 병약했던 그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어머니가 사준 필름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서 인화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으며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화가의 꿈을 키워 온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카네기 멜런 대학교 상업미술학과에 진학하여 수학한다.
1949년에 대학을 졸업한 그는 뉴욕에 입성하여 1950년대에 상업광고를 위한 디자인 작업으로 유명세를 탔다.
1962년, 앤디 워홀은 캠벨 수프의 캔(통조림) 32개를 4층으로 가지런히 줄 맞춰 나열한 그림을 그렸다. 처음 작품은 합성 페인트로 그렸으나 나중에는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으며 연작으로 선보였다. 같은 시기에 소비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인 코카콜라 병들을 소재로 한 실크스크린 작품 역시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들의 성공으로 그는 대중 매체로부터 각광을 받았고 부를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앤디 워홀은 더 큰 부와 명성을 꿈꾸며 1964년 실크스크린을 통해 대량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규모가 큰 작업실을 오픈했다. 그는 이곳을 팩토리(공장)라 불렀다. 큰 공간에 작업대, 감광기, 프레스(인쇄기), 세척 대, 크고 작은 실크 천 프레임 진열대, 건조대, 유제, 잉크(물감), 로울러, 스퀴지, 등이 구비되어 있는 광경은 그의 말처럼 공장과 흡사했다.
작업실(팩토리)에서는 고용된 테크니션이나 조수들에 의해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처럼 작품을 찍어냈다.
Andy Warhol, 마이클 잭슨, 실크스크린, 1984
그가 실크스크린이라는 판화 기법을 사용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손에 익은 사진을 가지고 작업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원하는 만큼 대량으로 에디션을 낼 수 있고, 같은 색으로 반복해 찍어낼 수 있을뿐더러 색을 달리하여 찍어내면 분위기가 다른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었다.
앤디 워홀은 인기 배우들과 가수들의 초상을 이용한 작품을 즐겨 제작했다.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오드리 헵번,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등이었다. 그 당시에도 인기 연예인에 열광하는 것은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오락거리가 부족했던 시대라서 더 열렬했을 것이다. 영화관이나 콘서트장, 혹은 TV에서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팬들은 사진을 지갑에 넣고 다니며 꺼내 보기도 하고, 확대된 큰 사진을 자신의 방에 걸어 놓고 감상했을 것이다. 그런 연예인들의 모습을 담은 미술작품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간절했을 것이다.
인기 연예인 이외에도 그는 유명 인사들을 모델로 한 작품에도 관심을 쏟았다.
존 F 케네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마오쩌둥, 체 게바라 등, 그리고 기이한 헤어스타일을 한 자신의 초상 작품도 여럿 남겼다.
앤디 워홀은 영화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하나같이 실험적이고 대중성이 없는 작품들이다. 6시간 이상 잠을 자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도 있고, 별 네 개(Four Stars)라는 영화는 총 러닝타임이 18시간 20분이나 됐다. 엠파이어라는 작품에서는 뉴욕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8시간
8분 동안을슬로 모션으로 보여준다.
미술작품에는 철저하게 대중성을 중시하는 그가, 왜 영화에서는 대중과는 거리가 먼 아방가르드 적인 작품을 선호했던 것일까? 솔직히 흥미진진한 영화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런 영화를 돈 들이고 시간 들여 볼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렇다면 자기만족을 얻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Andy Warhol, 마오쩌둥, 실크스크린,
1968년 6월 3일, 그는 미국의 급진적 여성주의자인 밸러리 솔라나스라는 여성에게 권총으로 피격을 받는다. 이 총격으로 인해 중상을 입었고, 생명은 구했지만 평생 의료용 보호대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장애를 지니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성격은 많은 변화가 생겼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고 파티를 좋아했던 그는 대인 기피증을 가지게 되었고, 팩토리를 출입하는 사람들도 엄격히 제한했다.
1987년 2월 21일, 그는 뉴욕의 코넬 의료원에서 담낭에 염증이 생겨 수술을 받은 다음 날 상태가 악화되어 58세라는 나이에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대중으로부터 얼마나 큰 인기가 있었던지 뉴욕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서 거행된 추모미사에는 2000여명의 인파가 몰릴 정도였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 것이 없는 앤디 워홀,
"예술은 비즈니스이고 비즈니스는 예술이다. 사업을 잘하는 것이 최상의 예술이다" 라며 영화 제작자, 일러스트레이터, 디자인, 광고 등, 돈 버는 것에 관심을 쏟았던 앤디 워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