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에게 뭔가 감추는 중이라는 걸 좀 아세요."
매일 하는 출근이 똑같더라도 하는 일의 자질구레함이 조금씩 다른 모양을 띄는 것처럼, 퇴근길도 같은 형태로 다르게 출현하는 날이 있었다. 온갖 추억이 회상에 젖게 하는 날에는 모든 것으로부터 잃어버린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발견한다. 나는 킥보드를 타고 맹렬히 지나가는 저 남자아이기도 했고, 그 아이로서 횡단보도에서 보도로 넘어가는 짤막한 오르막에 필요한 각오의 크기도 알고 있다. 언젠가 뒤에서 경적을 울린 저 사람이기도 했고, 그 경적을 들어 움찔했던 사람이 되어보기도 했다. 바닥이 숟가락으로 떠낸 아이스크림처럼 움푹 패인 보도, 그 위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유혹적인 울컥거림, 하얀 빗살무늬가 새겨진 돌 옆에 가까스로 피어나 쩍 벌어진 찔레꽃송이들. 추억을 자극한다는 건 내 일부를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반복되는 하루의 구성요소에는 내가 흩뿌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여느 날과 같으면서 달랐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줄기가 꺾여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고꾸라진 장미더미들의 슬픔인지 개운 함인지 모를 웃통수가, 어떤 회상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혀를 끌끌 차게끔 하기만 했으니. '장미 자네는 무엇이 욕심나 한 줄기에 10송이도 더 피었는가. 무거워 자기 고개도 들지 못할 것이면...'하고 속으로 되뇌었다.
한 송이 거둬들여주면 고개 다시 들려나. 그렇게 생각한 뒤 손을 뻗고는 다시 짐짓 주머니로 가져다 놓는다. 죽어가는 생명체를 돕겠다고 손을 뻗은 횟수가 꽤 많은 만큼 죽음에 가담한 횟수도 많은 탓에 인간손에 달린 자연의 영향력을 도저히 알 수가 없게 된 탓이다. 날개에 상처가 난 나비, 바싹 말라가는 지렁이, 힘 없이 넘어져 있던 꿀벌, 외딴 콘크리트에 올라와 있는 풍뎅이, 해를 보지 못하는 풀, 고개 무거워 줄기 꺾인 꽃가지들... 나의 일상길에 발견된 너희는 운이 좋은 거라고, 인간의 원대함을 한 번 맛보라며 도움을 준 다음에는 어김없이 놓아준 장소에서 그들의 사체를 발견했다. 신은 자연을 죽일 힘만 주고 살릴 힘은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강하기는 한 걸까?
고개를 떨구게 만든 꽃들의 애원을 떠올리며, 장미의 봉오리를 따 무게를 덜어주겠다는 생각도 마저 덜어낸다. "힘들게 만든 네 봉오리를 내가 따서 뭐 하리. 네 결실이니 네가 안고 쓰러지는 게 너도 만족하겠지."라 읊조리면서.
그때 별안간 그 녀석을 만났다. 내 키보다도 훨씬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그 장미 한 송이. 질 때 다 되어 슬슬 고개를 낮추니 나와 눈 딱 마주치던 그 녀석의 시선이 내게 와 박혀 묘한 기시감과 함께 불쾌함을 만들어냈다. 그 녀석은 가시가 아닌 다른 것으로 사람을 찌르는 것 같았다.
들킴의 초조함은 자신을 향한 눈빛이 의도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존재를 창피함에 종속시켜 버린다. 특히나 사랑의 경우 더 그런 양상이었다. 꽃을 살리기 위해 꽃의 봉오리를 따야 한다는 것, 사랑하기 위해 그를 상처 주는 것이라는 진부한 메타포로 '난 성인이 되거나 괴로움을 느껴야만 해. 그러나 성인이 될 수는 없고 괴로움을 느끼기는 싫어.'라는 자기 연민에 빠지도록 하는 '사랑 저주'가 된다. 한데 그것이 묘한 쾌감도 동반하던 이유는 남모르던 혼자만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감춰야만 하는 게 아닐까? 이런 독백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든다는 자의식과잉의 진물은 달콤하기 마련이다.
그 녀석은 그런 내 정념의 얼버무림을 처음부터 지켜봤다. 잘남을 아는 채로 잘난 체를 할 때 간파당하면 사람은 스스로도 괴롭힘을 가할 수 있다는 걸 아는지, 그 녀석은 '말하지 않음'을 통해 줄 수 있는 최대의 창피를 줬고, 별안간 나로하여 '검은 선글라스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눈을 가리면 순식간에 노출은 연출로 바뀌는 바, 드러난 자기 존재의 민낯은 검은색의 얇은 막으로 가볍게 방어되어 세상과 유리된 안정감 속으로 존재를 불러들인다. 나는 그 녀석을 볼 수 있지만 그 녀석은 나를 보지 못한다는 일방적인 관계 기울기의 생성, 그것이 '검은 선글라스의 욕망'이다. 헛헛해하며 아무것도 없는 주머니를 뒤진 뒤 급한 대로 핸드폰을 들어 햇빛을 가리는 척 눈을 가렸다. 때로는 대상으로, 때로는 주체로, 독재와 봉헌 사이에서 망설인 그 섬찟한 몸짓이 발가벗겨진 채 드러났을 때, 방어기제는 회피와 저항 작용을 동시에 일으켜 식은땀을 흐르게 했다. 그 녀석 앞에서도 나는 얼버무렸고, 도망쳤다.
눈을 가려 보고 싶은 것만 보았는데 어째서 도망치게 되었을까. '검은 선글라스의 욕망'이 일방적인 관계 기울기를 생성한다고 내가 말했던가? 눈을 가리는 모든 것, 이를테면 창문이나 렌즈 같은 투명성을 내포한 무언가라 하더라도 '검은 선글라스'의 표상을 건너뛰지는 못한다. 재밌게도 실제 관계의 기울기는 '상위의 나와 하위의 너'가 아닌 '상위의 너와 하위의 나'를 만들어낸다는 게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일지 모른다. 검은 선글라스는 '너와의 관계를 내가 편한 방식으로 하겠다.'는 일종의 암시임과 동시에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알리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정념을 완전히 감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란 주체가 너무 나약해서가 아니라, 정념은 본질적으로 보이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잘남의 '잘남'이 잘난 체가 되지 않는 이유는 본질이 몸짓에 있기 때문이고, 목적을 '체體'에 담으면 어김없이 '잘난 체'가 되기 마련이다. 로라는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아그네스의 앞에서 검은 선글라스를 썼다. 울어서 퉁퉁 불어버린 자신의 눈을 감추려고, 또한 자신이 슬픈 상태에 놓여있다는 점을 아그네스에게 알리기 위해.
나는 일순간 로라를 이해한다. 감추기 위해서가 아닌 드러내기 위해서 가리는 몸짓의 본질은 사랑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감추는 행동'이 보여야만 한다. 내가 그것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사랑의 문형이다.
서운해진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도 알아채주길 바라는 그 마음이 완전히 들통났을 때의 창피함은 그 녀석을 만난 날을 더욱이 특별한 날로 각인시켰다. 그저 평소와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만이 하루 구성 요소 중 달랐던 것일 터인데. 그 녀석은 생각보다 훨씬 전부터 그 자리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텐데. 단지 나를 내려다보는 장미꽃과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그날은 반복되는 출퇴근길 속에서 색채를 가졌다.
자연이란 이름의 액자 안에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장면의 여백이 가득 차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리감을 느껴 뒷걸음치도록 한다. 내가 없어도 완벽한, 혹은 내가 없어야만 완벽한 대상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안온한 마음의 온도를 유지한 채 시들어감을 존중하기로 한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내 존재가 안착하길 바라는 몸짓도 일종의 사랑의 문형이리라.
이맘때쯤 바닥에 눌어붙어 보기 싫은 보랏빛 열매들은 결국 참새들이 쪼아 청소해 주던데. 경비 아저씨도 청소 아저씨도 어쩌지 못하는 걸 그 작은 자연들은 지좋다며 거뜬히 해낸단 말이지. 어쩌면 자연의 빈틈에 내 자리는 없는 걸까 하는 비인간적 고민들이 스쳐갈 때에는 가끔씩 그 장미 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