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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행복에 삶을 밀어 넣었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by 작은 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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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제목의 이유


우선 브람스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 이해하고 넘어가면 좋을듯하다. 브람스는 소설에만 국한되는 소재의 인물이 아니다. 잉그리드 버그만, 안소니 퍼킨스 주연의 영화 <이수>등이 그렇고, 영화 OST로도 브람스의 <교향곡 3번> 3악장이 사용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에선 클래식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가 방영되기도 했다.

브람스는 바흐, 베토벤과 함께 독일의 ‘3B’ 음악가로 꼽힌다. 그가 낭만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이유는 스무 살부터 이어진 운명적 삼각관계에 의해서인데 바로 슈만과 클라라부부가 그들이다. 브람스는 스승 슈만의 아내이자 14살 연상의 클라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는다. 소설의 주인공 폴이 시몽보다 14살 많은 것도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작중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하는 모양새는 물음의 형식이다. 그런데 왜 작가는 문장의 끝에 물음표가 아닌 점 세 개로 이루어진 말줄임표를 붙여 제목으로 선정했을까? 나는 그것이 제목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문장이 질문이 아닌 회고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년째 연애 중인 로제와의 권태감을 느끼던 중 만난 매력적인 남자 시몽이 던진 질문은 일반적인 기호의 질문이 아니다.

폴은 얼마든지 빵에 버터를 바르는 걸 좋아한다든가, 영화를 볼 때 구석진 자리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의 취향보다도 단순한 기호를 물어보는 종류의 질문이고, 또한 자신의 깊은 면까지 볼 이유가 없는 흔한 질문이다.


그러나 브람스라고 하는 확고한 취향의 영역에 대한 질문은 남다르다. 나는 브람스를 좋아했던가? 브람스는 내게 어떤 존재인가? 난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시몽이 던진 질문은 날카롭고 대담해서 잊고 있던 내면의 열망을 솟게 하는 능력을 가졌다. 시몽이란 그런 캐릭터인 것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는 여전히 갖고 있기는 할까?”




우리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대상은 어째서 매력적일까? 우리의 결핍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면을 발견했을 때 우린 그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결핍을 보완한다기보다도 결핍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상대에게 우리는 마음을 열게 되는 것이다.


칼 융의 분석심리학에서는 ‘그림자’라는 개념이 있다. 개인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무의식 깊이 억압한 성격의 측면이나 특성을 말하는데 이는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을 포함하지는 않으며 억압된 긍정적인 특성이나 잠재력도 포함될 수 있다.

2009년 Britain's Got Talent라는 프로그램에 수잔 보일이라는 47세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어머니의 병간호로 보냈고, 음악을 좋아했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타가 될 수 없는 조건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폭발적인 가창력과 호소력은 많은 사람들을 감명시켰고, 비록 최종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해 결승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함으로써 그림자가 긍정적 발현했을 때 어떤 위력을 가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시몽은 그 그림자의 발현을 촉발하는 메시지가 표상화된 캐릭터다. 시몽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은 문장 그대로의 브람스에 대한 취향을 묻는 것을 넘어 폴로 하여금 자신 인생의 전체를 회고하게 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소망과 실존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야말로 폴의 삶을 뒤흔드는 캐릭터인 것이다.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그 대신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46p


폴에게 있어 시몽은 완전히 매력적이고 신비한 선택지이며, 그를 선택한다는 건 다시없는 ‘기회’ 일지 모른다. 혹시 자신의 삶에 그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혹시 당연히 그 기회를 잡을 거라고 장담하는가?

하지만 그런 상황이 실제로 닥쳐온다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39세에 미래는 안정적이지만 보수도 적고 재미도 없는 직장을 다니고 있는 상황에서 높은 보수와 창창한 미래를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스타트업 사장이 있다. 이것은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크나큰 기회일지 모르는데도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흔을 앞둔 여자가 결혼할 남자를 선택하는 고뇌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시몽의 대사는 내면의 결핍을, 그림자를, 혹은 잊고 있던 나에 대한 질문을 상기시키며 삶 주체의 존재를 되묻는다. 폴에게 이입해 있는 독자 자신들에게도 말이다.


“아니야, 로제. 이따금 좀 외롭고, 늙은 것 같고, 당신 뜻을 따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는 행복해.”
“당신 행복해?”
“그래.”
33p



2. 로제 선택의 의의.


“그녀는 완벽한 안정감과 더불어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음을 느꼈다. 로제 이외의 누군가를 사귀는 일 같은 건 결코 있을 수 없으리라. 그녀는 그런 안정감에서 서글픈 행복을 끌어냈다.”


서글픈 행복, 잘 생각해 보면 모호한 단어다. 과연 ‘서글픈 행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행복이 기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며 그 사실을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지만, 작가는 행복에 ‘서글픈’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낭만적 사랑’의 기틀을 부순다.


폴은 종국에 로제를 선택하며 진작에 언급했던 서글픈 행복으로 다시 자신을 밀어 넣는다. 이는 충동적이고 위험하지만 매력적인 행복으로 표상되는 시몽과 일상적이고 우준한 행복인 로제 중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앞서 말했듯 새로운 도전, 욕망, 기회를 상징하는 시몽. 그를 외면한 채 다시 무의미할지 모르는 반복되는 삶으로 다시 뛰어드는 것. 이것은 무의미한 선택일까?


<시지프스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정상까지 올리면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한 없이 올리고, 또 올리는 형벌에 처해진다. 그러나 카뮈는 이 같은 무의미로 점철된 부조리 속에서 삶을 착실히 살아내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의미 있는 저항 방식이라 말한다. 무의미한 삶을 모르고 사는 것과, 무의미한 삶을 알고도 살아가는 것은 명백히 다르다.

로제를 선택한 폴의 서글픈 사랑은 타인이 바보라며 놀릴법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도리어 모든 사실을 알고도 선택했다는 점에서 실존적인 의미이자 무의미에 대한 저항인 된 것이다.


맨 처음 폴과 로제의 심심한 관계를 나타내는 문장은 소설의 말미에 다시금 등장한다.


“수화기를 들기도 전에 그녀는 로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158p


우리에겐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듯하지만, 폴 그 자신에게는 자신이 선택한 ‘서글픈 행복’인 것이다.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156p


한편으로 이 사랑 이야기에서 사랑에 대한 작가의 심오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농담하세요? 제가 믿는 건 열정이에요. 그 이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사랑은 이 년 이상 안 갑니다. 좋아요. 삼 년이라고 해 두죠.”
162p

시몽이라는 낭만적이고 매력적인 사랑의 아이콘을 설정해 두고도 어딘가 불안정하고 걸핏하면 쓰러질 것 같은 비대칭성을 부여한 것은 사강 나름의 철학이었을까? 비교적 안정적인 것 같은 로제조차 여성편력이 존재한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그녀 소설의 세계에선 진정한 의미의 안정적 사랑이란 불필요한 주장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폴에게 구애하는 시몽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그가 없애야 하는 것은 로제와의 추억이 아니라 폴 안에 있는 로제라는 그 무엇, 그녀가 집요하게 매달려 있는, 뽑아 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뿌리 같은 그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를 빙자한 삶의 선택을 다루는 이야기로 들린다. 폴이 선택한 것은 로제와의 사랑이 아니라, 로제를 사랑하겠다는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시몽이 이겨야 했던 것은 로제가 아니라 폴의 인생관, 혹은 삶의 방식이었으므로 어쩌면 처음부터 예견된 것처럼 폴과 로제의 사이는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고 나면 처음에 나왔던 구절이 다시금 새롭게 보인다.


“그녀는 완벽한 안정감과 더불어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음을 느꼈다. 로제 이외의 누군가를 사귀는 일 같은 건 결코 있을 수 없으리라. 그녀는 그런 안정감에서 서글픈 행복을 끌어냈다.”
17p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말이다.


“그들은 춤을 추었다. 그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스스로에게 몹시 만족한 모습으로 아무 리듬도 없이 무대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가로질렀다.

그녀는 무척 행복했다.”

17p



브람스는 끝까지 삼각관계에서 선을 지키며 묵묵히 슈만과 클라라의 곁을 지켰다. 닿을 듯 닿지 못한 애달픈 마음.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했던 배려와 따듯함.

브람스가 사랑의 감정을 표면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묻어둔 것처럼 그의 성격은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다. 브람스의 음악 철학도 이와 맞닿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인공 폴이 결국 로제를 선택하며 자신들의 어딘가 나사 빠진 사랑을 지속하기로 한 것은, 어쩌면 묵묵히 지키고자 하는 마음, 서글픈 사랑의 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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