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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 사슴 Nov 25. 2024

노력 없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꽃을 꺾거나, 물을 주거나.

 사랑은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걸까? 많고 많은 인간들의 연애사에서 사랑의 시작은 필연보다는 우연으로, 그러나 그들 각자에게는 필연으로 느껴지는 불꽃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연처럼 느껴지는 우연이 사랑을 촉발한다는 말은 우리가 만나게 된 이유가 단지 환경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말이기도 하기에, 듣기에 썩 좋은 말은 아닐지라도 사랑의 생명을 더 길게 만들기 위해 생각해 볼만한 일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왜곡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는 종종 상대방을 이상화하며, 상대의 결점이나 한계를 보지 않으려 하고, 사랑하는 대상에게 그 사람이 실제로 가지지 않은 특성들을 투영한다. 실제로 특별하지 않아도 특별하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인격을 창조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는 인형에 불과하다. 진짜 인간과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게 만들지만 우린 그 인간에 인형을 투영시키며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한다. 요지는 사랑은 우리 안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매미 유충이 땅 속에서 몇 년을 지내는 것처럼 사랑은 가만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가 사랑할만한 대상이 나타나면 감정을 불살라 반응하도록 만든다. 이때 반응하는 대상은 환경에 의해 우연적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여성이 많은 곳에서 자란 남성은 자신의 사랑을 투영시키기 위해 여성들 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판별하려는 비교의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함부로 자신의 이상을 투영시키지 않는 안목을 길러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매우 적은 곳에서 자란 남성은 여자이기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이상을 투사한다. 태어나 자란 주변 환경에 얼마나 많은 이성이 있었는가가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관계를 크게 좌우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만약 환경이 달랐다면, 우리가 지금 사랑 중인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근대적 연애관점에서 이런 말은 "나를 욕하세요!"나 마찬가지인 헛소리처럼 들릴 수 있겠다. "내 옆의 사랑스러운 영희가 아니라면 누구도 내 짝이 아니야!" 같은 소리는 사실 내 옆에 미소가 있었더라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는 충격적인 해석 말이다. 

 이런 견해는 사랑의 특수성을 제거하고 나름의 희망을 부여하는데,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 어떠한 노력으로 시작될 수 있는 무언가라는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정말로 특별해 보이는 그(그녀)가 나를 사랑할 리가 없잖아.'라는 생각은 노력 앞에서 침몰하고 이후 열리는 가능성은 우리를 더 부단한 사람으로 만든다. 사랑은 분명 어렵지만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행동 패턴이므로 노력을 기울였을 때 못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을 노력으로 이어낼 수 있는 경우는 다음의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상대가 필연이라 여길만한 각종 우연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할 수 있다. 나의 영역에서 내가 최고가 되는 것처럼, 경쟁자가 날뛸 수 없거나 나만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해 놓는다면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진다. 두 번째는 상대의 이상을 투사받을 수 있을 만큼의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형편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상을 투사하는 사람은 드물고, 괜찮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본적 가르침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 않는가. 이 두 가지 경우는 당연하게도 노력이 수반되며 사랑의 시작 이후에도 마찬가지로 노력과 사랑은 긴밀하게 연결된 상호협력조약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은 길가에 핀 꽃을 보고 아름답다며 꺾어가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길가에 핀 꽃을 보고 아름답다며 물을 주는 것이다. "다이스키"와 "아이시떼루"같은 언어적 차이를 넘어 함의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다. 사랑의 개념은 보살핌과 아낌의 태도를 담기 때문에 가벼울 수 없는 막중한 것, 우리는 남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사람을 보고 그를 좋아한다 말할 수 있지만 그를 사랑한다 말하기에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게 '사랑한다'의 무게감이다.


 이처럼 두 표현의 차이에는 노력의 유무가 있다. 책임, 의무, 보살핌, 아낌 등의 노력의 일체가 깃들어야만 우리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꽃을 꺾는 것보다 꽃에 물을 주며 보살피는 게 몇 곱절은 더 어렵다.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꽃의 언어를 듣고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해 가진 것 중에서 가려내어야 한다. 우리는 바라보는 대부분의 물건, 사람을 보고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사랑한다고 하기엔 방지턱처럼 걸리는 무언가가 있다. 가끔 꺼내보는 지갑 속 가족사진처럼 무거워야 하는 게 사랑이다.

 '좋아하는 것'이 가볍게 쓰인다고 해서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좋아함의 개념에는 '우연적으로도 가능하다'는 명제가 들어있다. 노력으로도 이루어질 있고 환경적 우연성에 의해서도 촉발될 있는 좋아함의 속성과 다르게 '사랑하는 것'은 우연적으로도 이어질 없고, 노력 없이 이어질 수도 없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에는 다리와 터널이 있다.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바위로 꽉 막혀있는 공간을 '뚫는' 것이다. 다리는 우연적인 일로도 그 역을 충실히 해내는 형태로 만들어질 수 있다. 가령 쓰러진 나무가 두 공간을 잇는 다리가 될 수도 있고, 장식용으로 걸어둔 끈을 타고 곤충들은 높은 공간을 가로질러 가기도 한다. 하지만 터널은 의도적으로 파내어야 하는 노력을 요구하는 구조 형태다. 우연한 사건이나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완전한 상태의 터널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아함'은 다리로서 연결된 연인 간의 관계를 의미할 수 있고,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내 모습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며' 더하는 식으로 완성된다.

 '사랑함'은 터널로서 연결된 연인 관계를 의미할 수 있고, 상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내 불만들을 하나하나 '파내어' 빼는 식으로 완성된다.


 연인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신념을 하나하나 제거하고, 대상을 재단하지 않고, 내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즉, 있는 그대로의 연인을 긍정할 때라야 우리는 사랑하는 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당신이 사랑스럽다"는 말은 상대가 내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내 못난 모습을 보고도 그게 뭐 대수냐며 있는 그대로 긍정해 줄 때 하는 말이다. 결투에서 승리했을 때만 안아주는 아내가 아니라, 결투에서 패배한 초라한 모습조차도 고생했다며 안아주는 아내의 모습이 남자들에게는 더 사랑스럽다고 표현될 것이다.


 이런 사랑의 모습을 보면 사뭇 일방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상대가 내게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희생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만 같아 쉽게 이입할 수 없다. 내가 상대에게 바라는 걸 포기하는 만큼 상대도 내게 원하는 걸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가? 혹은 상대가 내게 원하는 만큼 나도 상대에게 원하는 게 타당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런 태도는 사랑을 거래가능한 화폐단위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다. "그가 내게서 10만 원에 해당하는 선물을 받으면 똑같이 10만 원어치의 사랑을 줘야 한다." 이런 사회의 담론들은 사람들을 피곤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주고받는 모든 감정적 교류에도 가치를 부여해야만 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상대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대가 이유 없이 잘해주면 분명 구린 무언가가 있다는 말은 하면 할수록 그 사회 안에서 진실이 된다. 불신을 좀먹고 자라는 의심은 반드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사랑은 생각보다 일방적이지 않다.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말은 남루한 선동문구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포함한 세계를 사랑한다. 따라서 세계 안에 속한 스스로도 사랑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단순히 자기애가 넘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내면에 가진 사랑 그릇은 채워지지 않으면 주기적으로 우울을 배달하고, 각종 신경증을 유발하며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신경증은 사랑받으려는 욕구의 발현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이는 자신의 그릇에 사랑을 스스로 채움으로써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고, 바로 그 방식으로 매력적으로 보인다. 우울하고 불안에 떠는 이보다 당차고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이가 사랑스럽게 보이는 까닭은 이미 그 스스로 사랑 그릇을 가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사랑하려는 노력이 가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스스로 사랑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연인에게 헌신하기도 하고 상처입기도 하면서 내면 안의 사랑그릇을 반드시 타인을 통해서만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면 사람은 훨씬 입체적이고 단단하게 조각된다. 무게감 있는 사랑은 애인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큰 선물을 가져다준다.


 지금까지 설명한 사랑은 이로운 만큼 무척이나 어려운 것만 같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쳐도 어렵기만 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사랑은 찾아 헤매기 이전에 이미 주변에 만연해 있다. 내가 창조하기 전부터 이미 삶에 들어와 있으며, 사랑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곁에 와 있다.


사람은 준비동작 없이 물에 빠지면 당황하여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다. 그러나 물이 이미 주변에 있음을 인지하고, 충분한 준비 운동을 한 뒤, 천천히 물에 들어가는 행위가 있다면 곧잘 익숙한 자세로 수영 자세를 취한다. 몸을 뒤집어 도전적인 자세도 취해보고, 태양빛을 느끼며 여유롭게 물 위에 둥둥 떠있기도 한다.

 준비동작 없이 물에 빠지는 건 곧 '사랑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물에 빠져버린 것처럼 도무지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마음처럼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갑자기 마주한 사랑은 결국 자신을 다치게 한다.


 사랑에 빠지는 게 나쁜 것은 아니다. 당연히 모든 이끌림의 시작에는 약간의 향신료와 스타터 부스트팩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오빠 변했어."라는 말을 빨리하게 할수록 건전한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_다니엘 투 랄부

오히려 빠르게 미적지근 모드로 돌입할수록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하기에 좋은 환경이 될 수 있다.

 사랑의 가치는 일발적 감정이 아닌 세상을 대하는 태도로써 나타난다고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이미 사랑은 발견하기 전부터 주변에 싹으로 자라 있고, 그 결실을 맺게 하는 건 오롯이 내 태도에 달렸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사랑에 빠지더라도 오랫동안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이미 주변, 사람이, 세상이 사랑스럽다는 걸 아는 사람은 타인이 주는 사랑에 목말라하지 않고, 금방 적응해 파도를 탄다. 이성에 크게 연연하지 않을수록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의 태도에 이미 사랑스럽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빠르게 미적지근한 태도로 변하는 게 무조건적으로 좋다는 건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태도와 무관심은 구분되어야 한다. 모든 건 100%가 없이 어떠한 경향성 정도로만 설명될 수 있고, 사랑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러해서 정의하려는 순간 파랑새처럼 도망가버릴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사랑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주변에 와 있는 그를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미 자신의 미래에 참가시켰다. 내 모든 선택, 시선, 행동 속에 이미 존재한다. 물건을 살 때 그 사람이 좋아할법한 디자인을 한 번 더 쳐다보고, 닮은 물건을 보면 가슴 한편이 따듯해지며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어디를 갈지, 어떤 걸 할지, '하고 있는' 모든 행위와 생각 속에 그는 '이미 와있'다.

 오래 사랑하고 있는 이도 그렇다. 싸운 뒤 한창 서먹서먹하더라도 그가 좋아하는 과자 앞에서 멈칫한다. 미우나 고우나 물건은 두 개씩 집는다. '그래도 어쩌겠어. 바보 같다고 생각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미래의 옆자리를 비워두고 싶다. 자립하기 위해 그이가 없더라도 우뚝 서 있는 내 미래를 천천히 생각하되 그렇다고 주변을 꽉 채워놓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꼼꼼한 성격에도 그가 조언해 줄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 두고 싶다. 혼자 충전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더라도 의자 한 개를 더 두고 싶다. 예쁜 디자인의 머그잔이 보이면 필요 없어도 두 개를 사고 싶다. 혼자 살기엔 부족함이 없어도 언제나 타인을 들일 수 있는 삶의 태도를 취하고 싶다. 서로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 연인을 닮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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