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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사슴 Nov 04. 2024

아이에게 배신을 가르칠 것

당근을 먹으면 사탕을 줄게.

 오직 인간의 아이만이 아주 오랫동안 무력하고, 오직 인간의 아이만이 무력한 조건에서도 살아남는다. 아기는 양육자를 맹목적인 사랑에 빠지게 만들어 노예처럼 부리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아이의 생존 능력은 실로 덧없다. 막 태어난 갓난아이는 부모나 공동체의 도움 없다면 24시간 이내에 반드시 죽는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핏덩이로 쓸려 나와 바닥에 툭 내던져지기 전까지, 혹은 그 이후 얼마간의 기간에도 아기는 그저 단백질 덩어리라는 차디찬 과학 용어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는 가능한 한 크게 울기만 한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의 탄생이다.


 아이는 빠르게 자라면서 빨기, 잡기, 찾기, 울음, 시각 및 청각 반응, 신체 움직임 등을 통해 스펀지처럼 세상을 흡수한다. 아이는 단순한 생각과 행동에서 점차 복잡한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능력을 키워나간다. 이때 우리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이 존재와 눈이 마주쳐 기뻐하는 한편, 아이가 자라며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후벼 파고 싸움을 걸어올지 상상하며 침울해진다. 떼쓰고 잡히는 건 뭐든 잡아 던져 분노를 유발할 것이며 성인이 되기 전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나와 이 사랑스러운 존재는 다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이는 원초적이고 파괴적이라는 말만으로 전부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먹어치우거나 부수려는 심보를 보고 있노라면 니체가 "세 가지 변신"에서 왜 낙타와 사자 다음으로 아이를 상정했는지 이해될 것만 같다. 아이는 낙타보다도 꾸준하게, 사자보다도 맹렬하게 사고를 친다. 못 말리는 초인 그 자체다.


 흥미롭게도 아이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바로 이 통제 불가능한 특징 때문이다. 남에게 사랑받고 잘 보이려고 꾸며 낸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사랑스러움이다. 무력하고 돌봐주지 않으면 금방 죽어버릴 게 분명한 존재가 사고를 치고 있고, 그런 아이를 사랑하는 자신의 시선과 행위 속에서 부모는 사랑의 진면목인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깨우치게 된다. 아이를 낳으면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부모를 만드는 것이다.


 이 시기에 유아는 세계를 인식할 수도, 자신과 타인의 구별을 인식할 수도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도에선 상대방에 대한 배려, 분노, 시기, 질투 등의 어떠한 상호작용적 감정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 원초적 두려움이며 이 두려움을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다양한 감정들이 생겨난다. 유아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대상에 대한 통제권이다. 불편함(두려움)을 초래하는 외부 상황에 불만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유아는 세상으로 관찰되는 타인에게 무한정한 환대를 요구하며 통제하려 한다.

 자신이 아이를 돌볼 거라는 걸 알기에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지만, 아이의 세상에서는 신뢰도 규칙도 안전도 없으므로, 단기간의 안정은 아이에겐 순식간에 지나갈 순간에 불과하며 공포가 이어질 것이라고 불안에 떨기 때문에,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이런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정서적인 안정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랑이라 불리는 부모가 주는 감각적인 선물들이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편한 기분이 들기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인 울기를 반복하고 나면 어느새 부모님의 흐릿한 그림자가 다가와 모든 게 다 괜찮다며 흔들어준다. 속삭이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안겨있는 새에 불편하던 기분은 사라지고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여 준다는 안정감을 받는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과 부모와 세상을 인식하며 구분 짓기 시작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가장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덕목을 묻는다면 사랑이라 대답해야 하는 걸까? 그 사랑이란 단어 안에 함축된 여러 가정은 모호하다. 지나친 사랑은 자녀를 나태하게 만들거나 완벽한 아이 증후군에 빠지게 만들 수 있고, 부족한 사랑은 과잉 성취에 찌들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사랑 안에는 존중, 헌신 애정 등 다양한 태도들이 들어있는 것뿐 아니라 그 관계가 그물처럼 얽혀 있어 제각기 분리할 수 없다. 아이를 인정해 주는 부모님의 태도는 존중이라는 태도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라 헌신과 애정에서도 한 조각 이상의 마음을 떼어 왔다.


 중용에 맞게 아이에게 사랑이란 가치를 전해주고 싶다면 부모는 어떤 걸 가르쳐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적절한 배신이다. 사랑은 부모로 하여금 아이가 사랑을 배우도록 하지만 배신은 아이로 하여금 사랑의 다양한 면모를 스스로 깨치게 만든다. 배신은 사랑을 비롯한 긍정적 경험뿐 아니라 부정적 경험과 감정들도 상기시키며 아기를 복합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여기서 "더 나은"이라는 말은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용의 방향으로 성격이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따미는 전에 죽음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이 걸음마를 할 즈음에 죽자, 아이를 둘러업고는 약을 구하러 이 집 저 집을 헤매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떤 현명한 이가 그녀를 붙잡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여인이여, 나는 아이를 살릴 방법을 모르지만, 그것을 아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녀를 붓다께 데려갔다. 슬픔 속에서 애원하는 그녀에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겨자씨를 구해오라. 그것을 아이에게 먹이면 병이 나을 것이다. 다만 겨자씨는 단 한 사람도 죽은 이가 없는 집에 가서 구해와야 한다."

 고따미는 첫 번째 집으로 가서 겨자씨 한 줌을 부탁했다. 집주인이 겨자씨를 주었다. 고따미가 물었다. 이 집에 혹시 누군가가 죽은 적이 있나요. 집주인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고따미는 실망했다. 두 번째 집에 갔다. 이 집에 혹시 누군가 죽은 적이 있나요. 집주인은 그렇다고 답했다. 세 번째 집, 네 번째 집. 다섯 번째 집. 마을의 모든 집을 헤맨다고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실망과 분노와 안타까움과 슬픔 속에서 고따미는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슬픔은 나만 짊어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구나. 나만 아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집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구나. 그녀는 시체 버리는 곳으로 가서 업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차갑게 식은 몸을 끌어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소리 죽여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붓다께 돌아왔다. 붓다께 삼배를 올리고 아무 말 없이 그저 한쪽에 서 있었다.

 겨자씨를 구했느냐. 붓다께서 물으시자 그녀는 그렇지 못하였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대신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말했다. 모든 존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과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붓다께서 고따미의 출가를 허락하자, 그녀는 그렇게 비구니가 되었다.
_<끼사 고따미 이야기>



 스스로 받아들여질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내면 불안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환대가 애착 형성에 필수불가결인 사랑의 특징이라고 한들, 그것만으로 아이를 대한다면 고따미처럼 죽음(부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세가 될 것이다. 부드럽게 제조한 칼날은 무디고 쉽게 부러진다.

 붓다는 고따미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조용히 사람들에게서 배신을 당하도록-기대하던 바와 다른 결과를 맞이하도록- 조언한다. 결국 고따미는 스스로 현실과 세상을 깨닫고 그제야 사람들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기 시작한다.

 사랑스러움만을 잔뜩 받고 자란 아이에게 절망을 주는 법은 간단하다. 사랑을 주지 않는 것,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으레 하는 것처럼 대하면 된다.


 아기는 당근을 먹으면 맛있는 사탕을 줄 거라는 어머니의 거짓말에 속아 당근을 먹지만, 이내 배신당하고 세상의 쓴맛을 경험하며 아름다운 곡예로만 세상이 채워진 건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는다. 이후 상대의 말투, 눈빛, 손짓 등 가련한 몸놀림을 체득하여 이른바 ‘눈치’를 학습한다. 이런 과정은 삶의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람에게서 경험하게 된다.

 이는 배신이란 단어 자체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를 재고해 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중 누구도 배신을 겪지 않은 이는 없다. 다만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게 겪은 게 문제가 된다. 빠른 성장이 멀미를 유발하는 상황은 소중한 이들을 챙길 여유를 잃게 하고 보이는 것들을 흐리게 만든다. 느린 성장은 눈높이를 바꿔 소중한 이들과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을 다르게 인식하도록 한다. 감각의 속도 또한 달라 그마저 슬플 겨를이 없다.


 배신은 경계, 성장, 용서라는 자녀들을 낳는다. 아이들은 스스로 창조한 감정들을 가지고 놀며 그 안에서 하나의 어엿한 존재로 성장한다. 이 세 가지 태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어쩌면 닮았으니 떼어놓을 수 없기도 하다.

 경계는 신뢰 균형에 관한 이야기다. 나르시시스트란 자기밖에 생각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을 일컫는다고 알려졌지만, 정말로 나르시시즘적 경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과 세계를 구분 짓지 못하고 전체의 '나'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명확한 자신의 세계를 확정하지 못했기에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하다. 타자도 '나'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로 인식할 뿐이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말로 건전한 사람은 자신과 타인, 세상을 정확히 구분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타인을 '이해되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덧붙여 이해하려고 시도하면서도 대상을 정의하지 않는다. 타자를 구분 지을 줄 아는 능력은 대상을 사랑하려면 필요한 필수 요소다.

 배신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만의 '경계'를 형성하도록 만든다. 배신을 경험한 아이는 사람을 무작정 믿기보다 신중하게 판단하려 고민한다. 인간관계에서는 신뢰를 주되 경계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성장은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모두 한 번씩은 겪었을 쓰라린 이별의 기억이 돌이켜 어떤 방식으로 내 안에 쌓이게 되는지 생각한다면, 연애라는 행위 안에서 마찰한 너와 내 생각 차이와 가치관과 별 것 아닌 무수한 것들은 일종의 자아 성찰이었다. 배신당한 직후 느끼는 감정은 슬플 정도로 풍요롭다. 아픔, 분노, 슬픔이 하나의 방식으로 떠오르지 않고 맞물려 춤춘다. 감정이 미끄러지는 바닥마다 침울한 눈물자국이 새겨지며 가슴엔 씁쓸한 흉터가 고이고, 아련한 향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쌓이는 채찍질은 자신을 스스로 더 입체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감정을 겪어야만 그 감정을 관리하게 될 수 있는 것처럼 고통은 자아 성찰의 계기가 되어 감정적으로 성숙할 기회를 제공한다. 

 배신은 아이로 하여금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그 과정에는 난색의 감정뿐 아니라 칙칙하고 우울한 감정들도 반드시 마주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용서는 회복과 관용에 관한 이야기다. 배신당한 아이는 의도를 구분하는 능력을 배양하게 된다. '나는 믿었는데 저 언니가 내게 왜 그랬을까!' 이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던 타인의 행동 뒤에 감추어졌을지 모르는 의도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의 자세를 깨우친다. 이것은 타인과 나의 입장을 바꿔 헤아리는 높은 수준의 사고와 더불어 '경계'와 '성장'의 개념도 모두 담는다. 정말로 악의가 담긴 의도라고 생각하면 분노하고, 순수하게 실수로 빚어진 의도라면 개의치 않게 된다. 혹은 악의가 담긴 의도라도 상대의 처지에서 이해된다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배신당한 사람만이 용서의 어려움을 이해한다. 용서와 관계 회복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건, 마치 병든 이가 건강을 찾는 것이나 이별한 이가 절규하는 것처럼 소중한 관계의 신뢰를 잃고 배신당했을 때뿐이다.

 배신은 아이로 하여금 '용서'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아이는 인간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에 대해 극복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며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


 많은 이들이 아이를 배신하는 행위가 크든 작든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온전한 사랑과 관용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예시로 들며, 아이들에 대한 장난을 통해 그들을 존재가 아닌 놀림의 대상으로 '대상화'하는 행태를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아이들을 그저 가십거리나 놀림의 대상으로 인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방송에서 비슷한 퍼포먼스의 강조가 지양되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한다. 예시로 든 방송은 분명 극단적인 사례다(권투 경기를 하던 아버지가 눈앞에서 죽었다고 오해를 하게 하거나, 자기가 먹은 음식 속 소뼈가 아버지의 허리뼈인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는 등). 그러나 작은 수준의 배신은 어린이의 세계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부모가 가르쳐야 할 필수 교육사항이다. 극단적인 방법은 상태를 악화시키기 십상이므로 그 중용을 잘 찾아야 할 것이다. 어른의 역할은 적절한 사랑과 적절한 배신, 언제나 '적절한' 사람이다.


 루소는 교육의 목적이 아이를 인간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 '인간'이란 단어의 정의는 모호해서 모두에게 다르게 이해될 테지만, 인간人間의 '간'자가 사이 간 자라는 점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와의 사이로 존재할 때야 인간다울 수 있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누군가와 사이를 형성하고 또한 사이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가진 관계가 어쩌면 인간의 본질 자체라는 뜻이다. 아이를 타인의 '사이'에 두는 방법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식으로 교육되지 않는다. 아이는 가장 안심이 되는 자신만의 장소를 스스로 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알아야 하는 건 타자와 거리조절하는 법이다. 아이만의 안전거리는 부모도 가르칠 수 없고 알려줄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이기에 아이라는 존재를 하나의 주체로 인식해 존중할 때만 아이는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_랄프 왈도 에머슨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건 어쩌면 사랑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취한 것과 견줄만한 일이다. 아이는 이방인으로서 대우받는 게 아니라 소유물로서 놓이고, 안방 어딘가 부모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일종의 주체성이 제거된 트로피가 된다.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은 오직 부모가 타인에게 자식 자랑을 늘어놓을 때다. 그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노크 없이 들어올 수 없는 자신만의 방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고따미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은가? 죽은 이를 되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고따미 스스로가 죽은 아이를 묻어줄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적절한 배신의 효용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상처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말만이 내게 힘을 갖는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의 미움만이 내게 두려움을 품게 한다. 선함을 전제로 한 배신은 언제나 사랑이 담겨 있으므로 차갑지만 따듯하고, 아프면서도 안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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