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18
겨울에 심하게 가지치기한 화단을 보며 다시 웃자랄 수 있기는 한 걸까, 다시 푸른색으로 뒤덮이려면 얼마쯤의 시간이 걸리려나 하고 고민했던 게 바보 같을 만큼, 무채색의 가지들에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겁게 내리쬐지도 않는 낯선 추위가 가시지도 않은 봄의 초입이었다. 주차장의 수많은 나무 중 하나의 나무에는 두 개의 까치둥지가 푸근하게 몸집을 키웠다.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경계하듯 울어재끼며 가지나 나뭇잎을 떨어뜨리던 녀석들이 한 가지 한 가지씩 모아 만든 둥지는 멀리서 보아도 꽤 근사하고 아늑해 보였다. 작년부터 보아왔던 것임에 놀라는 것이 새삼인 일이었지만, 해마다 기존 둥지를 떠나 옮겨 다닌다고 생각했던 까치에 대한 편견이 깨지는 것이었다. 왜 이 나무에만 둥지를 두 개나 틀었을까. 비슷한 크기의 다른 나무들은 안 되는, 이 나무만 가능한 무언가가 있었던 걸까. 새들은 그런 걸 잘도 구분하는구나 하며 나무에 손을 짚었다. 차갑고 까끌대는 감촉이 느껴져 나무가 생명력보다는 노련함에 가까운 감각으로 대답하는 듯했다. 새들도 노련함을 좋아하겠거니 싶었다.
작년 5월 즈음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까치의 이소시기가 다가오며 유난히 그들의 눈살이 따갑게 느껴졌던 어느 날, 비정상적으로 내게 빼액거리던 그 장소에서 날지 못하고 떨어진 아기까치를 주웠던 기억. 준비되지 않은 채 땅을 밟아버린 어린 이카루스의 눈은 한없이 검은색이어서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던 기억. 출근시간이란 핑계로 대충 나무 위에 올려두고는 너무 신경 쓰여 다시 와보니 금세 길고양이에게 죽임 당한 아기새를 본 기억...
그 뒤로 나무에 걸 수 있는 형태의 바구니를 트렁크에 넣고 다니게 됐다. 까치는 모성애가 높은 동물로 유명하니 나무에 매달아만 놓아도 먹이를 가져다주며 치료를 도울 것이다. 곧 이소시기가 돌아온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거라고 줄곧 그렇게 생각한다.
옷에 묻은 얼룩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재생되는 현재의 생각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남는다. 어떤 종류의 욕구, 욕망, 욕지거리들, 욕스러운 나뭇가지들이 모여 심장의 한 켠에 둥지를 틀어버리면 거친 파도도 태풍도 좀처럼 떼어낼 수 없게 되고, 마음이 가련한 자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된다. 봄이 왔으니 따듯해져야 할 구석엔 영문모를 음식물찌꺼기가 해동되며 구역질 나는 냄새를 뿜어낸다. 인생을 다듬어줄 명제들은 이럴 때만큼이나 소음처럼 작용하는 때가 없어서 별안간 진리도 휴짓조각이나 다름없구나, 가난한 자는 계속해서 가난하게 되는구나 되새기는 것이다.
죽은 아기 까치가 트렁크의 한 공간을 영원히 차지하게 된 것처럼, 마음에도 빼줄 수 없는 주차자리가 있는 법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아픈 구멍, 메워도 메워도 결국 손가락 하나 크기만큼은 반드시 벌어져 있는 풍혈은 멀어질수록 생각나고, 작아질수록 압도적이니 당신에게만큼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는 걸까. 안에서 당신을 포착할 때마다 또한 자신을 천착하게 된다.
마음에 헐거운 경첩이 달린 것도 아닌데 여닫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울까 싶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세상도 나를 바라본다는 심리학적 발견 아래 온전히 자신을 열어젖히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양팔을 휘두르며 걷다가 다치게 한 이가 한 둘쯤 있을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다소곳하게 걷는 법을 배운다. 죄책감,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근본적으로 죄책감뿐이다. 그러니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변화할 수 없다는 치졸한 변명을 덧붙여 고개 숙이고 걷는 자신을 잠깐 미화해 본다. 이내 목이 아파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빳빳이 드는 것도 일이지만 구태여 숙이는 것도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이런 해맑지 못한 마음이란 사실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임에도 말로 공유하기는 어려워서, 드문 일이구나 여기면서도 지문처럼 틈틈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행동을 곰곰이 곱씹어봐도 밝고 명랑한 의지보다는 어둡고 두려운 마음의 반작용일 때가 더 많다. 아마 모두가 그러지 싶은 곳곳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묘한 요깃거리가 된다.
천천히 하기로 한다. 한 음절씩 내뱉어 완성시키는 것. 타자기는 너무 빠르다. 온점을 찍고 나면 다음에 적을 글자가 사라져 버릴 정도라 별안간 바보가 되어있다. 거대한 물풍선이 터지지 않도록 살며시 테이프를 붙이고, 바늘로 조심스레 구멍을 뚫어 샘처럼 물을 빼낸다. 늘 해왔던 방식인데도 낯선 감각이다. 희망을 품고 한 발자국씩 가련을 보태면 언젠가 이것을 노련이라 부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