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그를 저버리는 행동이라면 내가 겪었던 가득찬 무관심은 숨막히게 질척거리는 관심의 결과였다고도 설명할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건 지금의 나에게 위안일까? 혹은 확인사살일까.
<호 씨의 잉걸불>_24.10.29
호 씨가 별안간 W 씨에게 날이 선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W 씨 당신은 왜 성장하지 않는 거죠?", "지난 2년간 당신은 무엇을 했죠?", "나는 당신이 지극히 애 같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SNS로 연이 닿아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3명의 집단이다. 만나서는 사는 얘기를 하거나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하는 등, 평범한 친구들처럼 어울렸다. 어느새 2년이 넘어가는 시간 동안 호 씨는 미래와 자신의 진로에 대한 얘기를 꾸준히 설파했고 그려냈다. 그의 얘기에 적잖이 감화되는 까닭은 말하는 바를 계속해서 달성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W 씨는 달랐다. 그는 언뜻 보기에 미래에 대해 구체적, 아니 어쩌면 추상이란 단어를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무감각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잡는 것이 아닌 현재를 즐기기 위한 벌이와 또한 현재를 즐기기 위한 소비습관 등이 그가 잘하는 것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즐겁게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 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호 씨에게 가까운 쪽이었고, 어쩌면 호 씨와 거의 똑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부러진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만남 초기 내 목적은 오로지 호 씨였다. 같은 생각을 하는 이를 가능한 오래 만남으로써 내 자신과 그의 상호 연결성을 강화하고 교류한다. 인사이트를 나누고 격려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런 호 씨를 만나는 건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전혀 다른 W 씨를 굳이 계속해서 같이 만난 것은 W 씨가 과거의 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되고 싶지만 외롭고 쓸쓸해 보였고, 그것을 표현하는 법조차 서툴러 사랑을 주고 싶어 하지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 길 잃은 새인 모양. 나는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와 골몰히 생각해 보았을 때, W 씨는 어쩌면 우리 중 가장 완전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에 대한 질문에서 완전히 해방된, 이미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삶을 살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더 나아져야지, 더 나아져야지.' 혼자서 되뇌이는 성장의 말은 대부분 주입된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강요하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 지를 무의식적으로 잡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W 씨는 현재를 즐기는 삶이 삶이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계속해서 꿈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호 씨는 예의바른 말투로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데 능통한 사람이고 이를 아는 이유는 그와 내가 닮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투는 진정 정중했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깃들어 보였으며, 대상이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로 무엇보다 아팠다.
나는 앞서 호 씨가 계획대로 자신의 삶을 척척 달성해 나가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더불어 설명하자면 그는 멈추는 법도 몰랐다. 강한 실행력과 의지는 슬프게도 강한 관성을 형성하고 그는 이제 제대로 멈추는 법을 모를지도 모르겠다. 관성의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그에게 W 씨의 한심한 점을 그대로 갖춘 호 씨 스스로를 상상해보라고 말했더니 그는 너무 한심하고 무기력하다고 대답했다.
사람은 자신 안에 없는 요소는 미워할 수 없다. 본인이 미워하고 있는 그 한심한 모습이 자신 안의 내면아이가 원하는 모습이며, 초자아가 그 아이를 강하게 억압하고 있으니 어쩌면 당신은 W 씨가 부러워서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호 씨는 지나치게 차분한 상태로 그럴지도 모른다고, 주변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단점같은 걸 마주할 때마다 화가 난다고 말했다. 여기서 호 씨가 차분하게 이를 인정했다는 점이 사뭇 놀라웠다. 어떤 삶을 살아왔길래 이렇게 감정이 강하게 억눌려 있는지도 궁금했고, 또한 여기까지 자연스레 깨닫고 인정하는 자세에서 성장하는 서사의 주인공을 감지했다. 거기서 더 첨언하는 것의 의미를 잃고, 조금 휴식이 필요하신 것 같다고 말하고 대화를 마쳤다. 그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찾아갈 것이다.
우리는 다음 달 만나서 얼굴을 보고 얘기를 더 진중하게 해보기로 했다.
위 일기를 쓴 것이 작년 10월이다. 나는 호 씨를 진정시켰고, 우리 셋은 그 뒤로도 꾸준히 만남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제 더는 W 씨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대상에 대한 단정과 판단이 그를 더이상 알려하지 않는다는 가슴 아픈 명제가 마음을 후벼팠지만, 지난 만남을 마지막으로 난 W 씨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포기하게 됐다. 그는 내 마음속에서 죽었다.
이것은 조금 오만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내 모습을 봤었다. 두 사람과 주기적으로 만남을 이어간 것도 그들을 관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날아오르기 전의 내 모습과 추락 직전의 내 모습,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힘빠진 늙은 새인 지금의 내 모습.
과거를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했다. 그것이 반드시 행복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닌, 단지 덜 불행의 길로 이어진다는 의미의 최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돌이켜 돌아갈 곳을 정해도 자리가 온기를 가지지는 않는 싸늘한 최선의 선택이다. 적확한 양의 감정을 겪어 조미료 뿌리듯이 음식을 내오지 않으면 나를 둘러싼 환경은 못난 부모처럼 밥상을 뒤엎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리는 게 늘상이라면 감정은 여느 낡은 세대보다도 보수적 입장을 취하며 뒤로 숨는다. 어느것으로부터도 상처입지 않겠다는 두꺼운 방어기제의 벽은 오랜 시간동안 공을 들여 부드럽게 부수어야만 하고, 그것은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가 힘든 일이라 구태여 선택할 필요도 없는 선택지다.
그러나 과거 감각을 더듬으며 당시의 내가 간절히 원했던 그 천천한 부드러움을 나도 누군가에게 주자는 어떤 자기연민의 마음, 그 행위로 내 더러운 과거로부터의 죄를 씻어내자는 오만한 마음가짐이 W 씨와 나의 관계를 질기도록 붙들어맸다. 나는 그에게서 한심한-사회성이 결여된- 모습을 보고, 과거의 내가 듣고 싶었던 따듯한 말들과 당신은 괜찮다는 안온한 말들을 건넸다. 이유 없이 불행한 사람의 삶 안에는 그 모든 이유가 내재되어 있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 많은 것들이 보일 터, 그것은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그누구도 이해시켜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내가 당신에게 길을 제시한다는 건 가히 오만의 극치였던 것 같다. 그의 결여된 사회성으로 인한 몰이해적 대화방식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고, 그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곁에서 들어만 주겠다는 내 의지는 성인이 되어보려 가시밭길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는 신자들과 어느부분에서 다르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채 얼마가지 않아 무너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 글은 W 씨와의 절교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자 증명이기도 하겠다. 요약된 판결문의 주 골자는 이러하다. 그는 나나 호 씨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단지 '나 이정도의 동생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야.'의 명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빈곤한 관계성의 연장선이랄까. 그 명제에 대한 W씨의 자기변명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인지한 것은 만남 초반부터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내 자신의 이기적 오만함을 채우기 위해서, 말하자면 '난 그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을 치유할 수 있어.'라는 지극히 젊음의 속성을 가진 생각을 고수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만남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가 가진 관계적 역량의 문제점을 열거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애초에 그가 가진 '문제'는 과거의 나에게도 모두 해당하는 것이었으니 내게는 참을만한 종류의 것이었겠으나(그러나 대화 내내 '앞으로도 이런 대화를 계속 할 수 있을까?'하는 물음은 떠나지 않는다) 비열한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변명의 모양을 그대로 사용하자면, 그러지 않는 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도 더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조던 피터슨은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적어도 스스로를 자신의 반려 동물 대하듯이 대하라."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따끔한 지적이자 위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가더라도 무려 절반의 사람들이 의사의 처방을 무시하거나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반려동물이 아프면 꼬박꼬박 병원을 방문하고, 싫다고 거부하는 반려동물의 목을 붙잡고 어떻게든 약을 챙겨 먹인다. 3자의 시선으로 보자면 자신보다도 반려동물을 더 사랑하는 것만 같다.
조언의 함의는 이렇다. 당신들은 그렇게 못난 사람들이 아니므로 최소한 반려동물들을 챙겨주는 것만큼이나 스스로를 챙길 필요가 있다고. 그렇게 해야만 주변 사람들도 자신을 대하는 만큼 부드럽고 존중을 담아 자신을 대하게 되니 당신 자신을 도우는 데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하여야 한다고.
이는 자녀를 양육하는 데에 강조하는 그의 가치관과도 사뭇 닮아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아이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나무랄 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아이를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로 키우는 것'이 '내가 그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것' 이상으로 아이의 삶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W 씨를 키운다거니 하는 얘기도 부적절하게 들리겠지만, 적어도 내가 관계의 시선에서 가진 특유의 거만함에 대해서는 잘못을 부끄러워하기 위해서라도 언급을 해야겠다. 나는 그가 타인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가 사랑을 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그 사람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수 없는 나약한 사람이라는 점도 동시에 인정한다. 나는 그가 다녀온 유럽 여행에서 외울 수도 없는 지역의 이름이 궁금하지도 않고, 거기서 무엇을 먹었는지도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나는 왜 당신이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지가 궁금했고, 거기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연대였지 물리적 세계의 경이로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W 씨가 그다지 생각의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는 점도 설명하는 글이다. 내가 관측한 그의 말하기 목적은 정말로 '말하기' 뿐이었다. '내가 이런 것들을 보았어.', '내가 이런 것들을 경험했어.' 단지 자신이 감각한 것들을 입을 통해 다시 내뱉은 단순 입출력의 과정 어디에서 내가 매력을 느낄 수 있겠다는 말일까. 말하기가 내게 입력되면 나는 생각을 하고 출력한다. 그 출력을 다시 입력받아 고유의 생각으로 재출력해낼 때 대화가 의미가 생기고 색채를 띠는 것 아니겠냐마는, 최소한의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인 그조차도 W 씨는 편리하게 생략했다. 그가 원하는 대화는 '온전히 자신만 있는 대화'라고 느껴졌다. 앞의 청자는 청자 그대로 있어야만 하는 일방적인 설명회 구도와, 그 안에서 기어이 주인공으로 있겠다는 심보를 어찌 성숙하다고 쳐줄 수 있으랴.
가장 아름다운 구도는 W 씨가 듣고싶어하는 그 말을 내가 해줌으로써 그는 내게 고마움을 느끼고, 스스로 발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자아성찰을 해나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지친 나는 조던 피터슨의 조언을 따르는 게 맞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대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의 '사랑받을 수 있는 태도'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사람이 바뀌는 것은 자신 스스로가 응당 그 필요성을 깨달을 때지만,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어리숙하게 믿었던 내 나약함이란.
여기서 W 씨를 '날아오르기 전 내 모습'이라고 칭한 간극의 비극이 발생한다. 나는 과거 열등한 관계능력으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고, 나를 긍정해주는 아무나의 말에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찌질했다. "있는 그대로도 괜찮다."는 말을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그에게 긍정적인 말들을 전했다. 과거의 내 무지함을 발견했기 때문에 어떤 말을 듣고싶어할지 너무나도 잘 알아서, 잘 알기에 그 슬픔이 너무 커서. 하지만 내가 지금의 '나'로 있을 수 있게 된 건 아무도 내게 사랑을 주지 않아서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 강제된 외로움의 고통이 날 공부하게 만들었다.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일념을 넘어 타인을 사랑하고 싶다는 무구한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 강제된 외로움이라는 고통은 필연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W 씨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모순성에 또한 괴로워진다. 아이가 원한다고 다 해주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아름답게 만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W 씨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음에 더해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 둔다면(그는 이를 고통으로 인식하겠지만 면밀히 말하자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 뿐이다) 그는 더 멋진 사람이 될 것이다.
W 씨가 관계에서 나를 수단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봐주길 희망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와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면, 대체 나에게 W 씨는 어떤 존재로 있는 걸까?나는 그를 좋아하지만 좋아하기 때문에 내쳐야 한다는 어딘가 애틋한 명제가 탄생해버리고 말았는데, 이는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불편한 명제를 만들어 낸다.
'내가 겪었던 가득찬 무관심도 실은 누군가의 사랑표현이었던 건 아닐까.'
어떻게든 사랑받고 싶었던 시절의 고통이, 실은 누군가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관심의 무관심이었다면 나는 울어야 하는가 웃어야 한단 말인가. 나를 긍정한다고 말하려면 과거의 부정적 경험들을 '타인의 사랑'으로 인정해야 할 터인데, 자비가 제거된 언어폭력들에 대한 수용이 선인이 되기위한 필요조건이라면 난 그정도의 위인이 될 수 없노라고 터놓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존재의 뿌리부터 부정하는 그 못난 비난과, 비난도 관심의 종류라며 겸허히 받아들이라던 야만적인 가르침들을 어찌 사랑이라 칭할 수 있으랴. 그런데 내가 W 씨를 부정하는 순간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된다. 나 또한 과거의 나를 괴롭혔던 이들과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된다. 긍정과 부정의 모순된 씨름에서 갈등에 빠진다.
내 글은 존재의 한계선을 이탈하지 않는 선에서 전개된다. 타인을 통해 얻은 경험의 이해는 타인을 통해 서술될 뿐 출발지와 도착지는 언제나 '나'의 안에 있다. 그야말로 이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 능력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W 씨를 언급하며 그와 더 이상 관계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글로 쓸 필요도 없겠거니와 그냥 연락을 차단하면 그만이지 않는가. 주구장창 과거니 뭐니 늘어놓을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글의 주인공은 결국 나 자신이다. W 씨를 생각하는 척 하며 사실은 그와 동일시했던 과거의 나에 대해 다시 떠올리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의 파편이다. 그와의 일을 토대로 이 자리에서 '선언'하며, 선언으로 하여금 이리저리 휘둘리지 말고 생각을 견고히 하라는 조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말한다. W 씨를 통해 내 과거를 봤다. 과거의 나는 관계의 몰이해성에 맞는 타당한 괴롭힘을 받았으니 일종의 사랑표현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호의에 간절했으니 아쉬운 마음도 절반이다. 따라서 W 씨에게 '더 이상 당신과 교류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절반의 마음이다. 당신이 더 멋진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사랑의 마음 반 스푼과, 그 길까지 당신과 함께할만큼 내가 성숙한 사람은 아닙니다라는 마음 반 스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