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길가에 버려진 돌조차도.
인생에서 언제 책임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지 묻는 질문에 대한 나름의 고찰이다. 이를 중요한 것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한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신경 쓰지 않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타인에게 책임이나 주도권을 넘길 수 있고 그 범주에 존재하는 것들은 말하자면 ‘중요한 것들 이외의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이란 무엇일까?
얼마 전 국제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중요한 것 1순위의 가치는 돈이었다. 안타까움을 표하는 건 언론들뿐이지 정작 한국의 구성원인 우리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있다. 돈은 가족과 주변인을 지키는 주요 매개였고, 자라오며 그 돈에 울고 웃는 모습을 지나치게 관찰한 세대가 주춧돌이 되어 노동 생태계를 형성하는 사회에서, 도리어 돈이 우선이면 안 되는 이유가 있겠는가? 돈은 한국인에게 사랑의 다른 번역어였다.
그렇지만 세대가 추구해야 할 뚜렷한 목표가 없어진 상황에서 맹목적으로 돈을 좇는 것은 또 어찌 의미될 수 있겠는가. 현재의 젊은이들이 처한 상황은 뒤에서 밀고 있는 이가 그 앞에는 절벽이 있을 거라는 상상을 않고 공허한 응원을 외치는 중이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곳이나 사방이 뚫린 곳이나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기는 매한가지일 터인데 “가라! 가라!” 응원하고 있으니 땀을 삐질삐질 흘릴 수밖에.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중요한 것’이 돈이라는 것은 통계적으로 사실이므로 많은 이들이 물음에 같은 대답을 한다. 그러나 돈이 되는 일은 책임지려 하고 돈이 되지 않으면 주도권을 넘겨버리냐는 2차 질문에는 반응이 모호해지기 마련이다. 개인의 삶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지만 자기 주체성의 세계에선 돈보다도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대개 ‘진리’라는 이름으로 주장된다. 어떻게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는 게 진리일 수 있겠냐만은 한 사람의 생에서 확고한 가치관의 자리를 차지하는 만큼 타자에게 있어 진리란 그에게만큼은 진중하고 무거운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부연설명에 증거로 쓰이는 개인의 경험담은 스피노자의 대전제처럼 결과가 원인의 전제를 수반한 나름대로의 합리적 인과일 뿐이다. ‘자신’이란 원인으로부터 도출된 결과가 어떻게 잘못될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서 누적되어 온 시간들 안에서의 판단이기에 ‘확실히’, ‘틀림없다’는 믿음으로 그득하다. 당최 자신을 의심하는 법을 모르고 살아온 이들에게 진리란 매우 쉽게 주어지는 가벼운 것이기도 하다.
우연의 철학자 베르그송이 지적하는 실증주의 오류는 우연의 결과들로부터 필연의 원인을 발견하고야 말겠다는 귀납적 열정들의 집착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자기계발서들이다. 실증적 가치에 효율성의 논리를 덧댄 자기계발서들의 담론에서 이미 성공한 사람들이 사용했던 존재방식의 통계치를 성공의 보편적 원칙으로 확정하려 드는 건 대부분의 자기계발서가 자서전의 형태를 띠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법한 관점을 제시한다. 훌륭한 사람들이 마침 그러한 삶을 살았던 것인지 그렇게 살았기에 훌륭한 사람이 된 건지에 대한 논지는 행해질 틈도 없이 ‘반드시 해야 한다’의 늪으로 빠져야 하기에 계발서 특유의 공격적 문체에 가려진다. 중요함의 담론을 타자의 가치로 침묵시킨 순간 자기기만과 자기 착취 속으로 던져지고, 표현 그대로의 수동성의 끝에는 끈적한 눈물뿐인 게 아닐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가 토마시에게 반하는 순간은 지극히 우연의 연속으로 제작된 일상극이지만, 6번의 우연은 필연의 속성을 삶에 부여하며 의미를 새기고 담론들을 생성한다. 그것이 필연이었으면 하는 인간들의 희망 섞인 바람에 철퇴를 놓는 베르그송의 주장은 모든 필연에 대한 부정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한 접점에서 만나 사건을 발생시키는 서로 다른 우연적 시간들을 간과한 비인문적 방법론에 대한 비판일 뿐이다. 우연의 '연속성'으로 빚어진 자아와 우연의 '순간'으로 빚어진 단면은 너무나도 달라서 후자로 개인의 삶을 정의하는 행위는 보고 싶은 대로 상대를 보겠다는 의지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도식화하기엔 우리네 삶은 그렇게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중요한 가치들을 설명하는 자기계발서는 언제나 자신이 직접 써 내려간 성공담일 수밖에 없다. 타인의 성공담을 보여주며 “따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며 심장이 부글대는 이유는,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자기계발서가 가진 따끔한 말투에 중독된 개인의 마조히즘적 욕망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필연과 타자의 필연은 엄연히 다른 세상에 존재하며 서로에게 진리의 기준을 강요할 수 없다는 생각은 으레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니체 또한 주장했던 의견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한 의지와 표상의 개념에서 등장하는 '생의 의지'는 쉽게 말하자면 본능적인 영역이다. 니체는 바통을 이어받아 이 생의 의지 안에 진리에 대한 탐구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자연은 자기 보존을 위한 생명의 힘들로 가득하고,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생명력(힘에의 의지)을 지닌다. 진리에 대한 탐구가 세상 사람들의 숫자만큼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개인의 진리는 의지라고 고쳐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니체의 철학으로 니체를 되받아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진리는 휘어져 있다." 타인의 진리 잣대를 가지고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그 자신에게 어떤 효용이 있을까. 자신만의 진리를 직선이라 고수하고 휘어짐의 영역에 안일한 수많은 타자의 담론이 모아져 있는 현실. 다시 묻건대,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진리가 이렇게나 무상하고 모호한 것이라면 우린 중요함의 속성에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중요하다고 믿었던 타자의 가르침이 그 인물의 생에서만 중요한 것이었고, 내가 생각했던 필연들은 사실 수많은 우연이었으며, 그나마 쌓아 올린 나만의 진리도 타인에게 종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까지... 각자의 삶으로 직조된 액자 밖으로는 영향력을 가질 수 없는 그림 속 물감의 처치가 진리의 슬픈 속성이다.
하지만 이렇게 진리는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라고 떠들어댄들 각자의 삶에는 어떻게든 자신만의 중요한 진리가 존재한다. 가령 나는 꽃말이 가진 의미가 너무나도 좋아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 선물을 주기적으로 해야만 하는 가벼운 진리가 있다. 누군가에겐 꽃이 예쁜 쓰레기에 불과할 수 있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지만, 내게는 꽃과 꽃의 의미와 꽃을 고르는 시간 모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개인의 기호는 결코 혼자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사랑받고 관심받고 상처받는 동안 타자에게 통과되어 돌아와 다시금 태어나는 자아가 매 순간 중요한 것의 기준을 뒤바꾼다.
베르그송이나 스피노자가 주장한 중요한 것의 부정을 '강요'에만 적용하는 것이 내 나름의 편법이다. 멋있는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레 닮고 싶고, 스스로가 가진 가치관을 그에 다가서려 수정하는 것이 인간이지 않은가. 타인이 들어오는 ‘침입’에 인간은 변하지 않지만, 자신이 내딛는 ‘다가섬’에는 주체성이 담겨 있으므로 성장의 계단을 밟는다. 레비나스가 “타자는 나의 미래다.”라고 설명한 것처럼 내면의 성장이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자아상을 비롯한 개인의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타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쩌면 정말 오랜 시간을 혼자 보낼 수 있고, 그 안에서의 고독이 스스로를 ‘진리’로 이끌 수 있다고 할 때, 어떠한 인간으로의 오염도 없이 순수한 이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컨대 그런 삶에서는 외롭고 피폐하여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독방에 가두거나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강한 수준의 고문이었다는 걸 고려해 본다면, 인간은 결국 태어난 직후부터 죽기 직전까지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의미를 찾는다. 삶의 의미, 즉 중요한 것 혹은 진리라고 부르는 그 모든 것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은 마찬가지로 그것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힘을 가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자서만 진리를 찾고 자신만의 가치와 목표를 완성할 수 없다. 우리의 진리는 타인의 존재와 그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고, 깊어지며, 때로는 변화를 겪는다. 타인에게서 배운 가치를 다시 타인을 통해 검증하고 확신하는 구조는 스승이 제자가 되고 다시 스승이 되는 원형 모양을 띤다. 중요한 것의 기준은 A의 영향을 받아 B가 변하고, 그런 B를 통해 C가 변하지만, 다시 C로 인해 B나 A 또한 변하게 된다. 그물처럼 얽혀 있어 수많은 상호작용과 조율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게 어쩌면 더 빠를지 모른다. 데카르트처럼 존재하는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식으로 타자를 제거할 수도 있겠지만 비범인에게나 해당하는 문제풀이 방식이다. 많은 것이 생략된 천재의 암산과도 같은, 설명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난해함.
'중요한 것'에 대한 탐구는 단순히 개인의 내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또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 있게 존재한다. 결국 우리는 타인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각자에게 중요한 것들을 그 관계 속에서 상호 조율해 가며 발견하는 존재다.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에 그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면,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아닐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본다. 언제 책임을 내려놓고 타인에게 주도권을 넘기겠는가? 나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할 때 즉, 중요한 것을 배제하려 할 때. 바꿔 말하자면 타인과의 관계를 포기하게 하거나 무너지게 할 때 더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책임을 내려놓을 것이다. 진정한 지옥은 내가 고통받고 두려움에 떠는 곳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이 고통받고 두려움에 떠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곳이다. 소중한 관계를 신경 쓰고 그들 나름대로의 입장에서 원하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 카네기가 중요하게 생각한 삶의 방식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무작정 호구를 자처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은 불완전함의 후유증인지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려 한다. 불완전함이 불완전함을 이용하는 잣대 자체가 어불성설이겠지만은 이런 인간의 어리석음도 철학자들은 익히 알고 있던 모양이다. 이럴 땐 칸트 아저씨의 말처럼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너그럽게 행동하면 된다. 나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평소 행동 방식이든 글이든 표정 몸짓이든 티가 나고, 유일하게 자신만만한 건 늘 입뿐이다.
중요한 것이 타자와의 관계를 비롯한 자기의 총체라는 설명은 담을 수 있는 가치의 크기 및 범주가 온전히 자신만큼의 크기에서만 한정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겸손해야만 한다. 밝지 못한 눈으로 자신의 미학과 다르다고 폄하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세는 <도덕경>의 한 구절을 빌리자면 대방무우大方無隅라고도 적을 수 있겠다. 큰 사각형은 모서리가 없는 듯 보인다. 쉽게 쓰자면 내 지평이 작기 때문에 타인의 큰 지평이 이해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늘 겸손하되 질문을 멈춰서는 안 된다. 타인의 지평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곧 내 세계의 확장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이라면, 고정 불가한 타인의 흐름을 부정하는 모든 것, ‘확고한 신념이나 주장’에 대해 모든 주도권을 내려놓게 된다.
친구가 바닥에 떨어진 돌을 보고 이런 모양의 돌은 흔치 않다며 마음껏 떠들어대고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다. 이제 알겠는가? 인간은 이렇게나 무겁거나 혹은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