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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폭력, 채식의 악취

<채식주의자>에 대하여

by 작은 사슴


학생의 시기를 겪고 성인의 시기까지 지나온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폭력이라는 주제가 언제나 상대성 안에서만 존재하고, 특정 위치에 고정되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폭력을 표현해야 한다면 상징적 서술 혹은 비유적 진술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인데, <채식주의자>에서의 영혜는 고기와 인간 육신에서 나는 냄새(악취惡臭)에 대한 언급을 통해 우리에게 폭력에 대한 간접적인 힌트를 던지고 있다.


섬세하고 정확한 묘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문장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냄새를 정확하게 묘사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사과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사과의 생김새를 설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사과의 향을 맡아본 적 없는 이에게 사과의 향을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냄새를 표현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마술적인 소설가들이 수많은 감각의 언어를 빌려 냄새를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표현'에 그칠 뿐 냄새 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냄새란 세밀한 이해가 불가능한 거대한 복잡성,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 '흰 고래의 흼'이자 표현되지 않는 잉여다.


이러한 냄새와 폭력을 연관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오감 중 가장 먼저 외부자극에 익숙해지는 감각인 후각의 작동 방식은 폭력에 물들어가는 인간의 행동심리와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코를 부여잡게 만드는 악취 풍기는 공용화장실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2분이 채 지나지 않아 후각 자극은 뒷전으로 밀린다.(우린 시각적 더러움을 마주하면 금방 후각적 감각을 잊는다) 폭력 역시 처음의 충격은 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원래 그런 것"이라며 무감각해지기 쉽다.

흔히 폭력은 물리적 상처나 직접적인 행위로만 여겨지곤 하지만, 사실 악취처럼 알게 모르게 침투하는 불쾌감의 범주에 더 가깝다. 냄새가 눈에 보이지 않게 공간 전체를 지배하듯이 폭력도 관계, 말, 시선 속에 스며들어 온다. 다이앤 애커만이 <감각의 박물관>에서 "냄새에는 언어가 없다"라고 말한 것에 더하자면, "폭력에는 언어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혜가 느끼는 '구역질 나는 냄새'는 삶이 문드러지는 지점에서 풍기는 '악취'이자, 행동을 점지하는 예견의 속성을 지닌 '방향'으로 작용한다. 주변 사람들은 맡지 못하는(이미 익숙해져 버린) 악취에 대해 영혜가 느끼는 고통은 감각적 자극뿐 아니라 개인이 느끼는 폭력&억압에 대한 사회적 2차 가해의 고통을 더한 값일 터, 매 순간 폭력을 인지하는 유일한 인물인 영혜가 선택할 수 있는 방식은 폭력에 저항해 세상을 파괴시키거나, 자신을 파괴시키거나 둘 중 하나뿐일 것이다.


식물 상징성의 해석과 마찬가지 결이겠지만 소설 속 영혜는 결코 비폭력적인 존재가 아니다. 식물이라는 가죽을 덧대 얌전하게 포장해 놓았을 뿐, 영혜의 분노는 외부가 아닌 내부로, 자신의 일부를 파괴함으로써 드러다. 육류에 반응해 '구역질'을 하는 것, 더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폭력'을 게워내 자신을 정화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행위는 말하자면 자신을 해치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식물(채식)의 상징성이 지니는 의미, 즉 '의도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영혜가 공격성을 지녔다는 말에는 동의한다손 치더라도, 그녀의 방식이 호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장미가 가시를 가진 이유를 벌레를 공격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무가 햇볕이 많이 쏟아지는 곳으로 잎사귀를 꺾어 자라나게 하는 것을 보고 다른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혜가 손목을 그은 이유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였을 테다.

반음지에서 키워야 하는 몬스테라를 햇빛이 들이치는 장소에서 키우면 서서히 잎이 타들어가고, 마찬가지로 물을 너무 주면 뿌리부터 썩어가면서 잎을 하나 둘 떨어뜨린다. 강한 압박감에 타들어가는 마음, 숨 막히게 눌러오는 답답함에 썩어가는 내면의 뿌리, 영혜의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의 포맷이 잎이 떨어지는 몬스테라의 모습과 평행하게 일치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링거액 주머니를 들고 아내를 따라갔다. 아내는 링거액 주머니를 화장실 안에 걸어두게 하고 문을 잠갔다. 그리고, 몇 번의 신음소리와 함께 뱃속에 들어간 것을 모두 게워냈다.

허전허전한 걸음걸이로 아내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내에게서 역한 위액냄새, 시큼한 음식냄새가 났다.

_<채식주의자>, 70p


그러나 자신 안의 악취를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 그렇게 내보인 것은 결국 악취의 근본적인 형태인 구토이며, 어떤 향기 나는 음식도 구토로 게워지는 순간 타자에게 '악취'로 인식된다는 것은 상기해야만 하는 상징이다.

식물의 '의도 없음'에 대해 설명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말 그대로 의도가 없을 뿐, 철저한 자기 방어로 시작된 구토는 이렇듯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책의 주제의식과도 닿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의 행동은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되어 전달되고, 우리는 우리인 이상 그(그녀)의 의도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의도, 나쁜 의도, 심지어 의도가 부재한 언행에도 사람의 마음은 베여 쓰러진다. 영혜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은 손목은 분명 그걸 지켜보던 아이들에겐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오랜 기간 동안 폭력으로 입력되어 살아갈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처음의 명제를 다시 언급하자면, 폭력이라는 주제는 언제나 상대성 안에서만 존재하고, 특정 위치에 고정되는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채식주의자>을 보고 어떤 폭력성의 기준이 예술을 '예술'의 범주에 올려두고 있나를 고민해 본다면, 앞서 얘기한 폭력의 상대성으로 인해 판단 또한 상대적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은 같은 맥락이다. 예술은 시대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 안에 속한 폭력 전환의 기준도 철저히 시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2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의 미혼남녀 81.2%는 남녀갈등이 심각하다고 응답한다. 20년 사이에 유전자 조작이라도 일어났다는 말인가?

결과적으로 예술작품이 타인에게 폭력이 되는가 마는가는 결국 시대가 결정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시대는 인간의 입을 빌려 예술의 탄압을 논한다. 인간은 파도에 떠밀려가는 플랑크톤 새우만큼이나 미미한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예술의 창작 과정에서 비도덕과 반윤리성이 포함될 경우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예술을 창조한 예술가의 인간성에 관한 문제이지, 예술작품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예술은 의도와 동의어다. 사람들은 작품에서 의도를 읽어내지 못할 때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비도덕과 반윤리성이 포함된 예술, 또한 그런 행보는 여러 시대를 거쳐 재해석되고 연구되면서 갈채를 받기도 하고, 찢겨 불태워지기도 한다. 다만 언제나 동일한 사상을 지지하는 소수 층의 깊은 지지를 받았다는 점만이 공유되는 공통점일 것이다. 현재 각광받고 있는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시대의 철학을 투영하기 좋은 딱 맞는 영사기였기에 두드러질 기회를 얻은 것일 터, 당대 니체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미쳐버린 채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까?


에로티시즘도 어떠한 사상이기 때문에 "~ism"이라는 단어로 끝날 자격을 부여받았다. 사상이기 때문에 의도가 있다. 의도가 있기에 분석될 여지가 있다. 본능의 욕구를 제하고서도 읽히는 흐릿한 의도가 있다면, 예술의 가능성을 품은 것이고, 인간은 본디 가능성의 짐승이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_1904년 1월, 카프카가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좋은 문학이란 카프카가 비유했던 것처럼, 방문 전에는 싱글벙글했다가 나올 때는 울상으로 나오는 병원 같은 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환상 혹은 지식의 무너짐, 새로 배우고 받아들이는 고통,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하는 한심함까지 마주할 수 있는 철저히 발가벗겨지는 세계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프란츠라고 하는 인물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무거운 이상, 환상적인 관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나와 너무나도 비슷했고, 그가 하는 멋진 말들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그를 책만 읽은 헛똑똑이라고 욕하는 이들보고 조심스레 거부감을 느꼈다. 그에게 나를 천천히 동일시시켜 가던 때에 별안간 그의 사상이 참으로 부질없고 의미 없는 것임을 각인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야말로 나는 책 속의 인물들이 보는 한가운데에서 맨 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너무 창피해서 어딘가 숨어버리고 싶은 감각, 내가 주장하고 믿어왔던 굳은 심지가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는 허무한 절망 속에서, 내가 세운 허세의 바벨탑은 붕괴된다.


<채식주의자>에서 눈여겨볼만한 점은 문체의 방식이 독자의 생각을 조종하고 있다는 점이다. 온갖 은유적 묘사를 덧붙여 낮게 깔아 둔 전반부와는 다르게, 후반부에 이르러 영혜의 행보는 모르면 바보다 싶을 정도로 식물화되어 가는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따라가는 독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이 흐른다.

1. 영혜가 왜 이러지? - 2. 아 식물이랑 좀 비슷한 것 같다 - 3. 완전히 식물처럼 되는 중이구나.

2부까지만 가도 영혜의 행동은 '식물'이라는 키워드 아래에서 모두 설명된다. 형부와 정사를 치르고 영혜가 베란다에 나가 햇빛을 향해 가랑이를 벌리는 장면은 꽃의 개화와 놀랍도록 비슷하다. 하물며 진흙탕에 머리를 처박고 물구나무를 서며 편안해하는 모습은 어떠한가. 그녀가 식물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젠 더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


인지 심리학에서 확증편향이란 개념은 사람이 이미 가진 신념이나 편견을 점점 강화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현상이다. <채식주의자>의 문체는 간결하고, 또한 독자의 편견을 강화한다. 우리는 책을 읽어갈수록 영혜가 식물처럼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녀는 식물이 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이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려 들지 않으니까. 3자 입장인 내 시선이 가장 객관적인 시선일 테니까.


영혜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식물이 된 인간의 냄새를 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이 누군가에게 진실로 공감한다는 건 영원히 불가능하다. 마치 영혜를 바라보는 우리가 그녀를 점점 이해하는 것처럼, 아니 마치 그녀를 '이해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모든 인간은 영혜 자신이자 형부이자, 언니로 살며 서로를 오해하고 몰이해의 관계 속에서 사는 존재다. 그게 작가가 영혜를 '평범함'에 귀속시킨 이유이며, 매혹적인 글체로 그녀를 구렁텅이로 빠뜨린 이유가 아닐까. 이 생각을 뒤늦게 깨닫고는 나는 머리를 싸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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