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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도 지금처럼..

시든 꽃을 잘라낼 때 나는 소리는 타들어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난다.

by 작은 사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는 꿈을 꾸준히 꾸고 있다. 뜨겁거나 차가운 그 버림의 과정에서 마주하는 대상의 눈빛은 대상의 전체를 동그란 공으로 말아 놓은 것처럼 한 눈에 들어차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그 안에 다시 그녀 전체가 고르게 퍼져 있어 몹시 희게 느껴진다. 나는 소중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무의식이 메세지를 보내는 까닭에 그녀가 나를 엿볼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인 꿈에서 자학적으로 그 카세트 테이프를 재생한다. 어떤 방식이든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심적 고통은 공동의 숙제가 되지 못한다. 육체도 숙제의 바구니가 되기는 부족하다. 넘치는 물에 채이며 흠뻑 젖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인생은 고되고 침울하기 마련이고, 과거에서 태어난 나는 과거의 운명을 등에 지고 어떻게든 미래에 인생을 내던진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다. 무엇하나 제대로 정의하지 못하면서 끝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애매모호함 속에서 자신만은 분명하다고 어필하는 방식이 가장 효과가 큰 것으로 보인다.


자주 듣던 노래에 흡사 체인이 갈리는 것처럼 '철컥 철컥'하고 거슬리는 소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경쓰니 거슬리는 까닭에 이어폰을 뺐더니 깔끔하게 찾아오는 침묵은 왜 그동안 노래의 일부였던 자신을 몰라주었느냐고 힐난하는 것처럼 체인 소리를 번역해 말해주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노래의 진가를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는 그 가사의 이면에 숨겨진 뜻이나 다른 노래로 이어지는 연결성에서 비롯되지만 그런 요소들이 아닌 단순히 무언가 갈리는 소음에 불과한 것이 나중에서야 이렇게 선명히 들리는 이유는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었다. 말이라야 내 영혼의 상태가 변한 것이어서 어울리는 음조를 찾아낸 것이겠거니, 그렇다면 취향이란 개념은 내 육체보다도 영혼을 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과를 좋아한다'의 명제에서 의미하는 '나'는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나는 그녀가 꿈에서 육체적으로 유린당하는 것을 힘 없이 지켜보았고, 정신적으로 나를 버리는 행위에는 전력으로 저항했다. 나는 왜 그녀의 육체로 줄 수 있는 압박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행동하지 않게 되는가. 육체라는 게 대체 무엇이길래? 그녀와 그녀의 육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따져보자면, 그녀의 육체는 그녀의 이름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육체에 그러한 권리가 없다고 한다면 이름은 그녀의 비육체적이고 비물질적인 어떤 것, 즉 영혼과 이어져 있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육체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어떠한 매개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나라는(나의 이름을 가진) 영혼에 대한 감옥이기도 하다. '이물질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에게 할당된 것', 인간은 육체로 인해 감각적 고통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잊는다. 그것은 진짜 그녀이기를 소망하는 그녀의 비물질적 존재이며 영혼에 해당하는 것이다.


지난 독서모임에서 취미의 3단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최종인 3단계에서의 활동은 창조적인 성질의 것이어서 단순히 즐기고, 분석하고, 해체하는 것을 넘어 만들어내고, 숨결을 불어넣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몰입의 단계이며 몰입에 빠진 인간은 활동할 때 세상에 활동하는 행위만 남겨놓는 방식으로 자신을 잃게 된다. 음악을 창조하는 사람에게 있어 작곡의 몰입은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고 작곡하는 행위만 남겨놓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생득적으로 가진 의지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내놓았으나 기어코 삶을 유지할 것이라면 예술활동을 하라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긍정적인 의견을 보인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특징으로 기록되고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의 예술적 활동을 통해 창조된 창조물들은 곧 내가 살려놓은 '나의 일부'로서 세상에 계속 살아간다. 이 창조물들이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회자되는 동안 나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의지 속에서 계속 살아있는 것이다.


취미의 가장 높은 단계에 창조를 넣은 것도 몰입에 대한 가치를 높게 쳐주기 때문이리라. 그 의견에 동의하는 이유는 더 이상 육체의 중요성을 알 수 없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육체는 나를 표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중을 대변하지 않는 정치인이 그 본질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의지는 비육체적인 성질로 세상과 작용한다. 어쩌면 인간의 생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남겨놓은 글귀와 예술적 행보가 그 본인보다 더 오랫동안 역사에 살아남는 것처럼 인간의 생은 그 창조물을 낳기 위한 '알'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래서 오늘도 더더욱 인지적으로 육체의 아름다움과 매혹에 대해 저항한다. 인지적 저항에 대한 역반발이 무의식에 저장되어 고통스러운 꿈을 선사하는 것일까 싶더라도 영혼이 더 주요하다는 명제는 유효하다. 나와 나의 그녀는 언젠가 늙어 주름이 피부를 뒤덮을 것이다. 그때에도 지금처럼 활짝 웃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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