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사람에게 어떻게 기억되는가에 대해
교육을 듣는 와중에 내내 그녀의 옷자락을 쳐다봤다. 어깨선부터 허리선까지 꽉 조여져 있다가 펼쳐진 뒤 다시 모여서 온갖 주름겹을 생성해 모여드는 그 옷 줄을. 그녀의 주름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왠지 모를 평안함을 줬으므로, 그 특별한 부분으로 인해 주름만으로도 군중 속에서 그녀를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접힌 선을 만들어내는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날카롭게 뻗은 선, 그을린 듯 자리한 명암, 적당한 완력과 장력. 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팔을 들어 올리는 각도, 고개를 들어 올리는 각도, 머리를 돌리는 각도, 즉 그 사람만이 가지는 고유한 각도에 있었다. 존재를 각인시킬 고유한 기울임, 나는 그것이 궁금해졌다.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대개의 문화권에서 무례한 일이었기에 무례의 빈틈을 잘 공략해야만 했다. 군대에서 배운 주변시 따위를 알맞지도 않은 밝은 불빛 아래에서 부지런히 사용했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여느 노력이 실패하는 것처럼 그녀 각도의 실체도, 교육도 잡아내질 못했다. 세금 처리와 세무증빙에 관한 교육이었던 것 같은데... 돈이 인간이 세운 거대한 사회기틀의 한 발자국이라면, 아마 손에 쥐어진 영수증 녀석도 인간 근본 뿌리에 있는 타인에 대한 관심에 의해 지워지는 것을 이해해 주리라.
집중이 온전히 그녀의 몸짓에 다다른 지 십여분이 흐르자 머리가 아파왔다. 소모재인 집중력을 너무 많이 쏟은 탓이겠거니 하며 눈을 감고 그녀의 탈을 제외한 어떤 빛의 총체, 넘실대며 춤추는 파동의 울림, 아른대며 울리는 바닷결의 윤슬을 한데 모았다. 더도 말고 딱 인간 하나의 크기만큼 그것들을 모으면 눈을 감아도 살아있는 인간이 보였다. 마치 생명력의 원천은 움직임이라는 주장을 펼치듯 물리적 육체가 아닌 몸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동감은 어쩌면 그녀보다도 더 그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 눈을 오래 감고 있으면 교육자에게 실례다. 슬그머니 눈을 뜨고 다시 그녀를 쳐다보자 이상하게도 방금 전 상상한 몸짓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가, 몇 초 내에 자연스레 모습을 되찾았다. 그 짧은 시간 그녀는 마치 자신의 몸짓 안으로 육체를 밀어 넣은 것만 같았다. 점차 일정해진 들어 올리는 팔의 각도, 말을 하고 넘어가기 전 가벼운 끄덕임, 청자를 확인하려 할 때 고개를 돌리는 정도, 그 모든 것이 다시 그녀로 하여금 찰나의 시간 동안 각인된 그녀의 이미지 안으로 육체를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것은 파츠를 모으듯 그녀의 조각이 하나 둘 마주쳐 결합되는 양상이 아니라, 하나의 춤인 것처럼 어우러질 때 블랙홀처럼 모든 조각을 빨아들이는 서커스였다.
교육이 끝나고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했다. 더 이상 얼굴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손가락 마디 끝을 휘날리며 레이저 포인트를 흔들었던 한 인간, 그 방향이 한테 모여 일정한 그림을 만들어내는 심상을 형성하던 몸짓의 형형함, 인간의 본질이란 그 움직임이 형성하는 이미지 일체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의 발현...
독서모임에서 있었던 일도 그랬다. 커뮤니티에 올린 글들은 무거움과 가벼움을 오가며 입체적인 생각들을 매무새만 정리하여 내보낸 까닭에 그 자체로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말하자면 탐구하고 고찰하는 것도 내 모습이거니와 천박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도 내 모습이라는 것.
처음 독서모임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탐구한 글을 보고 내게 사랑쟁이의 이미지를 씌워 생각했고,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스스로의 투박함과 천박함을 믿어달라고 호소하는 상황이 웃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랑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나름은 솔직했던 것이다. 이후 독서모임에서 처음 본 이가 내게 천박함의 이미지를 보고 있었다는 경험은 꽤 신선했다. 그는 천박함에 대한 글들을 보고 내가 가벼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며 적잖이 놀라워했는데, 같은 글들을 놓고서도 직접 대면한 이들은 나를 사랑쟁이로, 그렇지 않은 이는 천박함에 진중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타인의 의견을 부정하기만 하는 건 좋지 않지만, 두 상황 모두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며 손사래 쳐야만 했고, 오해받은 본질에 대한 해명은 결국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미지란 기억되는 방식에 대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러나 그 선택권은 가히 수동적이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들이 내게 씌워놓은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만 같다. 완전한 타자의 시각에서 스스로의 이미지를 반추해 보는 게 여간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미지 연출에 능한 이가 어느덧 이미지 안으로 잡아먹히는 개인의 경험도 그리 어렵지도 않겠다는 추궁만 해볼 뿐이다.
얼마 전 배우 송영규 씨가 음주운전이 적발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잘 알던 배우가 아니기에 슴슴한 감정이었으면서도 그를 위로하려는 댓글들에 마음이 채인다. "벌 받고 나오면 될 것을 왜 죽었느냐"는 말은 어떤 부사나 형용사, 하물며 안타까움의 "ㅠㅠ" 이모티콘을 붙여도 좀처럼 걱정으로 뵈질 않는다. 확정할 수 있는 것은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 그의 이미지는 스스로가 선택한 방식으로 기억됐다는 점과, 그리하여 마침내 배우로서의 형이상학적 죽음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그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더 이상 질타받지 않는 이미지를 가지게 됐고, 그를 향한 여론은 단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됐다. 그는 이를 의도했을까? 진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짧은 전언을 파헤쳐보자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죽어버리는 나라는 존재와 영생하는 어떤 이미지 간의 충돌이 빚어내는 지독한 불협화음을 말로 풀어쓴 것일 테다. 내가 나이길 기대하는 만큼 이미지는 영혼을 따라오지 않으며, 영혼도 이미지를 덮어 씌울 수 없다. 완전히 평행선상에 위치한 장미잎과 가시의 멜로망스는, 여전히 샛붉은 장미의 열정적 사랑 아래 가려지는 법인 것처럼.
이미지에 도취된 자아는 마취된 병자처럼 붕괴하기 마련이다. 이미지 뒤에는 놀랍게도 사람이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한, 소속되지 못한 영원한 이방인에 속하게 되는 건 아닐까. 눈을 감고 떠올린 꽃이 실제 꽃의 줄기털을 모두 포함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말하면서도, 눈 뜬 상태에서조차 이를 보지 못하는 인간의 특성은 모순적이면서도 연민이 간다. 아마 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겠지. 그 모든 어리석음이 곧 내 안의 풀숲을 자극하기 때문이겠지.
글로 빚은 술에 살짝 취해 있던 날 걷어 차인 옆구리에서는 욱신거리는 통증이 오랫동안 남았다. 말끔히 내려가지 않은 텁텁한 잔여감이 이미지를 떠올리는 몇 개의 시간 동안이나 지속되어 경고장을 울려대는 것만 같았는데, 아마 이반 일리치와 그레고리가 느낀 죽음의 욱신거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스스로의 나약함을 마주한다는 건 죽는다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말하자면 죽는 건 이미지고, 그것을 거름 삼아 존재가 성장하는 것일 테다. 이 미지의 고통은 진짜도 아닌 주제에 영혼도 함께 아프다.
사람은 사람에게 어떻게 기억되는가. 팔을 들어 올리는 각도, 고개를 들어 올리는 각도, 머리를 돌리는 각도, 존재를 각인시킬 고유한 기울임. 진실과 이미지 사이 견뎌야 할 미세한 시차에는 따듯하지만 당찬 바람이 불어든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너무 많은 확률과, 변수와, 시공간이 내포된 고차원적 이해의 언어를 돌파해야 했을 것이다. 바람은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바람이 됐고, 아마도 진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