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와 바지의 관계, 그리고 엉덩이의 관계를 생각한다.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남성이 여성의 젖가슴을 보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연장된다는 내용의 연구 기사였다. 결과에 따르면 10분 동안 여성의 가슴을 응시하는 행위는 헬스 30분 동안의 운동 효과와 동일하다) 우리는 하루에 몇 분만 여자 가슴을 쳐다봐도 뇌졸중과 심장마비의 위험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 매일 꾸준히 여자 가슴을 본다면 평균적으로 4, 5년 정도는 더 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법이라는 테두리에 배척당해 수치적 정신 피해의 프레임을 달았던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이다.(어쩌면 범인류적 역사범죄가 아닐까?) 우리 인류는 수명의 5년을 겉치레로 인해 잃고 말았다. 이런 방식으로 잃어버린 인간의 수명이 얼마나 많을까? 뛰어난 약을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젖가슴 해방 운동'의 가치도 중요시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여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운명에 개탄을 표한다. 그녀들은 약간의 자비(셔츠를 풀어 헤치는 것)만으로도 남성에게 효율적인 운동 능력을 제공할 수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떠한 거래도, 에너지 교환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남성은 효과적인 생의 감각을 부여받았으므로, 여자는 언제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로서 기억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농담이었으나 이제부터 진지하게 얘기해 보자면, 생각을 단순하게 하는 소수의 사람은 인간 남성의 평균 수명 연장을 위해 여성 인권을 박해하고 그들이 가슴을 드러내고 다닐 것을 종용하겠지만, 이것은 폭력적인 단순함을 세상에 자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젖가슴 해방'과 '강제 탈의'는 다르다. 중요한 건 인간이 열광하는 요소가 희소성이라는 점이다.
모든 여성이 젖가슴을 내밀고 다닌다면 그 가슴은 더 이상 특별함이 아닌 2개의 지방덩어리가 된다. 남성에게 흥분감과 좋은 혈액순환을 제공하는 건 기회이자 희소한 가치를 체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므로, 가슴을 강제로 열게 하는 사회에선 다시 가슴의 모양을 가지고 희소를 나눌 것이다.
여기서 '가슴 해방'과 '강제 탈의'가 구분된다. 자발적 탈의는 분명한 '가능성'이다. 여성은 가슴을 드러낼 것을 선택할 수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남성들은 그 가능성의 존재 자체에 흥분, 열광한다.
이야기를 가슴으로 시작했지만 중요한 건 더 깊은 것이다. 가슴의 존재는 스스로 '여기 있음'을 주장한다. 일상생활에서 방해되기도, 또한 도움이 되기도 하는 방식으로(무거움, 허리 다침, 이성적 매력 등). 그러나 우리가 지나치는 보이지 않는 강한 영향력의 주체는 따로 있다. 바로 엉덩이다. 의복을 입고 생활할 때 인간은 스스로 팬티 등의 속옷을 입고 있음을 자각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엉덩이가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순간은 대개 살이 작년보다 몇 킬로가량 더 찌는 바람에 예기치 않게 경험하게 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체의 살을 빼는 기준을 '몇 키로냐'가 아닌 '어느 바지까지 입을 수 있느냐'로 판단하기 때문에 의복과 엉덩이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가 없을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가슴을 의식하는 사실을 먼저 언급한 것과 더불어 엉덩이에 대한 선호를 생각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은, 바지와 엉덩이는 불가분 한 관계로 있으며 그것이 각개로 존재할 때 느껴지는 매력보다 조합되었을 때 더욱 상호보완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일반적인 청바지는 놓여 있을 때 단순한 구멍 뚫린 천 조각이며, 세워놓든 걸어놓든, 캔버스에 붙여놓든 미학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어쩌면 종이 접기나 걸레 쌓기 수준의 인상만 제공할 뿐이다. 맨 엉덩이가 드러내는 미학적인 가치는 눈여겨 볼만 하지만, 희소가 사라진 아름다움이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니듯 맨 엉덩이가 호소하는 것은 금방 질려 버릴 '클래식'한 매력 이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애초에 인간이 느끼는 흥분의 요소는 얼마나 벗기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가리느냐에 있으므로 맨 엉덩이는 추잡하다는 평가까지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청바지와 엉덩이를 결합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청바지 고유의 단조함이 부피와 공간에 대한 주장을 내세우며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는 자연계와 인조적 물질계의 탁월한 공생관계라 부를 수 있겠다. 우리는 청바지를 입은 사람의 엉덩이를 바라볼 때 맨 엉덩이를 '볼' 수는 없지만 '상상할' 수 있다. 주체를 가리는 동시에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청바지는 엉덩이에 더 단단히 밀착될수록 자신과 타인에게 존재감을 내뿜는다(이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다).
보고 상상하는 것 말고도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바지의 역할을 떠올려볼 수도 있다. 생리 중인 여성이나 치질, 고환염, 요도염, 전립선염 또는 이와 유사한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둔부에 대한 압박과 불편함이 정신건강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다.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는 것을 배운 인류는 분명 맨발로 돌아다녔을 때의 인류와는 다르게 사고한다. 바지 등의 의복을 입은 사람은 '사회성' 안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지는 의복이지만 내 품행을 규정하는 규율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관심을 내면이 아닌 외부로 돌아가게 하는 도구적인 성질을 띤다(내면에 대한 관심이란 구원의 문제, 화성에 생명체가 사는가, 중력이 없어지면 어떠한가 등의 문제다). 신체에 걸친 최소한의 압력 요소를 겸비한 의복 일체는 인간을 사회 구성원으로 사고하도록 한다는 점을 미루어보았을 때, 발가벗은 인간을 우리는 '짐승'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일까? 천박한 포르노그래피의 각본 연출에 따라 '헐벗은' 사람들이 다소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가끔 있는 건 이와 관련 있는 걸까?
나는 나와 바지의 관계, 그리고 엉덩이의 관계를 생각한다. 내 엉덩이는 바지를 통해 세상과 관계하고, 그로부터 형성된 사회 기호가 내 존재를 재탄생시키는 바, 엉덩이가 가지는 파괴력이란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힘'일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요람일 뿐 아니라 가장 더러운 노폐물을 하루도 쉬지 않고 뿜어 내는 하수구라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도, 사회에 외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의 역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신체 조각 중 주요한 순위를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골반 존재의 자기주장을 나는 '엉덩이의 저주'라 부르고 싶다.
사회적 제도나 관습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몸 전체를 덮는 제의용 복장(승려복, 수녀복 등)을 입음으로써 엉덩이의 저주로부터 자유롭다. 바꿔 말하자면, 타인과 잘 어울리고 싶고 사회적 연결을 적극적으로 느끼고 싶은 인간이 되고 싶다면 엉덩이의 존재를 의복을 통해 효과적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그러나 보이지는 않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