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의 계산은 끝난 셈
사랑에 대해 논할 때는 이유를 모르게 존대를 쓰게 됩니다. 이것은 마땅한 듣는 이가 있고 사랑 앞에선 늘 자세를 낮춰야 하기 때문일까요. 누구나 사랑에 대해서 다 안다는 듯이 떠들지만 실상은 늘 도망치는 무언가에 되려 휘둘리는 까닭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피어난 단상을 포착해 글로 옮겨 적는 것뿐이겠습니다.
소파 한 개 크기의 나라에서 당신은 왕 나는 대통령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지어질 우리의 왕국을 통치하는 방식에 대해 논하며 나는 진지하게 헛소리를 하고, 당신은 진지하게 농담을 합니다. 우리가 공유할 라이프모티프를 천천히 직조하고 서로에게 한 움큼씩 떠먹이고 있는 행위는 꽤 오랜 미래를 준비하려 할 때만 꾸준해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우린 그 과정에서 서로의 세계를 관통하여 돌아오고, 나에 대해 궁금해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랑 접어둔 뒤 당신을, 우선 너를 더 궁금해합니다.
당신에게 "우리는 이미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과연 우리가 싸울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로서는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한 표현이었지만,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당신의 모습은 되려 나를 당황시킵니다. 이 한 폭의 대화가 드라마 같아서 시작과 끝을 조심스레 돌돌 말아 떼어낸 뒤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로도 당신은 나의 언어를 쉽게 이해했고 그것은 삶의 많은 방식을 나와 비슷한 경험과 태도로 임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우리가 중요한 문제에 대해 논하고 상의할 때 자질구레한 대부분의 사안에 불필요한 감정을 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구음으로 내뱉는 소리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대화 중 갑자기 서로가 허공을 바라보며 침묵할 때, 그 침묵이 5분 이상 지속될 때 나는 그 침묵을 엄연한 대화로 인지합니다.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 속에서 각자가 생각거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이 순간은 존중받아 마땅하며 대화에 묻히기 아까운 절호의 찬스인 것이기 때문에 설명하기 이전에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이 '생각모드' 표정을 지을 때 나는 적절한 시간을 내어준 뒤 무슨 생각을 했었느냐고 질문합니다. 또한 당신도 내게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청순과 섹시의 우선순위에 대해 열심히 논하는 등, 쓰잘데기 없는 모든 것에도 열과 성을 다하는 사이입니다. 다행이라면 사사로운 논제를 포함한 대부분의 대화 주제가 취향이 같으므로 피를 방불케 하는 설득 경쟁은 없어도 된다는 것. 조금만 더 섹시에 대해 논했다간 인간의 금기에 대한 정의까지 뽑아낼 뻔했습니다. 포니테일의 수요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철의 의지를 표하기 위해.
우리는 동시에 청순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했지만, 나는 당신의 청순함만큼 섹시함 또한 지극히 흠모합니다. 신체적 섹시함도 물론이거니와 그 겉치레에 불과할 눈과 코와 입과 웃음에서 당신의 진심을 느끼고, 얼굴과 뇌를 통과해 돌아오는 너와 나의 대화에서 광활한 섹시함을 느낍니다. 당신과 엘레베이터에 탄 뒤 대화에 여념이 없느라 5분가량 버튼을 누르는 걸 잊더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당신과의 대화는 시공간 개념을 지웁니다. 이런 걸 할 수 있는 건 섹시함의 무시무시함 뿐이겠지요.
당신을 소개할 때 어떤 사람으로 묘사할지를 상상하는 걸 즐깁니다. 혼자 있는 모든 시간에서 관측되는 물체들의 운동은 섬찟 당신의 움직임처럼 느껴지고, 별안간 나타나 말을 거는 것만 같아요. 그건 만들어진 환상에 가까워 현실의 당신을 마주하는 것이 겁나는 순간이 분명 존재하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때 비추는 햇살과 적당한 온도, 습도를 느끼고 있노라면 그다지 현실과 멀지 않다는 사실이 나비처럼 포근하게 다가와 안심시킵니다. 당신은 이미 내 주변에 만연해 있는 모든 것이라고 설명해도 이상하지 않은 기분입니다.
이런 마법 같은 순간과 감각적인 경험이 지나간 뒤 느껴지는 불안감은 여전히 현실을 바라보려는 본능에서 비롯되어 "이건 콩깍지야. 금방 시들시들해져 버리고 말 걸." 하며 두근두근한 마음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언제나 같은 실수로 연애를 반복하는 인간의 삶에서, 어쩌면 경험된 모든 것들은 표현하지 않을 뿐 이미 경험된 무언가로부터 파생된 것들이지 않나요. 찌질한 마음은 어떻게든 잡초처럼 무작위적으로, 빈틈없이 피어납니다.
설렘과 두근거림은 그에 상응하는 불안감을 늘 데리고 다닙니다. 겁쟁이는 작은 행복마저 두려워하기 마련이므로 너무나 아팠던 이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안 아프게 맞기 위해, 행복이 시작됨과 동시에 끝을 상상하는 건 내 슬픈 버릇입니다.
즐거운 대화가 그 크기만큼 부담이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함박웃음을 한동안 짓고 나면 턱과 귀의 연결부가 심하게 당기는 피로감이 몰려오는데, 이후로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고통이 밀려오기 까닭에 어느 정도라도 감정에 취약해집니다. 취약함의 빈틈은 불안의 싹이 들어차기 좋은 너비라 스멀스멀 안개가 깔리듯 자욱하게 피어오릅니다. 그것은 몹시 불쾌한 기분이 들어서 극복하지 못한 과거의 망령처럼 무의식을 좀처럼 풀어주질 않는 듯합니다. 이 부분은 당신께 꾸준한 도움을 좀 받아야겠습니다. 현실의 벌레는 내가 잡을 테니 내 마음의 벌레는 당신이 처치해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에게 꽃다발을 선물했습니다. 리시안셔스를 메인으로 안개꽃, 장미, 유칼립투스를 조합한 꽃다발은 각자의 꽃말을 억지로 조합한다면 "죽을 때까지 변치 않고 사랑하겠어요."라는 의미가 됩니다만,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되길 바란 유일한 의미는 '변치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발적으로도, 우연적으로도, 또한 노력으로도 시작될 수 있는 모호한 태도이며 따라서 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당신을 보고도 설레지 않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과 다툴 것이고, 언성을 높이기도 할 것이며, 그 누구보다 밉고 성가시다고 생각할 때가 올 것입니다. 늦으나 이르나 그런 순간은 반드시 옵니다. 그때에 오해하지 않겠습니다. 권태를 사랑의 상실로, 미움과 분노를 사랑의 반대급부로 해석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할' 것입니다. 성숙한 사랑의 모습으로 책임을 다하고 극복하려 변치 않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게 내 다짐이고 의지였으며 당신께 건넨 의미였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저자 밀란 쿤데라는 두 주인공 연인이 키우는 개를 필두로 한 이야기에 오십 페이지가 넘는 장을 할애합니다. 개의 이름은 카레닌, 매일 반복되는 삶에서 권태를 느끼지 않고 같은 시간에 나가는 산책, 같은 종류의 간식, 같은 생활방식과 패턴을 죽기 전까지 온 힘을 다해 행복하게 즐기는 강아지입니다. 나는 이것이 인간만이 가진 고집스러운 '해야 한다'의 개념을 크게 흔드는 지진으로 다가왔습니다. 인간의 불운은 자신이 직선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데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카레닌처럼 하루하루를 즐겁게 반복해서 살 수 있다면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삶인 건 아닐까요? 동물이 원형의 시간을 사는 것처럼 인간이 시간을 의식할 수 있다면 우리가 불안에 떨 필요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당연히 난 그런 삶을 완벽하게 살 수 없습니다. 발전하는 성취감에서 오는 자기 효능감과, 의미를 발견하고 섭취해 성장하는 기쁨은 반복되는 잔잔한 행복과 전혀 다른 종류의 행복이어서 사랑이 주는 쾌락만큼이나 뇌를 자극합니다. 이건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이런 무용한 형태의 삶도 있다고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변치 않는 사랑을 의미하는 리시안셔스를 담았던 것입니다. 반복되는 직선의 시간 속에서 점차 사그라들 사랑의 의지를 힘껏 걷어차버리고, 힘으로 철사를 꼬듯 억지로 시간을 반복되는 원형으로 만들어서라도 꾸준히 당신을 사랑하는 태도를 고수할 것이라고, 늘 행복한 것만이 아니어도 반복되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슬픔, 우울, 불안, 권태의 감정들을 다시금 마찰시켜 기쁨, 행복, 흥분, 황홀함, 격정, 애정의 감정들을 맞이할 것이라고.
당신이 좋아하는 만큼 당신의 일에서 뿌듯함과 발전을 이루며 행복하길 바랍니다. 다만 나와 함께하는 시간은 무용하다는 걸 미리 고지하고자 합니다. 사랑이란 비효율적이라고 자주 떠들곤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사랑은 객관성을 논할 수조차 없는 무언가입니다.
포옹할 때 우리의 몸은 하나로 합쳐져 분리할 수 없는 객체가 됩니다. 포개진 그림자를 두 개로 떼어낼 수 있나요? 사진에서 둘을 정확히 분리할 수 있는가요? 꼭 껴안은 두 연인 중 나만을 잘라낸다고 할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라낼 수 있을까요. 내 표피? 손톱? 옷가지 위? 옷가지에 붙은 연인의 옷과 혹은 표피도 순간만큼은 나의 일부가 된 것이 아닌가요? 이 철학적 명제는 '테세우스의 배'에 측량기를 들이댈 수 없는 것처럼 효율을 측정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로써 증명될 수 없는 주관성의 위치에 놓인 두 연인의 포옹은 객관성을 논할 수 없기 때문에 증명의 도마에 오를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될 수 없는 선 바깥에 서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포옹은 실증성을 지우고 그 경계의 바깥에 연인을 세웁니다. 그래서 어떠한 효율도 정도도 측정할 수 없는 가치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손을 잡고 지하철을 타던 중 깜빡 졸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시에 졸았고 지하철의 흔들림과 공명하며 고개를 기웃거렸습니다. 두 손으로 당신의 손을 꼭 잡고 있자니 별안간 감각이 사라지고 내손과 당신의 손이 동시에 사라집니다. 손을 움직여 그대의 손등을 만지작거렸음에도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 손은 순간 당신의 손과 하나가 되었고 몽롱한 상태에서 마치 합일을 이룬 것처럼, 신경계가 뜰의 바깥으로 한 발 전진한 것처럼, 나무와 나무가 뒤엉켜 서로의 생채기가 맞닿게 되는 것처럼, 손의 감각이 그대 안으로 흘러 들어가 손을 놓은 건지 잡은 건지도 느껴지지 않는 취한 감각이 뇌를 지배했습니다. 진심으로 그 순간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소파에서 시간이 가도록 당신과 노을빛에 젖어 언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더라도 기뻐할 겁니다. 함께할 순간을 측량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사랑을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의 계산은 끝난 셈입니다.
하루에 수백 수천만의 깨물 거림(Byte)의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에 연연하지 않았던 바 당신은 나와 눈을 맞추고 있을 때 그 부족한 바이트를 채우려는 듯 내 표피를 깨물곤 합니다. 보이지 않을 때 상상하고, 보일 때 온 힘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딱 알맞으며 좋아하는 방식이니 근사한 일입니다.
그녀는 식빵의 가장자리나 피자의 도우 등 무엇이든 가장자리에 있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습니다. 내 표피를 깨물어 먹으려는 것도 나를 사랑한다는 의미로, 그런 나의 바깥 부분을 먹어치우겠다는 심리로 이해하려 합니다. 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사랑받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하이데거는 "사랑하는 이는 연인을 먹어치우려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존재론적 탐구 속 사랑의 본질을 깊이 보려는 과정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물리적, 감정적 소유에 그치지 않고 존재의 깊은 차원을 욕망할 때, 연인의 존재를 집어삼키려는 욕망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녀는 나를 점점 더 갈망하고 내 존재를 필요로 하는 걸까요. 혹은 그냥 참을 수 없이 나를 깨물고 싶은 것뿐일까요. 정답은 아무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그녀의 목소리는 손님이 들어올 때 알바생의 목소리가 응대용으로 다르게 발음되는 것처럼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묘하게 긴장되는 기시감을 느낍니다. 그다지 나쁘지 않아서 오래 두고 볼 일입니다. 내 빈틈에 따듯함을 찔러 넣어 주어 고마움을 느낍니다. 기억나지 않은 틈은 무릇 추울 일도 없더만 기어이 따듯함 채워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홀가분해지고 피어나는 꽃들이 더 가는 틈을 잔잔히 채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