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다음 주 10일, 나는 폴란드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유럽의 여름은 휴가철로, 우리나라처럼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난다. 특히 바닷가와 맞닿은 휴양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름난 관광지를 따라다니다 보면, 말 그대로 '인산인해'의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이탈리아 나폴리 인근의 포지타노다. 절벽과 해안이 어우러진 이 마을은, 기차로 소렌토나 살레르노까지 간 후 다시 배나 버스를 갈아타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나는 한여름 극성수기인 8월, 포지타노를 찾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정해진 시간에 버스를 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자칫하면 예약해 둔 기차를 놓칠 뻔했다. 결국 배를 이용해 가까스로 도착했지만, 그곳은 그야말로 인파로 숨 쉴 틈조차 없었다.
절벽을 따라 빼곡히 들어선 상점과 식당, 그리고 그 너머의 작은 해변마저 사람들로 가득했다. 식사 가격은 평소의 두 배. 익숙하지 않은 이국의 음식에 그런 가격을 지불하는 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결국 밖에서 먹는 조건으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작은 가게를 찾아냈고, 일행과 함께 계단에 앉아 점심을 해결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의 풍경이 눈앞에 생생하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함께 사는 콜롬비아 친구 아벨미가 자꾸 잔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번 병원 진료를 권했지만, 그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보험이 없거나, 병원비가 걱정돼 망설이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퇴근길에 목도리를 두르고 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걱정이 커졌다. 결국, 최근 이사 온 나이지리아 출신의 의과대학생 피우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의사 수련과정을 밟고 있는 피우스는 아벨미의 증상에 대해 듣고, 자신도 걱정된다고 했다. 그래서 아벨미가 퇴근하면 함께 이야기해 보자며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날 밤, 11시 반이 지나서야 아벨미가 퇴근했다. 우리는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다가, 피우스가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며 조심스럽게 병원 진료를 권했다. 아벨 미는 자신의 증상이 단순한 알레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피우스는 자신의 알레르기 약을 며칠 복용해 보되, 호전되지 않으면 꼭 병원을 가자고 권유했다.
피우스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혹시라도 감염성 질환이라면, 함께 사는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어요.” 그의 진심 어린 걱정에 나도 안도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음날 폴란드로 떠날 준비에 몰두하느라, 아벨미의 건강을 미처 살필 여유가 없었다. 피우스가 있으니 알아서 잘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폴란드에서 돌아온 밤, 피곤에 지쳐 그대로 잠이 들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들려온 기침 소리가 나를 깨웠다.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자주, 더 깊이 기침을 하는 아벨미의 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 기침 소리는 단순한 알레르기라고 보기엔 어딘가 불안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고, 그사이 임차인 톡방에 메시지 알림이 올라왔다. 피우스와 아벨미가 몰타 대학병원에 함께 가 진료를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한 진료조차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폐 관련 질환을 확인하려면 X-ray 촬영이 필요한데, 그것조차 별도의 예약이 있어야 한다는 것. 더욱 당황스러운 건, 성인이라면 병원에 반드시 혼자 가야 한다는 병원 원칙이었다.
피우스도 몰타 병원의 시스템에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아벨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X-ray는 어떻게 찍는 거야?”
그 순간, 나는 문득 아벨미가 태어나서 한 번도 X-ray 검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국이라면 내과 진료 접수만으로도 당일 촬영이 가능한데, 이곳에서는 기본적인 진단조차 이렇게 복잡한 것이다.
몇 달째 이어진 그의 기침은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내가 들은 마지막 기침 소리는, 마치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였다.
혼자 타지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살아가는 그가, 만약 중병에 걸린다면 누가 도울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가 조속히 진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길, 더는 기침 소리에 잠을 깨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낯선 나라에서 아벨미가 외롭지 않기를.
함께 사는 이로서, 그리고 같은 이방인으로서...
나는 조용히 그의 회복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