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의 차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주인공 기자 크리스는 사건 현장에 가는 중이다. 그러다 도주하는 범인의 차와 충돌하여 크리스의 차는 완전히 박살 난다. 망연자실해 있는 크리스에게 한 신사가 다가와 자신의 신형 고급승용차 차키를 건네며 말한다.
"생판 남이 주는 선의입니다."
따듯한 김이 새어 나오는, 창조 가능한 ,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자연의 숨결을 담을 수 있는, 한 공간을 나다움으로 채울 수 있는 선물들을 받은 것이 얼마 전 생일이다. 내 역할은 받고 고마워하는 것뿐, 그것 말고는 달리 무엇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자격도 없는 것이 선물 받음이 줄 수 있는 일방적인 괴롭힘의 종류일 터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고마워해야 하는 가가 고민의 한 범주가 될 것인데, 그런 종류의 자기 고민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존재며 나 또한 다르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선물이 가지는 의미가 주는 데 있지 받는 데 있지는 않다는 개인적인 관념에 사로잡혔음이 그 이유다.
그러나 문득 돌이켜본 선물 과정에 우연히 깨달은 증여의 순간이 몸을 휘감자, '세상은 어떻게 아름다워지는가'가 떠올랐다. 단순히 '선물에 대한 선물의 연속'과는 결이 다른, '선의가 낳는 선의'에 대한 이야기다.
며칠 뒤 신사를 수소문해 찾아간 크리스는 영문을 묻고 신사가 선의를 베푼 이유를 듣는다. 사실 이전에 그 신사 또한 자신의 자녀가 위급했을 때에 타인의 선의를 받은 적이 있었으며 "답례는 됐으니, 친절을 베푸세요."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을 뿐이라는 것.
다시 주인공 크리스는 신사에게 선의를 베푼 이전의 사람을 찾아가고, 그 또한 이전에 선의를 받은 이력이 있음을 들으며 가장 처음의 선의를 베푼 자를 찾아간다.
라플라스의 악마를 찾아가는 이 여정에서 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증여의 성질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누군가의 선물에는 물건으로써의 가치, 즉 상품 가치에서 벗어난 무언가 있다고 무의식 중에 느낀다. 시장 가치에 담기지 않는 그 잉여가 다름 아닌 고유성일 것이다.
그 고유성은 물건을 '물건'이 아니게 만들어 버린다. 즉 시장 가치로써 교환 가능한 상품의 선상에서 벗어나게 만들어 '교환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 선물의 효능이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이 증여해 주었을 때만 정말로 소중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돈을 주고 매수한 노벨상에서 우리는 아무런 영광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증여는 시장교환형 사랑과는 다르다. 이전에 줬던 사람에게 다시 사랑을 주는 시장 교환형의 사랑이 아닌, 줬던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사랑을 건네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 증여의 성질이다.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이 기쁜 이유도 내가 주기 이전에 타인에게서 먼저 받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얼마를 해줬으니 이번에 이만큼 받아야 해."는 절대 증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선물의 탈을 쓴 시장 교환일 뿐이다(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준다고 의식하자마자 '주는 나'와 '받는 타인' 간의 계산적 사고가 이루어짐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까지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이며 약간의 쾌락을 계산한다).
증여의 방식은 언뜻 일방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행위 발생 이전에 반드시 전사가 존재한다는 특징을 떠올려 본다. 사랑 이전의 사랑, 증여 이전의 증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을 예로 들자면, 세상 모든 아기들은 '사랑받아야 할 근거'와 무관하게 돌봄을 받는다. 양육을 받을 만한 논리적인 근거도,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사랑받는다. 달리 말하자면 '부당하게 사랑받고 말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부채감은 삶 내내 매달려 자신의 새로운 창조물인 아이에게 자신 또한 대가 없는 사랑을 베풀음으로써 '증여'한다. 이 사랑의 정당성이 증명되는 순간은 당연하게도 '자신 아이가 다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을 때'일 것이다.
그래서 증여란 사랑의 실천이기도 하면서 세계와의 연결이기도 하다. 연인 간의 성애는 사랑의 성질이긴 하지만 연결에 있어서는 배타적 성질을 띄지 않는가. 보답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사랑은 대상이 무분별할 때 더 빛이 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게 선물을 줬던 사람의 증여의 순간을 포착한 순간, 내 차를 긁은 이들에게 선의를 베풀며 "제가 선처를 해준 만큼 타인에게도 선의를 베풀어주세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들은 지금쯤 타인에게 선의를 베풀었을까?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나는 타인에게 선의를 증여함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그의 각인은 내 차에 새겨진 흉터로부터 내 자신의 효능을 불러일으켰고, 전사된 기억들로부터 내게 사랑을 증여한 이들에 대한 감사함을 불러일으켰다.
인생을 구성하는 몇몇의 인연들은 늘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감사함을 불어넣어 주고, 축적된 사랑은 내가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라서야 타인에게 불어넣어 진다. 지극히 당연한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일 것이다.
그의 증여는 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선물을 주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줄 수 있으니 준 것이라는 그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태도에 몹시 놀랐다. 솔직히 말하건대 내게 준 선물보다도 그 선물을 준 행위가 더 매력적이었다고 하면 믿어질까. 생각해 보면 선의가 유독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언가를 더 얹어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결핍을 채워주기 때문이 아니던가. 내가 할 수 있음에도 받는 도움보다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도움이 훨씬 매력적임이 당연하다. 그의 선의는 방사형이고, 나만을 향하지 않는 선의가 더 멋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