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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무언가의 노예, 가장 낮은 곳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by 작은 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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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제목에서 죽음이 언급된 것처럼 죽음에 대해 끝없이 다루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끔찍할 정도로 평범하고 현실적인 까닭은 작중의 인물들이 제대로 죽음을 응시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건 이반 일리치에게 일어난 일이지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야. 나는 그런 일을 겪을 일도 없으며 그런 무서운 일이 내게 일어날 리가 없어.”_20p


끔찍할 정도로 ‘평범’하고 ‘현실적’이란 건 무슨 말인가. 그것은 관례, 의례, 허례허식과 사회적 가면에 점철된 사람들을 의미하며 진정으로 이반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모습인가? 주변의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었을 때 겉으로는 슬퍼하면서 속으로는 그다지 슬프지 않았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기억이다. 죽음이란 쳐다보려고 하는 즉시 ‘왜 그런지 불쾌해져서 다시 한 번 성호를 긋고 경망스러울 만큼 허둥지둥 몸을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처럼 말이다.


몽테뉴는 죽음에 대해 수상록에서 “인간 생애의 목적은 죽음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음을 멀리하거나 잊어버리려 하는 것은 산다는 목적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피해 도망가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인생의 방향을 죽음으로 재설정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절망을 극복하는 법이 희망이 아니듯 죽음을 극복하는 법이 영생은 아닐 것이다. 절망과 죽음은 ‘수용’했을 때 본인을 성장시키는 공통점이 있기에 죽음을 직시하고 이해한다면, 인생의 큰 굴곡들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진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나 흥미로웠던 점은 이반의 친구 표트르가 이반이 죽기 직전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이반의 아내에게 계속 캐물으면서,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과 죽음이 동떨어져 있음을 느끼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급기야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이반 일리치의 임종 당시의 모습을 상세히 물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이 이반 일리치에게만 있는 특수한 사건으로,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_21p


지금 죽음에 대해 이리저리 고민하고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는 내 시도가, 오히려 죽음을 회피하려 했던 표트르의 시도와 뭐가 다를까? 사실 죽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나 또한 죽음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작가는 도망칠 수 없는 그물을 뿌려놓은 것처럼 소설의 구조를 짰고, 그 안에서 죽음을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은 듯하다.


2. 게라심과 무언가의 노예

인간은 항상 무언가의 주인이 되려 노력한다. 노예로서 사는 삶에 대한 저항이자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향상심을 연료 삼아 주체적 존재가 되려는 주인의식을 계속해서 뽐낸다. 그러나 주인이 되려 하는 방식에는 큰 의문을 품지 않는 듯하다. 그것은 오로지 타인의 선망을 좇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돈은 곧 능력이자 신앙이고 지위가 되며, 그것을 의심하는 행위는 멍청한 행동으로 분류된다.


높은 지위나 계급을 얻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고, 그 자리에 올라간다면 걸맞은 얼굴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살아가며 자신만의 가면 즉, 페르소나를 만든다.

작중 이반의 가면은 그의 지위를 추켜세우는 것과 더불어 굳건해진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움직이지 못하고 되려 목을 조르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돈이 적어서가 아니라 돈이 너무 많아서 그것에 잡아먹혔을 때 돈의 노예라고 불린다. 이반은 속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자유를 상실한 것이다.


“남편과 남편의 병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시종일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예를 들면, 의사는 환자에 대해서 스스로 일정한 태도를 만들어 내고, 이미 만들어 낸 이상 이것을 떼어 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남편에 대해서 어떤 한 가지 태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또한 그에 대한 그런 태도를 새삼스레 없앨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반은 죽어가는 과정에서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그저 애처롭게 연민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을 뿐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가족 앞에만 서면 그러한 말이 쏙 들어가고 나오지 않는다. 가족 앞에서도 가면을 쓰고 생활했던 탓이다.

주인이 되기 위해 쌓아 올린 가면이 되려 자신의 목을 조르는 상황을 만든다면, 과연 우린 주인의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삶 전체가 언젠가 무언가에 종속된 노예의 삶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반의 취사 하인으로 등장하는 게라심이라는 인물은 작중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인물이다. 주인 이반을 위해 일을 하고,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동정하며 슬퍼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반은 게라심에게 강하게 끌리고 영감을 받는다.

주변인들은 자신의 밑에 있고, 의례적인 관행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이반을 변화시키거나 움직이게 할 수 없는 노예(이반과 같은 처지)인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반 스스로 누군가의 노예였음을 자각하게 한 것은 하인 게라심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이반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게라심에게 마음이 동했다.

그는 유일하게 이반을 ‘인간’으로서 연민하고 동정했고, 바로 그 이유로 이반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다. 하인으로서 명령은 게라심이 듣고 있지만, 그가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그를 필요로 하는 것은 항상 이반이므로 ‘주인-노예’ 역학이 뒤바뀐 것이다. 점차 게라심에게 말하는 투가 명령에서 부탁조로 바뀌어 가는 것도 눈여겨볼 장면이다.


게라심이 이반을 편안하게 해 준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게라심은 이반의 발을 들어주는 방식으로, 즉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닌 타인의 발을 들어주기 위해 ‘스스로 밑으로 들어가는 모양’으로 이반을 편하게 해 준다. 이반 스스로 자신의 가장 나약한 모습을 마주하게 하면서, 또한 그 모습을 편견 없이 인간 그대로 봐줌으로써 이반의 위에 ‘올라선’다.


작가는 과연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3. 가장 낮은 곳


“결혼, 그리고 뜻하지 않던 환멸, 아내가 내는 입 냄새, 성욕, 위선! 그리고 죽음과 같은 근무, 금전에 대한 여러 가지 번뇌, 이렇게 해서 1년, 2년, 10년, 20년이 지났지만 모든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해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생기는 점점 없어질 뿐이었다.


자기는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규칙적으로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_98p

이반은 죽기 직전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죽었음을 깨달으며 편안히 눈을 감는데, 이 깨달음을 얻은 지점이 죽음 직전(인생의 가장 낮은 점)이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는가. 사람의 삶은 활시위와 같아서 계속해서 당겨주지 않으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는 항상성이 있다. ‘원래 상태’라는 것은 자신의 가장 추잡한 모습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평생 원하는 모습으로 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하는 ‘활시위를 당기는 노력’을 계속한다면 자신의 본성일지 모르는 추잡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은 변할 수 있다’는 말도 맞는 말이다.


나는 이 ‘활시위를 당기는 노력’이 자신의 추잡함(끝자락)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리막길이 가지는 가치다. 이반이 인생의 내리막길 끝자락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인생의 가장 끔찍한 경험은 진정한 자신의 더러운 본성과 나약한 상태를 마주하게 하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진정한 겸손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넓게 보고, 다양한 기회나 경험을 겪으며 사람들과 연결되는 건 시야를 높이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높이와 깊이는 다르다.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진정으로 인정하는 태도는 깊이에서 나오며, 그 깊이란 내리막길 저편에 다다라서야 얻을 수 있는 속성의 것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에야 우리는 그것을 ‘성장했다’라고 부른다. 만약 이전의 모습이 계속 비친다면 그건 성장이 아닌 단순한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그리고 성장은 지독한 베타성을 띠고 있어서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성장에 있어 이론과 실전이 둘 다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좋은 글을 읽거나 배움을 받는 게 이론이라 한다면 실전은 자신이 파괴되는 경험 즉, 내리막길을 걷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애석하게 표현하자면, 인생에 큰 불행이 닥친다는 건 다른 의미의 큰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력 있는 캐릭터에게서 느끼는 매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단순히 낙관적인 주인공은 매력적이지 않다. <해리포터>나 <진격의 거인> 등 잘 만들어진 유명한 작품들의 주인공은 절대 탄탄대로를 걷지 않고, 내리막길을 겪으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과정을 통해 진정 매력적인 캐릭터가 된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탄탄대로를 걸었던 사람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까닭은, 부서져 본 적 없는 강한 골조로 가득 찬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박살 난 경험으로 부수어져 가루로 가득 찬 사람은 강한 충격에도 끄떡없다. 말하자면 이미 부서져봤기 때문이고, 이미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부서져봐야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나약한 자신의 모습, 가장 내리막길 끝자락에 위치한 내 모습을 알아야 한다. 그게 높이가 아닌 깊이가 매력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스스로 ‘몰락’의 길을 내려간다고 말한다.


“나는 그대처럼 내려가야 한다. 내가 저 아래로 내려가 만날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듯이.

그러니 나를 축복해다오, 그대 고요한 눈이여! 크나큰 행복조차 시기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그대여!
넘쳐흐르는 이 잔을 축복하라! 황금빛 물이 흘러 온 누리에 그대의 환희를 다시 비추어줄 이 잔을!
보라! 이 잔은 다시 비워지기를 바라고,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이렇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니체가 사용한 ‘몰락(Unterdang, going-under)’은 차라투스트라가 10년을 머무른 산에서 내려가는 하산을 의미한다. 몰락은 보통 부정의 의미로 쓰이지만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은 태양이 내려가야 다음 날 다시 떠오를 수 있는 것처럼 변화와 시작, 상승의 전제 조건으로서의 ‘내려감’을 의미한다.

이 낱말이 기독교적 맥락에서도 ‘인간세계로 내려감’ 또는 ‘인간이 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긍정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죽음에 다다랐을 때 언급했던 내리막길에 대한 인상은 내게 이런 의미였다. 진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으려면 내리막길을 두려워하지 말고 가야 한다.


“표트르 이바노비치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도 훨씬 더 야위어 있어서 외모는 너무 달라졌지만, 모든 시체가 그렇듯이 그 얼굴은 그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아름답고 의젓해 보였다.”_14p


초반에 나왔던 이반 시체에 대한 묘사는 매우 의젓해 보였다고 표현되어 있다. 즉, 무언가를 깨닫고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나온다. 실제 죽음 직전 그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비는 방식으로 죄를 뉘우치려 했고, 그 용서는 잘못 살아온 자신 삶 전체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낮은 내리막길에서 깨달음으로 구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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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며 <변신>이 떠올랐다. <변신>의 그레고르는 무용해진 자신의 존재(벌레)가 가족과 ‘격리’됨으로써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며 죽어가지만,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의 이반은 무용 치도 않고 권위가 있으며, 가족과 계속 함께하고 있음에도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며 죽어간다.

두 소설의 주인공 모두 옆구리가 아파오며 죽어갔던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혹시 어딘가 옆구리가 쑤셔 오는 우리 삶에서의 적신호를 우리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을까?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 것일까?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책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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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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