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캠페인은 자기 전까지 책을 읽는 것
<읽는 오후를 읽으며>
아내님과 함께 'Think Week'를 맞아 파주의 출판단지로 향했다. Think Week란 일종의 도파민 디톡스 캠페인으로 모든 전자기기를 멀리한 채 독서와 자연 속에서 온전한 사유의 장을 경험하는 것이 그 취지다. 본질에 맞게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차에 던져둔 뒤 숙소 1층의 북카페로 들어섰다. 앞으로 3일간 전자기기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고작 몇 시간 만에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변할 수는 없고, 끽해야 그러길 노력하는 방식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는 몸짓이겠지만 싱글벙글 설레는 마음은 벚꽃처럼 내려앉았다. 이내 질 걸 알면서도 보는 설레는 바로 그 감각이 2박 3일의 초입에 느껴졌다.
지루함도 새로우면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수많은 책이 꽂혀있는 선반에서 흥미가 가는 책들을 골라 몇 페이지를 펼친 뒤 고개를 저으며 다시 꽂아 넣는 행동의 반복, 새로울 것 없지만 중독되는 쇼츠 스와이프와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하며 혼자 키득거렸다. 흥미를 유발하는 책을 집어 들면 신기하게도 오른쪽 주머니에 진동이 울리듯 지이잉 하고 울리는 기분이 들었는데, 핸드폰도 무엇도 들어있지 않음에도 어떤 떨림이 선명하게 느껴지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여느 뇌과학 책에서 알림음이 발생하면 흥미를 유발하는 뇌신경세포가 자극받는다고 봤던 기억과, 그 역으로 흥미 유발에 의해 평소 핸드폰이 있던 자리에 자극 감각이 생겨난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동시에 떠올랐다. 아무 근거도 없는 이야기다.
많은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기에 턱없이 짧은 인생이지만, 또 낭비하기엔 턱없이 긴 게 인생이기도 하다. 지금 시대는 네트워크라는 이름의 너무 강한 중력으로 소소한 삶의 중력을 쉽게 무력하게 만든다. "새로운 너를 찾아"라는 메시지와 함께 끊임없이 개인을 중고로 만들고 있고, '새로움'이란 단어마저 진부할 지경이다. 그런 마당에 늘 보는 것의 소중함은 너무나도 오래된 것일 수밖에 없을 터, 미미한 것의 미는 더 이상 끌림의 영역에 닿지 않는 것만 같다.
모든 네트워크와 떨어진 채 시간을 인식하는 건 여러 중력에 이끌린 별이 된 기분이다. 중력이 잡아당기는 힘인 것처럼 빨려 들어가는 글에선 시간조차 빠르게 흐르고, 도무지 못 알아먹겠는 말로 점철된 글에선 초침 움직이는 게 선명히 보일 정도로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생을 걸고 장난치는 취향이란 녀석은 내가 밀고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내 멱살을 잡아채 갈 수밖에 없는 거대한 블랙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독서의 취향도 마찬가지라 편식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야만 다른 별의 아름다움도 만끽할 수 있는 것인데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우리의 캠페인은 일어나서 자기 전까지 책을 읽는다. 졸리면 즉시 졸아도 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참고 글로 적거나, 아내님과 시간을 맞춰 토론을 한다. 벚꽃이 휘날리면 산책을 하고, 다시 읽고 싶으면 책을 집어든다. 우리는 삶을 잘 살기 위한 태도에 대해 일견 깨달은 것들을 늘어놓다가, 얼굴을 붉히며 정의와 정의의 정의에 대해 떠들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몸 놓아 쉬는 것도 과거의 철학자들에겐 고단 했겠구나, 실로 사람은 무언가를 창조해내지 않고서는 존재론적 고통으로 삶을 버틸 수 없겠구나 하는 분에 넘치는 걱정까지 마친다. 그야말로 온통 읽느라 보낸 오후다.
"주제넘게 충고하자면, 인간이 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한 줌의 윤리, 옳고 그름에 관한 확신과 행동, 작은 인내심, 재치와 익살과 해학뿐이다."
<에밀 시오랑을 읽는 오후>에서 스스로를 외계인이라 묘사하는 저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잠깐 외계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면(나는 지구인과 아는 사이가 아니다) 인간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놀라운 일이며,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지구에 머무는 동안 글과 시와 음악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사랑하는 이와 친구로 어울리고, 세상 끝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외계인으로 남고자 한다. 지구인들이 가져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
외계인의 몸에 빙의한 건 다소 거만한 처사였을까 싶지만, 일련의 상상들로 하여금 자신이 인간임에 감사하게 되는 또 다른 생각에 다다른다.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볼 수 있다는 점, 모든 걸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식구조인 의인화를 입맛에 맞게 사용하는 건 단연코 인간뿐이다. 산책하며 다람쥐가 될 수도 있고, 내려앉은 까치였다가, 심지어 여러 마리의 참새 무리가 되어보기도 한다. 상상력이 얕은 건지 깊은 건지 돌이 되기도 하고, 물에 잠긴 건초더미가 되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로 새였다면 새 이외의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인간이 특별한 이유도 신체라는 유한성 안에서 다른 생명이 되어보는 무한성을 획득한 까닭이고, 숱한 역사 속에서 그 하나의 문제로 인간 실존은 늘 미스터리였다. 미스터리가 인간이며 인간이 곧 미스터리임을, 또 그렇게 태어났음 자체가 일종의 축복임을 상기하면서도, 지금의 내 방식엔 터부시되는 불순물이 섞인 게 아닌가 하는 묘한 양가성이 자리 잡는다.
내게도 새를 쫓고 나비를 잡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방귀를 뀌어대는 소독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길고양이와 강아지의 눈빛에 화답할 수 있었다. 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고, 개미의 움직임을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자연의 탐구자 자격을 상실했는지 모르겠건만, 현재의 마음가짐은 부족함보다 더 많이 아는 정보의 과잉으로부터 넘실대는 걱정과 불안이 과하게 자리 잡은 것만 같다.
어느새 읽는 오후는 읽는 오전이 된다. 커피가 옅어지는 만큼이나 머리는 지끈해져 오고, 차오르는 침묵만큼이나 세상은 적막에 잠긴다. 이러한 여유는 지불한 화폐의 대가만큼 찾아오는 걸까? 적막하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길을 산책하며 아내님과 대화를 나눈다. 행복이란 많이가 아니라 자주에 대한 문제이므로, 무언가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건 절대적 양이 아닌 행복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Think Week니 뭐니 해도 이곳에 오기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모험이자 다짐이었음은 부정할 것도 없이 사실이다. 좋은 건 대개 알려져 있고 그것을 실행할지 말지도 대개 선택 가능한 분야임에도 우리는 많은 경우 반복된 불편함에 더 편안함을 느낀다. 아주 작은 정보와 그것을 실행할 작은 결단, 이로 이어진 행복의 층위는 '자주'의 경계를 넘어 정말 '많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행복해지고자 하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을 위한 준비물은 그야말로 재치와 익살과 해학이며 우린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책을 읽은 뒤 각자가 감탄한 깨달음을 나열하고, 매 분기의 첫 달 13일을 Think Days로 정했다.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어느 때도 가지 않던 무한한 연기를 이제야 끝낼 수 있던 방법은 잠시만 참고 머쓱잖은 숙소 예약만 해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 뒤 계획은 짜려하지 않아도 술술 흘러나온다.
인간은 의미 없는 고통을 견딜 수 없는 존재인 만큼 의미 있는 고통은 얼마든지 견딘다. '경험의 가성비'라는 말이 그다지 의미 없게 느껴지는 것도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의 성격에 따라 경험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리라. 이곳에서의 모든 경험은 지나치게 저렴하게 느껴져 당최 행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 같다. 집에 돌아오니 고양이는 여느 때처럼 낮잠을 자다 뛰어나왔고, 빈 화분에 심어둔 대파에는 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