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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순을 사랑하다.

모순의 모순을 모순하다.

by 작은 사슴

지난번에 사용했던 말을 다시 써야겠다. 그것은 생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에 대한 짧은 문장으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단순한 몇 가지 텍스트로 표현한 것이었다. 우리는 복잡하고 섬세하게 합쳐진 잠깐 동안의 생명 활동을 하는 세포와 조직들의 집합체이며, 한 번의 호된 충돌로도 순식간에 다시 무생물이 된다. 그래서일까? 이 구조물의 복잡한 운동은 생명 활동의 유지라는 성격을 띠면서도 동시에 존재 활동이라는 자연스럽지 못한 행보를 보인다. 자연계에서의 돌연변이이자 언제나 일관성을 파괴하는 인간의 모순도 자신의 유약함을 아는 인간의 독특한 행보일 것이다.


인간의 묘지에는 명과 함께 짧은 구절이 적혀 그 사람의 일평생을 요약한다. 70년 정도의 유한한 삶을 무한함에 새겨 넣고자 하는 의지는 단 몇 줄이면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삶의 의미에 대한 모든 이론을 펼쳐 볼 생각은 없으니 강하게 설명 치도 않겠다만, 실로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의미의 무의미를 주장하는 회의론적 입장에 벅찬 의견을 가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고려하지도 않고 구석으로 치워두기엔 아쉬운 담론이기도 하다.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 인간의 무한함이 유한해지고, 영원했던 가치가 순간적인 가치로 변하지 않는가. 무의미의 의미도 충분히 고려 가능한 주제다.


의미란 언제나 맥락 위에 존재한다. 주장 가능한 대부분의 의미는 순간에 국한되는 것보다도 과거와 미래를 불러와 현재에 꾹꾹 눌러 담는 식으로 설명되며 그렇기 때문에 시제를 적용할 수 없는 모든 시간대에 위치한 사실로서 설명할 수 있으므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파괴성 앞에서 한없이 약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모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모순이란 어떤 사실의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로, 의미를 곧장 파괴하여 무의미로 데려다 놓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무의미의 필수 요소다. 그 어떤 원대한 의미도 모순 앞에선 염치없는 선동 문구에 불과해진다.


그러니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라는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만큼 모든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어느 정도 무의미에 입각해 있으며, 또한 염치없는 존재임을 인지해야 한다. 인정하면 ‘모순적인 인간’ 속에 속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모순’에 속하는 아이러니는 그로부터 빠져나오려 온몸을 비트는 인간을 다시 모순 속에 가두는 재밌는 지옥이다.


개인이란 무엇일까. 개인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개인의 삶을 소설에 대입해 설명해 보자면,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가치관과 행동의 양식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행위는 행위자 본인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의 언제나 행위자를 배반한다. 내면의 심리와 사상들도 언제나 행위자를 배반하여 타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을 알고 있다고 선언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이 70억 인구 나름의 종류대로 70억 개 존재한다고 믿고, 나의 사상으로만 구현된 섬세하게 차별적인 세상의 존재를 긍정하길 요구받지만, 그 모습들이 진정한 ‘자신의 것’인지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심연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세상을 긍정하려면 자신의 모순성도 인정해야 하므로, 모순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또한 자신 고유의 의미를 일부 무의미로 치환해야 함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존재한다는 인식의 인정이 곧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무의미의 늪에서 어떻게 ‘나’를 찾는다는 말인가?).


이쯤에서 톨스토이의 소설을 보자. 도스토예프스키와 달리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 개인의 정체성이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정립되는 탄탄한 것이 아니다.


“스테판 아르카지치는 자신의 태도나 견해들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천만에, 태도와 견해들이 스스로 그를 찾아왔던 것이며, 그것은 마치 그가 모자나 외투들의 모양을 선택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걸치고 있던 것을 걸친 것과 같았다.”
_<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


이처럼 개인 정체성의 토대가 개인 사상이 아니라면, 더욱이 그것이 모자 하나를 이겨내지 못할 정도라면,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한 토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데올로기에 영향받지 않겠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개인의 영혼마저도 어디에서 물려받아 진행되는 방식의 정신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떠올리며 동시에 톨스토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는 것은 실제로 존재할법한 인간 군상의 모습들이고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소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이 모순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는 개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타인의 시선에서 그대의 행동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눈’을 제공하는 것이 톨스토이의 힘이며 바로 그 이유로 우린 소설 속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확신에 차 읽은 사람은, 폴이 애인인 로제를 내버려 두고 시몽과 밤을 보낸 순간 그녀의 부도덕성에 대해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모두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인데 그녀에게 이입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신의 ‘바람직한’ 도덕성에 근거한다면 이입은 폴의 일탈에서 나아가기를 멈춘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사유와 성장 또한 중지된다. 이미 내 도덕성의 아래에 위치하는 텍스트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 소설, 그것들의 가치는 그럼에도 그것을 끝까지 읽고 사유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에 대해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등장인물 개인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그들이 이중적인 잣대를 여실히 보여줄수록 그 인물의 말로를 처참히 연구해야 한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모습이 나를 담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젊음의 속성을 꺼려했던 이유도 그 특유의 거만함과 섣부름이 신속한 판단을 종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스는 젊은이들의 것이며 그 때문에 가장 빠르게 판단하고 낙인찍는다. 문학은 나이 듦의 속성을 가지며 가장 마지막에 판단한다. 문학은 언제나 약자들의 시선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뉴스의 제목으로 보도되면 “기차에 뛰어든 과부”라는 문장으로 정리되는 이야기에 불과하며 그녀의 기나긴 생은 단 8글자로 유한함에 갇혀버린다. 그러나 3권 분량의 소설로 그녀의 생을 읽는 순간 우린 그녀에게 ‘흘러 들어간다.’ 그녀에 대한 섣부른 판단에 대신 억울해하고 대신 화를 낼 수 있으며, 동시에 내 삶에서 일찍이 판단했던 타인에 대한 자신의 행동을 환기시켜 그들을 사랑하려는 노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 즉, 소설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가 광기에서의 탈출이라는 것이며, 그 명제는 “나는 모순적이지 않은 사람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난 모순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모두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정체성이 실은 고유하지 않고, 이데올로기나 주변 환경에 영향받아 만들어진 양산형 제작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타인에 대한 연민이 힘을 가지기 시작한다. 나의 모순과 더불어 타인의 모순을 보고 그의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판단을 유보하여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현대 뇌과학 발전의 가장 눈부신 업적 하나는 인간 뇌의 동작 프로세스가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원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 주장하는 인간도 거시적 관점에서는 짐승과 다르지 않다. 정말로 인간 삶의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하나의 노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처럼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항상 자신 삶에 대한 무의미의 인정과 함께 짝을 지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형태일 것이다. 그것은 ‘너는 해야 한다’는 태도의 철회와 타인의 모순에 대한 이해 가능성을 포함하며 약자들의 이야기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가장 높은 수준의 자기계발서다. 확신에 찬 문구로 개인의 삶을 운전하려는 시도를 펼치는 전형적인 자기계발서는 규격이 맞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오작동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고서 이행하지 못한 대부분의 독자를 패배자로 치환하겠지만, 정말로 잘못된 것은 규격에 맞추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을 규격화시키려 하는 시도 자체다.


예전의 나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며 가십거리 등 ‘비밀’을 전하는 회사 동료의 행동에 그 즉시 혐오감을 느꼈다. 비밀이란 말해지는 순간 비밀이 아니게 될 텐데 단 한마디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는 자신의 모순성 어디가 자랑스럽다는 것인가?

그러나 내가 느낀 혐오감은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내 ‘확신’에서 비롯된 혐오였고, 따라서 나 자신에게 느낀 혐오였다. 그에게서 내 미성숙한 모습을 본 것이다.


지금에 다다른 생각은 인간사 모두 어느 정도 나사 빠진 상태로 그저 그런대로 사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비슷하고 아무리 다르다고 여겨도 한 꺼풀 벗겨내면 다 거기서 거기다. 앞에 서 있는 저 모자란 사람이 내게 화내는 이유도 결국 사랑해 달라는 징징거림이다. 내가 생각하는 원대한 삶의 의미는 한 발자국 멀리서 본다면 ‘인생은 섹스가 전부다’라는 경박한 문구와 하등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박한 문구도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무거움을 지니게 될 수 있고, 있어 보이는 문구도 사실은 그냥 잠결에 내뱉은 가벼움일 수 있지 않겠는가.


결론으로는 다소 뻔한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다. 사유의 끝에 모든 것이 박살 나 무너져 있어도 항상 사랑만은 멀쩡하게 굳건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연인과 나의 못남을 인정하면서 사랑을 시작하기도 하고, 사랑을 시작하면서 연인과 나의 못남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사랑의 의미는 모순에서 시작되며 곧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 이러한 사랑의 테는 서로를 닮으려는 시도가 깃들어 있는 듯하다. 여기서 다시 장난스레 ‘닮는다’는 말의 의미를 끈질기게 의미부여 해 볼 수 있겠다. ‘닮는다’는 ‘다르다(달-으다)’와 ‘담는다’는 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사랑하는 이는 서로 닮는다”는 말은 서로의 다름을 담으려는 시도를 일축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가 닮았다고 칭찬하는 커플은 밥을 다 먹지 않았다고 한쪽이 반대쪽을 나무라는 사이가 아니라, 한쪽이 밥을 다 못 먹으면 웃으며 남은 잔반을 먹어주거나 혹은 그대로 두는 사이다.

잔잔하고 부드럽게 일렁이는 연인의 편안한 모습은 각자의 모순을 존중하는, 각자의 다름을 담으려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서로 다른 형태가 각자의 형태를 자신 안에 담아내려는 필시 실패할 여정에 기필코 몸을 담구어 내는 것, 모순에 기꺼이 부딪히겠다는 그 삶의 태도를 사랑이라 부른다면 사랑은 언제나 모순과 함께하는 까닭에 오히려 모순에 구애받지 않는 무의미 안에서의 가장 의미 있는 무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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