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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사슴 Oct 28. 2024

사랑의 이유는 너, 이별의 이유는 나.

너를 사랑한다는 착각에 대해

  누군가를 좋아하면 인생의 궤적이 닮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닮은 꼴의 인생에 서로가 이끌리는 것일까? 우리는 닮은 사람을 만나 닮지 않은 점을 알게 되거나, 닮지 않은 사람을 만나 닮은 점을 알게 되는 방식으로 사랑을 지속하고, 크게 상처받고 아파하며 늦은 시간을 눈물로 채운다.


 사랑은 물처럼 흘러들어와 마음을 채운다. 물처럼 필수적이고, 물처럼 만연하며, 또한 없어질 때 순식간에 사람을 비틀어 죽인다. 마음이 차가워지면 물을 얼려 물방울이 바위를 쪼개듯 마음을 산산조각 낸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물을 끓여 임을 향한 마음에 사무치게 한다. 사용방식에 따라 훌륭함과 저열함의 평가로 나뉘는 사랑은 보이지 않지만 가장 크게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도구이자 무기이기도 하다.


 연애는 신비로운 인간들만의 연극이다. 그 어떠한 증명이나 보증 없이 구두 약속으로 시작하면, 보이지 않는 붉은 끈이 서로를 이어놓은 것만 같은 애처로움으로 서로를 자신의 영역에 옭아매는 인간 종족만의 전유물이다. 따라서 인간만의 신비스러움을 가장 잘 담은 관계와 모순의 전후 과정 총체이기도 하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간 영장류 집단 특유의 가려진 특징들이 생존을 위한 눈치를 발달시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발달시켰다고 설명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동물들과 달리 자신을 객관의 시선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대자對自의 능력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발달시켰다고 설명한다.

 남녀에 대한 해석은 생물학적 요소와 인문학적 요소에 적절히 분산되어 있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는 알맞게 정리된 정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남녀는 성별 안에서 주어진 역할이 있는 것일까?


 남자는 이렇게 해야 하고 여자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해야 한다’의 가르침이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할까에 대한 논의는 각자의 역할분담 전 이루어져야 하는 필수 협의사항이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상담하는 이들에게 “이런 단점이 보이면 당장 헤어지세요.”, “자신의 단점에 대해 지적하는 연인이 있다면 당장 헤어지세요.”라고 조언하며, 모두 내담자를 위한 진심 어린 조언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방향성은 내담자에게만, 즉 ‘나’에게만 향한다. 나로 쏟아지는 방향성의 ‘해야 한다’는 언제나 이별이란 통로로 모두 게워지는 특성을 지니기에 의미를 잃고, 의미를 잃었기에 성장도 잃는다. ‘나’에게 집중하는 연애는 단 한순간도 성장에 닿을 수 없다.


 서로 성장하는 사랑을 위해서 ‘해야 한다’의 가르침은 늘 연인을 향해야 한다. 그녀는 분명 로맨틱한 분위기를 풍기는 요조숙녀다. 보드라운 입술은 늘 과일만 먹고살 것만 같고, 눈 끝으로 아련히 떨어지는 아이라인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인 갈대를 자아내니 성숙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갖추었다. 그러니 그녀는 의지할 수 있는 강인한 남성을 필요로 하면서도 가끔은 그의 힘든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완벽한 여성이다. 이렇게 생각을 끝내고 나니 그녀의 앞에선 조금은 더 투박하고 남자답게 행동해야만 할 것 같다. 평소보다 더 무리하고 과장해서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그녀가 더 좋아해 줄 것이다.

 그는 보기 좋게 그녀와 오래가지 못하고 깨진다. 연애의 방향성을 완전히 ‘나’로 잡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각한 것처럼 요조숙녀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다. 털털한 매력을 지녔고, 스포티한 취미를 가졌으며, 음식은 관심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정리된 그녀의 상을 사랑하는 태도는 그녀에 대한 궁금증을 삭제시켜 자신의 대자의 능력을 제거했고, 그녀를 고정된 즉자로 만들었다. 이제 그녀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된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란 아이에게 술이 맛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만큼 설명하기 난해한 미스터리다. 언제나 그 자신들은 역할에 충실하기를 원하지만 제 중심도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노릇이다. 양자역학은 작동방식을 이해하여 원리를 세우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해되지는 않지만 관측되는 현상을 받아들여 그 ‘사실’을 적용해 혁신을 발견하는 것, 양자역학이라는 엄청난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한 인류의 진보된 생각 방식이었다. 남녀도 마찬가지로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 서로를 대할 때, 안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반복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성장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인간은 허파 안 공간을 연인에게 마련해 숨 쉴 수 있게 해 준다. 이제야 말할 수 있고,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너를 사랑해!”


 사랑의 이유를 파헤쳐보자면 단순하다. 바로 ‘너’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이유도 단순하다. 더 이상 너를 견디지 못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너를 향했다고 생각한 사랑이 사실은 나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걸 알기까지 인간은 무수한 실수를 반복해야만 하는 불쌍한 처지에 있다. 재료로 측량할 수 없을 만큼의 눈물과 잔뜩 긁혀 헐어버린 마음을 소진한 채.

 ‘너’가 누구인지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네 ‘역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내’가 누구인지 질문하는 네게 내 ‘역할’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누군가를 정의하는 순간 파헤치는 행위 자체, 즉 대상을 알아가려는 노력은 의미를 잃는다. 서로가 파헤치고 헤집어지는 과정은 끊임없는 재구성과 마찰, 전쟁과도 같은 고통스러움이며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는 필수과정이다. 한병철 교수는 그의 저서 <에로스의 종말>에서 “절대적 결론으로서의 사랑은 죽음을 통과한다.”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이는 알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타자 속에서 죽지만 이 죽음에 뒤이어 자신으로 생환한다. 나 자신을 희생하고 포기한 뒤에 오는 타자의 선물이 바로 그것이다. 타인을 위해 여러 번 몸을 던져 죽어본 자만이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되려 ‘너’를 향한 사랑을 통해 ‘나’를 알게 됨을 깨닫는다.

 나무에 물을 주는 주기는 나무에게 물어봐야 하고, 나무도 자신도 얼마나 물이 필요한지를 적절히 알아야 한다. 두 존재가 지속적으로 자신과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아야 주고받는 이 모두 사랑스럽게 된다.


 이러한 ‘너’의 생각 방식은 남녀의 역할 기조를 무너뜨린다. 남자를 기쁘게 해주는 방법은 남자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여자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되 조금 더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다. 서로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좀 더 자주 질문하고, 눈을 맞추고, 키스하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이다. 그 단순한 명제가 늘 머릿속을 단순치 않게 쥐어짜는 게 사랑의 묘미이며 중독의 샘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시간을 들여 자세히 보면 보이지 않던 손등 사이로 흐르는 듯한 주름살과 보이지 않던 팔꿈치의 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왜 이걸 이제 알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삼 그(그녀)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직까지도 그(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


 그이의 일부만을 보고 그 사람을 느끼곤 했다. 섬세함이 좋았기에 따듯하고 부드러운 방석에 앉았을 때 그이를 떠올렸고, 삐죽 튀어나온 덧니가 귀여웠기에 뱀파이어 인형을 보고 그이를 떠올렸다. 그렇지만 섬세함이나 덧니는 그가 가진 특징이지 특징 자체가 그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완벽하게 섬세한 사람도 아니거니와 다른 투박한 특징들도 같이 가지고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의 못난 점과 잘난 점을 한데 묶어 전체로 볼 때 그는 완벽한 ‘있는 그대로의 그’가 되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울고 싶을 때 울었고 웃고 싶을 때 울었다. 내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은 건 울고 싶을 때 웃기를 바란 나였고 웃고 싶을 때 울기를 바란 나였다.


 “음들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멜로디가 되는 게 아니고 단어를 연결해 놓는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게 아니며 선들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조각상이 되는 게 아니듯, 내가 ‘너’라고 부르는 사람의 단일함을 다중으로 바꿔놓으려면 그를 억지로 잡아끌고 찢어야 한다. 나는 그 머리카락의 색깔, 그의 말의 색깔 혹은 그의 품성의 색깔을 그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으며, [그를 분석하려면] 계속해서 이런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그는 이미 더 이상 ‘너’가 아니게 된다.”
_마르틴 부버


 자연을 보듯 너를 본다는 말은 그저 광활한 자연 앞에 경외심을 가지듯 그대를 대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무수히 가득 찬 잡초더미의 자연, 빈틈없이 들어찬 생명의 나래에서 어떻게든 규칙과 질서를 찾아 전체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언제나 좌절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노력은 비슷하게 생긴 모든 종들로부터 단 하나의 대상을 분리시킨다.

 모두 같은 장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난히 이 녀석의 키가 작고, 봉오리가 작게 폈다. 오른쪽 말미에 피어지지 못하고 접힌 채 끼워진 꽃잎 하나가 보이고, 가시의 배열이 사뭇 규칙성을 보이는 듯하다. 이 장미에게 “로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자 로제는 장미가 아니게 되어 하나의 존재로서 나와 관계했다. 수많은 장미꽃이 핀 화단에서도 단번에 로제를 알아보게 됐다. 특별히 예쁘거나 키가 크거나 강인한 것도 아니지만 그저 이름 붙여주었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는 이유로 하나의 존재가 되어 내게 왔다.

 사랑하는 이가 서로를 군중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이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자연을 보듯 서로를 볼 때.


 자연을 바라보는듯한 사랑, 대상의 섬세하게 갈라진 피부의 주름까지 타인과 구별해 낼 수 있을 때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자격을 얻고, 이제야 사랑을 하고 있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어쩌면 별 볼 일 없을지 모르는 네가 특별한 까닭은 오롯이 ‘너’이기 때문이다. 너와 같은 키를 가진 사람, 같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 같은 포근함을 가진 사람 수백 명이 줄지어 서 있다 할지라도 누구도 너의 자리에 들어올 수는 없다.


 [사랑에 대하여]라는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듣는다. 음의 운율, 리듬, 강약, 부드러움이 어떤 방식으로 타올랐다가 떨어지는지 듣고 있노라면 그걸 듣고만 있는 내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 언어의 필요성을 침묵시킨 채 뉴런으로 직접 다가와 문을 두드린다. 일체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이 물리적 파동의 집합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다.

 사랑의 촉발부터 종말까지 이르는 수백 가지 과정도 단순하게 시작과 끝이라는 두 개의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을 터인데 그 안에서의 음들은 스파크, 두근거림, 격정, 잉태, 인내와 감내, 감동, 슬픔과 우울, 잔잔함, 재잘거림과 스산하게 스치는 소리까지 가득 차 있다. 키보드의 자판을 두드리거나 연필을 서걱대는 소리는 사랑이라는 주제의 소리 집합에서 단순히 행위의 의미만을 설명하지 않고 두근거림이라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기억을, 추억을 환기시킨다.

 사랑은 그리워할 때 무릇 행복함을 주며, 다시 그러한 점으로 슬픔도 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그를 위해 편지를 쓰고 마음을 전하려 애틋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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