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을 먹으면 사탕을 줄게.
고따미는 전에 죽음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이 걸음마를 할 즈음에 죽자, 아이를 둘러업고는 약을 구하러 이 집 저 집을 헤매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떤 현명한 이가 그녀를 붙잡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여인이여, 나는 아이를 살릴 방법을 모르지만, 그것을 아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녀를 붓다께 데려갔다. 슬픔 속에서 애원하는 그녀에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가서 겨자씨를 구해오라. 그것을 아이에게 먹이면 병이 나을 것이다. 다만 겨자씨는 단 한 사람도 죽은 이가 없는 집에 가서 구해와야 한다."
고따미는 첫 번째 집으로 가서 겨자씨 한 줌을 부탁했다. 집주인이 겨자씨를 주었다. 고따미가 물었다. 이 집에 혹시 누군가가 죽은 적이 있나요. 집주인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고따미는 실망했다. 두 번째 집에 갔다. 이 집에 혹시 누군가 죽은 적이 있나요. 집주인은 그렇다고 답했다. 세 번째 집, 네 번째 집. 다섯 번째 집. 마을의 모든 집을 헤맨다고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실망과 분노와 안타까움과 슬픔 속에서 고따미는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슬픔은 나만 짊어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구나. 나만 아들을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집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구나. 그녀는 시체 버리는 곳으로 가서 업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았다. 차갑게 식은 몸을 끌어안고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소리 죽여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붓다께 돌아왔다. 붓다께 삼배를 올리고 아무 말 없이 그저 한쪽에 서 있었다.
겨자씨를 구했느냐. 붓다께서 물으시자 그녀는 그렇지 못하였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대신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말했다. 모든 존재는 언젠가 죽는다는 것과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붓다께서 고따미의 출가를 허락하자, 그녀는 그렇게 비구니가 되었다.
_<끼사 고따미 이야기>
아기는 당근을 먹으면 맛있는 사탕을 줄 거라는 어머니의 거짓말에 속아 당근을 먹지만, 이내 배신당하고 세상의 쓴맛을 경험하며 아름다운 곡예로만 세상이 채워진 건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는다. 이후 상대의 말투, 눈빛, 손짓 등 가련한 몸놀림을 체득하여 이른바 ‘눈치’를 학습한다. 이런 과정은 삶의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람에게서 경험하게 된다.
이는 배신이란 단어 자체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를 재고해 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중 누구도 배신을 겪지 않은 이는 없다. 다만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게 겪은 게 문제가 된다. 빠른 성장이 멀미를 유발하는 상황은 소중한 이들을 챙길 여유를 잃게 하고 보이는 것들을 흐리게 만든다. 느린 성장은 눈높이를 바꿔 소중한 이들과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을 다르게 인식하도록 한다. 감각의 속도 또한 달라 그마저 슬플 겨를이 없다.
경계는 신뢰 균형에 관한 이야기다. 나르시시스트란 자기밖에 생각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을 일컫는다고 알려졌지만, 정말로 나르시시즘적 경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과 세계를 구분 짓지 못하고 전체의 '나'로 인식하는 사람이다. 명확한 자신의 세계를 확정하지 못했기에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하다. 타자도 '나'의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로 인식할 뿐이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정말로 건전한 사람은 자신과 타인, 세상을 정확히 구분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타인을 '이해되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덧붙여 이해하려고 시도하면서도 대상을 정의하지 않는다. 타자를 구분 지을 줄 아는 능력은 대상을 사랑하려면 필요한 필수 요소다.
성장은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모두 한 번씩은 겪었을 쓰라린 이별의 기억이 돌이켜 어떤 방식으로 내 안에 쌓이게 되는지 생각한다면, 연애라는 행위 안에서 마찰한 너와 내 생각 차이와 가치관과 별 것 아닌 무수한 것들은 일종의 자아 성찰이었다. 배신당한 직후 느끼는 감정은 슬플 정도로 풍요롭다. 아픔, 분노, 슬픔이 하나의 방식으로 떠오르지 않고 맞물려 춤춘다. 감정이 미끄러지는 바닥마다 침울한 눈물자국이 새겨지며 가슴엔 씁쓸한 흉터가 고이고, 아련한 향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쌓이는 채찍질은 자신을 스스로 더 입체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감정을 겪어야만 그 감정을 관리하게 될 수 있는 것처럼 고통은 자아 성찰의 계기가 되어 감정적으로 성숙할 기회를 제공한다.
배신은 아이로 하여금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며 그 과정에는 난색의 감정뿐 아니라 칙칙하고 우울한 감정들도 반드시 마주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용서는 회복과 관용에 관한 이야기다. 배신당한 아이는 의도를 구분하는 능력을 배양하게 된다. '나는 믿었는데 저 언니가 내게 왜 그랬을까!' 이전에는 생각해 본 적 없던 타인의 행동 뒤에 감추어졌을지 모르는 의도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의 자세를 깨우친다. 이것은 타인과 나의 입장을 바꿔 헤아리는 높은 수준의 사고와 더불어 '경계'와 '성장'의 개념도 모두 담는다. 정말로 악의가 담긴 의도라고 생각하면 분노하고, 순수하게 실수로 빚어진 의도라면 개의치 않게 된다. 혹은 악의가 담긴 의도라도 상대의 처지에서 이해된다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배신당한 사람만이 용서의 어려움을 이해한다. 용서와 관계 회복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건, 마치 병든 이가 건강을 찾는 것이나 이별한 이가 절규하는 것처럼 소중한 관계의 신뢰를 잃고 배신당했을 때뿐이다.
배신은 아이로 하여금 '용서'할 수 있도록 가르친다. 아이는 인간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에 대해 극복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며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다.
많은 이들이 아이를 배신하는 행위가 크든 작든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온전한 사랑과 관용으로 그들을 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김소영 작가는 TV 예능 프로그램을 예시로 들며, 아이들에 대한 장난을 통해 그들을 존재가 아닌 놀림의 대상으로 '대상화'하는 행태를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아이들을 그저 가십거리나 놀림의 대상으로 인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방송에서 비슷한 퍼포먼스의 강조가 지양되어야 한다는 점은 동의한다. 예시로 든 방송은 분명 극단적인 사례다(권투 경기를 하던 아버지가 눈앞에서 죽었다고 오해를 하게 하거나, 자기가 먹은 음식 속 소뼈가 아버지의 허리뼈인 것으로 오해하게 한다는 등). 그러나 작은 수준의 배신은 어린이의 세계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부모가 가르쳐야 할 필수 교육사항이다. 극단적인 방법은 상태를 악화시키기 십상이므로 그 중용을 잘 찾아야 할 것이다. 어른의 역할은 적절한 사랑과 적절한 배신, 언제나 '적절한' 사람이다.
루소는 교육의 목적이 아이를 인간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 '인간'이란 단어의 정의는 모호해서 모두에게 다르게 이해될 테지만, 인간人間의 '간'자가 사이 간 자라는 점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와의 사이로 존재할 때야 인간다울 수 있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누군가와 사이를 형성하고 또한 사이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인간이 가진 관계가 어쩌면 인간의 본질 자체라는 뜻이다. 아이를 타인의 '사이'에 두는 방법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식으로 교육되지 않는다. 아이는 가장 안심이 되는 자신만의 장소를 스스로 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알아야 하는 건 타자와 거리조절하는 법이다. 아이만의 안전거리는 부모도 가르칠 수 없고 알려줄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이기에 아이라는 존재를 하나의 주체로 인식해 존중할 때만 아이는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_랄프 왈도 에머슨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건 어쩌면 사랑스러운 자신의 모습에 취한 것과 견줄만한 일이다. 아이는 이방인으로서 대우받는 게 아니라 소유물로서 놓이고, 안방 어딘가 부모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일종의 주체성이 제거된 트로피가 된다.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순간은 오직 부모가 타인에게 자식 자랑을 늘어놓을 때다. 그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노크 없이 들어올 수 없는 자신만의 방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고따미에게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은가? 죽은 이를 되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고따미 스스로가 죽은 아이를 묻어줄 수 있도록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