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흰색이 품고 있는 무한함만큼이나 한기가 서려있기 때문이다. 이불을 걷어낼 때 들리는 부스럭거림은 깊은 겨울잠을 자는 생명들의 태동하는 소리만큼이나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햇빛은 무한한 블랙홀인 흰 눈에 시선을 주입해 화를 잠재우고, 잠든 생명들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주며 아침을 깨운다. 대설 주의보와 함께 강렬한 첫눈이 내리던 날 익숙하게 두 다리로 걷던 산책로를 네 개의 바퀴로 이동하는 방식으로 그들에게 예를 표해야 했다. 자주 가던 카페의 창가에선 하릴없이 흰색의 풍경만이 비쳤는데, 그것은 미술관에서 한 그림에 빠져 버렸을 때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는 어떠한 영상처럼 보이는 것이어서 넋 놓고 예술을 감상하듯(자연과 예술은 구분 지을 수 있는가?) 관찰했다. 보상으로는 흰색 장미 네 송이가 주어졌다.
그러한 모든 주변은 내 안의 어떤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명상은 앉아있는 나의 몸 전체가 아니라 몸이 앉은 의자 일체, 어쩌면 그 공간 일체와 함께 심장 리듬에 맞게 춤을 추는 방식으로 구현됐다. 나와는 눈도 마주치고 있지 않은 카페 사장님의 꽃가지를 잘라 다듬는 행위가 보이지 않게 중첩되어 연결된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것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고 누군가 얘기한다면, 그 반대로 일정한 한 단락의 패턴마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주장하지 못할 이유란 무엇인가? 한 번뿐인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할지라도 그 한 번뿐인 삶에서의 행동은 한 번 뿐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어떠한 성찰이나 전달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욕실에 걸려 있는 수건과 샴푸통의 색이 똑같이 검은색이고, 온수를 틀면 곧바로는 따듯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묘한 연관관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혼자만의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뜨거움은 차가움을 통해서만 수도꼭지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한 때는 뜨거웠을 수도관 속의 물은 분출되지 못한 채 관 속에 머무르는 순간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차갑게 식어간다. 식어가는 것에 모자라 주변의 온도에 힘껏 자신을 맞추고, 이어서는 이것이 마치 자신의 역할이라는 듯 비열을 고수하며 변화에 무덤덤한 태도를 내보이는데, 이것은 물이 늙어가는 것을 제스스로 인정하는 묘한 모습이다.
이런 주변 모습에 집중하고 나면 보이는 것은 그 모든 불투명한 빛에 반사되는 스스로의 모습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탐구하는 내면은 진정으로 독립된 주체로 존재할 수 없는 듯하다. 검은색 수건에 반사되는 가시광선은 내 모습을 담지 못하지만, 이 검은색이 자세히 보고 있자니 실은 조금 어두운 회색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나는 단지 이 정도 채도의 수건을 검은색으로 인식하는 사람이구나를 알게 된다. 수건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통틀어 주변 모든 사물들이 나의 잠재성을 일부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변기의 비데 설치 여부가 타인이 나를 이해하는 주 매개가 되기도 한다는 걸 가정했을 때, 자신이 생산해 낸 이미지는 나의 주변 오브제들로 인해 도저히 제어할 수 없을 때까지 재생산된다.
지난봄이 유난히 추웠던 이유는 모르는 여성에게 걸려 온 전화가 어떠한 야릇한 가능성을 품은 것 때문이 아니라, 단지 긁은 차에 관한 배상을 논했기 때문이고, 그 사건으로 하여금 내가 가진 확신이란 얼마나 우수 어린 불안만큼이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기만을 관찰한 내 최초의 시도였으며, 타자로부터 촉발된 사건이기에 수동적인 형태를 취했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가해자)가 나(피해자)의 선생님 역을 행했다고 볼 수 있었다. 노예주인 변증법만큼이나 유쾌한 테제의 역설은 가해자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이질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나는 그날 나의 세계를 부숴주었음에 감사했다.
자기기만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기분은 언짢음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 그것은 항상 슈트를 멀끔히 차려입고 넥타이를 동여맨 뒤 반짝이는 구두 한 켤레를 발에 꼭 맞게 끼워 넣고는 머릿결을 정돈하는 남자가 거울 앞에 섰을 때, 뚱뚱한 초고도 비만의 머리가 다 까진 수염 가득한 아저씨의 모습을 당당히 보여주고는(슈트는 거의 터지기 직전이다), 당황하며 부정하는 모습에도 이게 진실이라며 거울 속의 뚱보와 악수를 시키는 것과 같다. 왼손과 오른손이 악수하는데 어찌 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차라리 그 반대 격인 <아이 필 프리티> 속 르네라면 어떠했을까! 부끄러움의 온도는 내게서 또 하나의 인격을 탄생시키는데, 그것은 창조보다도 발견의 영역에 속해 있어서 '낳는' 것보다도 캥거루가 새끼를 다루는 방식처럼 '꺼내는' 형식이었으며, 그러면서도 낳는 것만큼의 고통을 취하는 척 표정을 찡그려야 했다.
그 인격은 살아 움직여 글이 된다. 유일한 자기 확신이 무너지면 안쪽이 텅텅 비는 공허한 공간이 되어서 들어오는 뜨거움 혹은 차가움의 물줄기를 모조리 수용할 수 있게 되는데 그 공허함이란 검은색이나 흰색이 아닌 회색빛의 속성이라 빨아들이지도, 방출해내지도 않는 것이었다. 언젠가 회색 인간에 대해 킥킥대며 웃었던 고리타분한 기억의 실체가 무한히 넓게 펼쳐진 지평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정표가 되었다는 사실은, 쓸데없을 모든 돌멩이를 주워 담고 싶다는 욕구를 자극하기까지 이른다.
글을 쓰는 또 다른 자신은 글로 하여금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를 분리시키고, 별안간 글이나 그림이나 그리움이 그러한 것처럼 마음을 긁어낸다. 문학적 선전은 자신만의 목소리와 선율을 찾으라는 명령을 가하고, 그 안에서 어떤 문장이 나인가 하는 물음과 지속적으로 마찰한다.
나는 절대 소크라테스가 될 수 없지만, 타인을 소크라테스로 만들 수는 있다! 타자의 반응으로(돌멩이는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내면을 여실히 탐구하는 행위는 방구석에 박혀 텍스트만 재독 하는 이보다 두 걸음 앞서나가 스스로를 마주시키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물음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는 질문이 때로는 더 깊게 자신을 파헤치는 질문이 된다.
타자는 내 가능성을 일부 포함한 채 살아가고, 마찬가지로 나 또한 타자의 일부가 되어 그들에게 잠재적인 영향을 끼친 채 살아간다. 그러나 모두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밑근거로써 이러한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물 속에 잡힌 물고기처럼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그들에겐 할 수 있는 생각의 선택지가 하나뿐이다). 이제는 차디찬 수도관 속 물도 깨달아야 한다. 자신 주변에 산재한 차가움의 속성이 물의 고유함을 침습하여 자신도 어쩔 도리 없이 차가움의 가면을 쓰게 되었음을.
결국 글이란 타자가 내 마음속 옷걸이에 걸려 있는 인격을 건져 올리고, 그 인격이 꺼내짐에 감사하며 보내는 찬사다. 고유 인격이 품에 간직했던 깨달음의 언어를 방출할 때 나오는 열에너지는 사람을 성장시키는데, 이모습은 눈이 햇빛에 녹는 것과 같아서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쌓아 올릴 수 없는, 말하자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형태로 녹아들어 간다.
그것이 글을 쓰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더 다양한 언어로, 더 다양한 상황에서, 그물 밖의 물고기처럼 유영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 낚싯대를 깨물고 단어들을 꺼내 올리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 표현되지 못한 단어들은 마음속에서 우글대고 그들을 마주할 때라야 글은 살아 움직여 인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