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성숙함에 대해
무엇하나 확실한 게 없는 삶, 불확실성이라는 요소로 가득한 게 사람의 평범함이다. 사소한 결정 안에 크게 작용하는 건 빈틈없는 바쁨이나 혹은 그 이상을 넘는 두려움인 것처럼 느껴진다. 생각을 하고자 한다면, 뜨거운 압력이 차갑게 막아선다. 내 얘기보다도 모두의 이야기라고 여긴다.
<인간 관계론>에서 저자 데일 카네기는 타인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며 대화하는 방법으로 대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금방 이해하고 뜻대로 해주는 것을 설명한다. 응당 그리하며 떠오른 생각은 대부분의 사람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만 그친다는 것. 실제로 말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화자가 말하는 주제에 대해 관심 있는 태도를 일관성 있게 보여주기만 하면 대체로 그 대화에 만족했다. 내 인생의 작은, 그러나 꾸준한 성과를 내는 실험이다.
이건 듣기에 능하게 자란 탓에 습득한, 사는 데 불리한 능력임에 틀림없다. 서로의 말을 허공에 날려 보내는 두 사람의 노랫소리는 하모니가 아니라 웃긴 자작극을 보는 듯한 기분을 내내 연출시킨다. 그 많은 불평불만은 자신의 얘기를 왜 듣는 체하지 않느냐는 못나고 미성숙한 태도에서 빚어지는 갈색 덩어리였다. 마음의 자리를 조금만 내어 주어도 뿌려지지 않을 밀가루 폭탄, 한 번 떨어지면 치우기에 껄끄러운 난잡한 불협화음.
이 소음을 인식할 수 있게 된 건 필경 불행이다. 그 어느 쪽의 의견도 마주할 때 불협화음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입장立場이란 한자를 풀어헤치면 기묘하다. '서 있는 자리'로 간단히 표기되는 입장이란 단어를 뜻 그대로 마당의 한 구석에 홀로 세워놓는 상상을 하면 자연스레 고독과 외로움의 감정이 서늘하게 발치에 찾아온다. 인간도 동물도 아닌 단지 단어조차 세워두면 외로워 보인다.
우리는 지위에 따라 사람이 변하는 사례를 수도 없이 경험하고, 입장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이 대체로 상황과 장소에 따라 정형화되는 인격적 특징을 가진다는 건 눈여겨볼만하다. 한 사람의 인격은 그 사람의 평소 생각과 가치관에 따라 형성된다고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입장'에 따라 보자면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적 요인에 더 많은 비중으로 흔들린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비슷한 말을 떠벌리게 되는 이들에게 "이런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며 질타할 수 있을까?
장춘익 작가의 말에 따르면 상상력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적극적으로 무엇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보이는 것'에 머무르는 능력이다. '상상은 자유'라고 하는 명제도 실은 뿌리 박힌 낡은 상상이다. 발자국이 새겨지는 게 아니라 생겨나는 것처럼, 상상력의 개화도 다른 것들이 거는 말을 애써 무시하던 참을성이 전복되어야 나타나는 것이다.
상상력은 공간의 속박에서 자유롭지만 상황의 속박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마음대로 떼어놓거나 재배치할 수 없거니와 잊으려 하면 할수록 집요하게 들러붙고 달리 생각하려 할수록 제자리를 맴돈다. 상상의 실체는 능동적 자유보다 수동적 속박에 가깝다. "달리 보이는 것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그 말을 뿌리치기 어려울 때 비로소 나는 달리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상상이 수동적이라고 말할 셈은 아니지만, 적어도 모든 상상은 능동성 이면에 가려진 수동성까지도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다른 것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건 어떠한가. 이 또한 생각하기 쉬운 수동성 안에 위치한다. 일단 '다른 것'이 이미 있어야 하고, 그것이 내 눈에 달리 보여야 하며, 나를 압박해야 비로소 관심이 그쪽으로 향한다. 나의 삶에 지속적인 결함을 가하는 불꽃이 눈에 보여야만 다른 것이 살결로 느껴지고 눈에 비춰 나타난다. 따라서 상상의 기원은 언제나 고통이다.
그 번거로움을 인내하는 상상을 지속하는 이들은 늘 '조심스러움'에 머문다. 바꿔 말하자면 양쪽의 결함과 수고스러움에 한 발씩을 담가놓은 고통의 번역가일 테다.
타자의 복잡성을 낡은 지점토로 일축하는 이들의 무례함은 편리함에서 비롯되는 극단의 안정추구적 태도다. 상대의 불편함을 살갗으로 느껴본 이가 다시 그에게 곤장을 내려치기란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세상의 모든 생각과 판단과 의견을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면 번역하는 사람은 언제나 경계선에 위치한다. 백색도 흑색도 아닌 회색의 갯벌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배신자란 오명에 질식당하는 처지란!
존경을 느끼게 해 주었던 몇몇의 성인이 현대 사회에서 침묵하는 이유를 섣불리 판단해 보고자 한다. 그들은 자리에 여전히 서 있다. 그러나 함구한다. 함께 피를 흘린 이들에게 격려를 해주고도 적과의 동침에서 같은 연민을 발견하고야 마는 이들에게 달리 선택지가 있을까?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터인데.
타인의 매우 복잡한 슬픔을 몇 자리 숫자로 표기한다면 모든 입체성은 폭력적으로 단일화된다. 매끄럽게 다져진 언어의 표면에서는 어떤 생각도 서지 못하고 미끄러질 뿐이다. 생각 이전에 언어를 쏟는 사람은 자신 언어의 쓰나미에 쓸려가 언어의 방식대로만 사고하고 살아갈 것이다.
상상의 안정추구적 성향에 의한 이분법적 사고 구조는 힘의 강약과도 그다지 상관없다고 말해두고 싶다. 강자가 약자를 이해할 때 더욱 강해지는 플롯은 약자가 강자를 이해할 때도 같은 모양으로 전개된다. 두 종류 모두 결과적으로 강자만이 남을 것이다. 결과적 약자의 이야기에는 이해 부재가 덩그러니 놓여 있고, 등장인물은 그 부조리한 존재를 치울 생각은커녕 애써 무시한다. 이것을 노력의 부재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까.
타자가 내 선 자리에 서보기를 바라는 편리함 대신 타자의 자리에 서보겠다는 불편함을 고수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더 사람 냄새나는 복잡한 입체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너와 내 '입장'에 동시에 발을 담그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말하건대 너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게 나의 삶이다. 초대하지 않은 불편한 손님으로 찾아온 상상력만이 진지한 상상력이 된다. 다른 모든 상상력을 내치는 가난한 마음가짐으로는 낼 수 있는 구호가 한정적인 까닭에 그것은 아픈, 또한 확신에 찬 목소리가 된다.
가끔 관계가 배우들의 치밀하고 집중력 있는 연기로 유지되는 연극이라고 느낀다. 합 전체의 흐름을 놓고 자신만의 존재에 이기심을 더한다면 불쾌감이라는 봉오리는 금방 피어오르고, 그러한 불꽃은 나무로 지어진 연극무대를 쉽게 태우는 듯하다. 감정이라는 제어되지 않는 불꽃은 너와 내 사이 거리를 붙지 않은 면이 없게도 만들지만 아득히 먼 우주로 날려버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