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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로를 얻기 위해 타인의 뺨을 치지만

선택받은 커피와 선택받지 못한 커피

by 작은 사슴

겹겹이 쌓인 구름이 한지 같은 질감으로 불균형한 틈새를 만들어 햇빛을 걸러낸다. 바람마저 뜨거워 한참 충분한 에너지는 딱히 서두르지 않는데도 숨을 헐떡이게 만들고, 식을 줄 모르는 열기는 멈추는 법 또한 몰라 태풍처럼 들이닥친다. 이열치열의 맞불전략이란 뜨거움을 상대로 따가움을 쏟아내는 마음인 것은 아닐 터이고, 그렇다고 어중간한 뜨거움으로 해소되는 상쾌함의 방식은 또 아닐 터인데, 사람들은 열을 식힐만한 무언가가 필요한 듯 애타게 쏘아붙일 어린양을 찾아 헤맨다.


커피는 내버려 두면 세균이 증식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 뜨거운 열기 속의 커피는 더더욱 그랬다. 내버려 두었을지 내버려진 건지 긴가민가한 상태의 커피에서는 충분히 해충이라 부를만한 세포생물들이 스멀스멀 자라난다. 세포들은 방치되면 될수록 서서히 뭉쳐 둥그런 점막을 형성하고, 이미 한 번 구성된 집합체는 다른 구성과 붙는 법 없이 표류하며 그들만의 섬을 만든다. '뜨겁고 눅눅하게 뭉쳐진 해충'들의 섬은 어쩐지 애달파 보이기만 한다.


'해충'들의 잘잘못은 어디서부터 설명되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기준으로 익충과 해충을 나누어야만 한다던 어제의 상식은 오늘의 러브버그 이야기로 다시 따져 물어야 했는데, 실질적 익충인 러브버그는 그 모습이 싫다는 인간의 기분에 의해 '치워버려야 하는 것'으로 전락한 현실이다. 단 7일조차 참지 못하는 인간의 아우성은 인간과 벌레의 본질적인 닮음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드는데, 공생 관계라면 완전히 다른 종이라도 상부상조하는 벌레는 오히려 상황이 좋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인간에게 타종과의 상부상조는 없고, 이용만 있을 뿐이다)

벌레는 벌레를 벌레로 보지만, 인간은 벌레를 통해 자기를 본다. '너'를 통해 '나'를 보기도 하는 인간이지만 '벌레'와 '커피'를 통해서도 자기를 보는 게 인간이다. 씁쓸하게 눌어붙은 버려진 커피잔, 어디로 날아가는지조차 모른 채 불빛에 머리를 처박는 날벌레, 언젠가 그러했던 내 모습 중 하나일 것이 분명해 단호히 뿌리칠 수 없는 묘한 타자의 조각들. 바꿔 말하자면 언제든지 '치워버려 질 수 있는' 불쾌함의 계곡들이랄까.


이언 매큐언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는 일은 인간성의 핵심이다."라는 말에 첨언하자면,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는 일 또한 인간성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이 의미하는 타자라는 개념 안에 비인간도 포함됨을 구태여 풀어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만, 거대한 겹눈을 가진 잠자리의 입장에서 비행하는 일이나, TV가 되어 모니터로 화면을 송출하는 일 따위를 입장 바꿔 헤아리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에...

타자의 입장을 상상하는 방식은 세상에 대한 연민의 본질이자, 도덕성의 범위를 지구와 환경으로 확장하는 대범한 전환임이 분명하다. 우리는 존재 균열의 가장자리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영토를 확보한다. 타자 안의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 도리어 자신만의 영토를 제대로 구분 지어 세상과 적절히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작은 말장난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세상 모두를 '나'의 일부라고 여기는 나르시시스트와는 비교된다.


미숙함을 보고 손가락질하는 몸짓이 더욱이 숨 막혀오게 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손가락의 끝에 있는 양이 진정 그대들의 모습은 아닐는지. 거울이 유리라고 생각해 침 뱉는 자승자박의 모습은 영혼을 '나'의 바깥으로 꺼뜨린 뒤 그 영혼의 몸에서도 다시 바깥으로 한 차례, 두 차례 거듭 빼내온다.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사유했노라면 양도 잠자리도 TV 모니터도, 침을 뱉는 자들도 결국 나를 규정하는 요소였다. 거울을 마주 보게 하고 그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은 앞 뒤로 거울에 비쳐 무한하게 펼쳐진 자신의 모습을 눈에 담고는 그 모든 게 자신의 모습임을 부정하지 못한다.


썩은 커피는 역겨운 향이 난다. 우릴 때는 버려질지 몰랐던 깊은 풍미의 갈색 액체가 고이고 고여 웅덩이를 형성하며 눅눅한 외딴섬이 되기까지 대체 어디에 놓여 있었을까. 커피잔이 이쁘다는 이유로도 커피는 선택된다. 들이 삼켜진다. 음미된다. 좋은 평가를 받는다. 사랑받는다.

그리고 나는 선택받은 커피와 선택받지 못한 커피를 왕복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투사하느라 바쁘다. 그럼에도 두 경우 공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건 사랑해 달라는 아우성일 것이다. 시선을 달라는 왜소한 몸짓, 내가 나이길 원하는 눈빛이자, 그가 그이길 원하는 작은 몸부림. 우리는 '당신'에 대한 '자신'으로써 '당신과 자신'을 이해한다. 타인은 여집합이 아니라 나를 조건 지우는 함수이기도 하니까. 남들처럼 살아야겠다던가, 남들보다는 잘살아야겠다는 명제에 닦달당하면서도, 남들이 보고 있기에, 남들 보란 듯이 해내야 하는 당위의 동력이기도 하지 않는가. 남들 눈치 보지 말라는 말처럼 철학적 맥락이 결여된 말도 없다. 그 말조차 들어줄 누구를 필요로 하는 것일 테니.


그는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두세 차례 힘껏 후려쳤다. 화끈거리고 아팠다. 실컷 때리고 나자 그때서야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때린 것은 자기고 맞은 사람은 남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자기가 남을 때린 것으로 생각이 바뀌어 있었다. 아직 화끈거리고 아팠지만 그는 승리감에 도취해 자리에 누웠다.

_<아큐정전>, 루쉰

그는 위로를 얻기 위해 자신의 뺨을 치지만, 우리는 위로를 얻기 위해 타인의 뺨을 친다. 타인의 고통이 곧 나의 위로가 된다 한들, 타인의 고통은 곧 타인 속 내 자아의 고통이기도 할 터인데, 조언을 핑계 삼아 타인의 뺨을 후려치는 행위의 본질은 아큐의 자기기만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사랑하자. 적어도 사랑에 열렬한 이들에게. 바쁘고 또 바쁜 이들에게 연민을 보내자. 그들의 형식은 슬픔이더라도 내용은 행복일 테니까. 입에 가시가 돋은 자들은 등에도 가시가 나지만, 등에 가시가 꽂힌 자들은 서툰 혀만 가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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