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애인님을 생각하며
사랑이란 하나의 동행.
이제는 혼자 길을 걸을 줄 모르겠어,
더 이상 혼자 다닐 수가 없어서,
어떤 선명한 생각이 나를 더 급히 걷도록
더 적게 보도록 만들고, 동시에 걸으며 보는 모든 걸
좋아하게 만든다.
그녀의 부재조차 나와 함께하는 그 무언가이다.
그리고 난, 그녀를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욕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보지 못하면, 그녀를 상상하고 나는 높은
나무들처럼 강하다.
하지만 그녀가 떠는 걸 볼 때면, 그녀의 부재를 느끼는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나의 전체가 나를 버리는 어떤 힘.
모든 현실이 한복판에 얼굴이 있는 해바라기처럼 나를
쳐다본다.
문장을, 가슴 한편을 움푹 퍼내는 문장을 수집하는 건 늘 즐겁고 그건 대개 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사랑이란 하나의 동행.' '이제는 혼자 길을 걸을 줄 모르겠어.'라는 짧은 두 문장의 사이에는 예상되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할 아득한 슬픔이 잠겨있다. 단순히 사실을 나열함으로써 설명 가능한 현실의 현상들은 잘 사는 게 중요한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도구이지만, 말도 안 되며 예의도 없는 -예민함이 가득한- 문장들은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듯하다.
시가 늘 노래와 닮아 있다고 여겨왔다. 가사歌詞의 정의가 불릴 것을 전제로 하여 쓰인 글이고 시의 정의가 감흥,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고 한다면, 노래는 귀로 읽는 시이고 시는 눈으로 읽는 노래가 아닌가. 따라서 문장 수집의 대상은 노랫말에서도 예외가 없었으며 노래의 폭 또한 사람 수만큼 다양하고 많았기에 다양한 스승을 만난 제자처럼 주워 담기 바빴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감히 시와 노래의 차이를 설명코자 한다면 시에는 필연 두 명분의 재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리듬, 강세, 음장을 포괄하는 운율만으로 표현 가능한 음악이라는 도구는 인간의 내면에 더 본질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언어를 배우지 않은 아이도 운율에 몸을 맡겨 인간이라는 종 전체가 공유하는 흥을 감각할 수 있는 것처럼 음악은 원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 강력하고,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을 가능케 할 만큼 범위도 넓다.
그러나 시는 준비가 필요하다. 글로써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또 그렇게 옮겨 담을 경험이라는 준비물. 그리고 사랑이 하나의 동행이었듯 경험은 누군가와 지냄으로써, 그 후 사람을 잃음으로써 자각하는 빈자리에 대한 인식이다. 꼬집힘 당할 때라야 우리는 손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병에 걸려야만 신체의 존재를 느끼며, 그녀를 잃고 나서야 내 생명의 일부가 곧 그녀였음을 깨닫는다. 시는 타자에 대한 강렬한 열망 속에서 태어나 그것을 언어로 가공하여 만들어지니 어찌 외로움과 구분할 수 있겠으며 어찌 생동감과 어깨를 나란히 놓지 않을 수 있을까. '있음'의 기억을 '없음'이라는 재료로 노래하는 상실의 애가로 시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존재하기를 원하는"에서 '누군가'의 자리에 할당된 게 인간만은 아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바, 주변의 동식물과도 심지어 노른 벽과도 소통한다. 말 한마디 없는 외로움이란 인간에게 참을 수 없는 무언가이자 가능성의 상실인 죽음인 것이니까. 아무와도 관계하지 못하는 인간은 인간이라 불리지 않으니까. 침팬지도 음악을 즐기고 새도 노래를 부르지만 시는 사람뿐이 부르지 못한다. 타자에 대한 강한 열망과 그리움의 부스러기에서 태어나는 것이 시라면 세상 그 누구도 시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 모임에 가기 전 친구와 나누려 했던 대화가 있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이끌리는 건 이상하다고. 중력이란 건 질량에 비례하니까 태양이 지구를 못 벗어나게 잡고 있는 것이고, 중력이란 게 모든 물체에 예외 없이 존재하는 힘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끌리는 건 그 사람이 내게 강한 중력을 뻗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할 텐데 어째서 다른 이들에게는 그녀의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시시콜콜한 주제.
오직 나에게만 작용하는 저항불가능한 이끌림이란 건 몸의 중력이 아니라 영혼의 중력이 아니겠냐고.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만 작용하는 고유한 이 중력을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겠냐고. 매력적인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영혼의 중력'이 형성되는 과정은 얼마나 깊고 심오할까 하며 인상 깊었던 몇몇의 사람을 떠올리며 얘기했더랬다.(아마 그런 영혼의 중력은 인생의 몇몇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진 심줄이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러자 친구는 중력에 대해 논하려면 일단 빛의 개념과 나아가 시공간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치고 들어왔다. 지극히 이과적인 접근으로 인문학을 설명하는 데 능했던 그이기에 즐겁게 설명하는 그 모습을 듣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방심한 사이에 내 영혼의 중력에 대한 이야기는 갈피를 잃었다. 후에 그의 시공간 개념만이 머릿속에 맴돌아 중력의 감각을 제한했고 나는 글감을 잃은 상실감에 반나절을 무료한 허탈감으로 보냈다. 그에게 화가 났다.
그렇게 잃어버린 글감에 대한 열망에 겨우겨우 땔감을 덧붙이려고 노력하던 찰나, 이 벗어날 수 없는 시공간이 내가 그렇게 고민하던 '영혼의 중력'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 대한 사랑만큼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위성 처지가 되어버린 자신을 떠올리며, 이 둘만의 우주를 눈으로 마주하게 된 자신을 떠올리며, 감사한 깨달음일지 멋쩍은 불쾌감인지 모를 아리송한 감정으로 시를 적었다.
<영혼의 중력>
영혼의 중력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자 당신은 중력의 시공간에 대해 얘기했고
나는 시공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아! 이게 영혼의 중력이겠거니
모임에서 위의 시를 말하고 김인육 시인의 <사랑의 물리학>이라는 시를 소개받았다.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그 익숙한 명제가 나온 시, 첫사랑이라는 옷걸이에 딱 들어맞는 옷이지 않는가. 영혼의 중력이라는 질문은 언젠가 읽었던 그 문장으로부터 출발했을 생각이다. 시는 잠자코 숨어 있다가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존재를 통해 세상으로 나오려 하는 듯하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그 의미가 경험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에.
그런 의미에서 시는 노련한 이가 젊은이에게 보내는 다정한 조언과 닮아 있다. 쓰레기가 되어버린 진리 이야기처럼 말만으로는 체감되지 않는 조언의 탈을 쓴 수많은 무례함들이 있다면, 시는 격정 되는 태도가 아닌 걱정하는 태도로 경험을 나열한다. 솔깃하면 듣고 가보시라고, 아니면 그냥 지나가셔도 좋다고. 시집의 얇은 두께는 그 가르침의 밀도보다도 배려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다정함의 영역 아닐까. 하나의 시가 누군가에게는 휴지처럼 무의미하고 가벼울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인생 전체를 꿰뚫는 무게를 가지고,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자신을 끌어당긴다. 이는 구태여 시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필요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이 없는 것처럼.
시는 그림의 속성을 가진 이상한 글이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그림을 보고 우린 그것을 정확히 무엇인지 특정하기 어렵지만, 후에 동그라미 안에 눈과 코와 입이 그려진다면 우린 그림이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그림은 덧붙일수록 이해가 쉬워진다는 것.
글은 그 반대다. "사과"라고 적는 것이 "빨갛고 달콤한 과일이면서 먹자마자 과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끔 하는... "라고 구태여 길게 늘어 적는 것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알아듣기 편하다. 글은 덜어낼수록 이해가 쉬워진다.
그러나 시는 글임에도 그림의 속성을 가졌다. 덜어낼 곳 없이 덜어낸 모양으로 가냘픈데도 어느 한구석 알아볼 수 없는 난해함이 가득하다. 억지로 이해하려 한다면 자신의 몰상식을 마주할 뿐이다. 마치 묘비에 새기는 잠언과도 같아서 누군가의 기나긴 여정을 몇 줄로 요약하고야 마는 글의 밀도를 상상하자면 시에 대해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라고 표현한 페르난두 페소아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조언이 경험 후에야 빛을 발하며 깨달음으로 승화되는 것처럼 시도 경험에 의해서만 읽힌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히는 이상한 종류의 글이라 소개해도 될 것이다.
애인님과 촉박한 데이트를 했다. 늦은 밤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은 어둡고 비가 쏟아져 신경이 곤두선 채였고, 무거운 졸음에 피로감이 나를 짓눌렀다. 나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그녀는 음악을 조용한 클래식으로 바꾸고 창 밖을 바라보다 서서히 잠에 들었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올 무렵 내 정신의 가난함에 대해 자책했다.
한때 내가 정한 운전의 이유는 동행하는 사람들의 편안함이었고 운전의 목표는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졸고 있지 않는가. 나는 애인님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눈치를 줬을 뿐인데 그녀는 사랑스럽게 내 목표를 이뤄주었다. 그렇게 이 순간을 꿈꿔왔을 터인데 같이 힘들었을 그녀에게 불평불만이나 늘어놓고 있는 꼴이라니! 정신의 빈곤함이 저열한 수준이라 부끄러움에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손을 건네 꼬옥 쥐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손을 잡아들었다.
한 손 운전을 연습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다른 손은 그녀의 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고, 도착할 때까지 깨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잠에 든 그녀가 깨지 않고 편하게 쉬길 바랐다.
사랑과 동정이 같다고 주장한 사람 중에 쇼펜하우어가 있다. 인간과 세상을 지배하는 건 우리 안의 무분별한 에너지인 '의지' 때문이고 그 맹목성이 초래하는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는 당신과 내가 근원적으로 닮아 있음을 발견하는 때 느끼는 동정의 감정을 사랑으로 바꿔 말해도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나와 닮은 사람 중 가장 다른 당신을 느끼고, 나와 다른 사람 중 가장 닮은 당신을 느끼는 이 감정을 굳이 사랑도 동정도 아니라고 변명할 이유가 있을까.
하이데거는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합니다.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사랑은 당신이 세상에 살아 있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당신이 졸음에 빠진 채 새근새근 소리 내기를 원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갈망이다.
<전쟁이 나면> 조용원
전쟁이 나면, 나는 그냥 죽으려 했다.
손 끝에 박힌 가시도 이리 아픈 걸.
팔다리 없이 그리 살 자신이 없는 걸.
난 딱히 세상에 아쉬운 게 없는 걸
그런데 그때,
서서히 눈이 감겨올 때, 너가 보인다.
날 보고 환히 웃는 너가.
날 보고 슬피 우는 너가.
전쟁이 나면, 나는 이제 살고 싶어졌다.
슬피우는 널 떠올리면 가슴이 이리 아린 걸.
그런 널 두고 눈을 감을 자신이 없는 걸.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아쉬운 걸
아픈 게 무서운 적은 있었지만,
죽는 게 무서운 적은 없었는데,
이젠 무서운 게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이제, 무슨 일이 있던 살고 싶어졌다.
사랑 안에도 시처럼 두 명분의 재료가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둘 각각의 목숨이 아닌 다른 한 명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두 명이 하나인 목숨. 강렬하게 그녀가 존재하기를 원하는 염원이 나와 함께 죽는 것이라면, 그녀에게 건네는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 역시 죽어버리는 것이므로. 또한 그녀가 죽는다면 그녀의 존재를 강렬히 원하는 내 영혼도 죽어버릴 것이므로. 신형철 작가가 말했듯 자살은 일종의 살인이고, 살인은 일종의 연쇄살인이다.
사랑의 신비한 점은 어떤 미사여구와 수식어로 꾸며내도 사랑 그대로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떨어지는 중일 수도 있고, 사랑은 타오르는 중일 수도 있으며, 사랑은 달콤할 수도, 비틀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가져다 붙여도 그 사랑은 사랑의 범주에 속하며 진실 그대로의 사랑의 모습이다. 모든 꾸밈어를 꾸밈이 아닌 살점으로 만들어내는 사랑의 특이점에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붙여갈 시간조차 부족한 게 우리 인생이 아닐까. 그래서 아프고 힘들더라도 사랑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은 굳이 많은 수식어가 필요 없는 듯하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의 무릎은 한 번쯤 바닥에 닿아보았을 테니까. 그 사랑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단지 몇 줄만 사용해도 된다는 건 시가 가진 특권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낮은 곳으로> 中, 이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