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낯선 곳에서 익숙해지는 법

세상의 주인 되기

by Jay Kang

평일 내내 공부로 지친 몸과 마음이 금요일 수업이 끝나자 한결 가벼워진다. 주말이라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선배, 전 ○○ 여사님의 제안으로 마지막 여름을 기념하기 위해 바다에 가기로 했다. 물론 수영을 할 생각으로 수영복도 챙겨 학교에 나섰다.


그런데 웬일인지 1층을 나서자마자 가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확인해 보니 오늘부터 비 소식이 있다는 예보다. 지중해에 둘러싸인 몰타는 날씨가 자주 바뀌는 편이어서, 그냥 예정대로 준비물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금요일이긴 하지만 수업은 오히려 집중이 필요한 날이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수업에 임했다. 우리 반 선생님은 Dianne이라는 분인데, 연세가 있으셔서인지 학생들을 세심하게 챙기고, 특히 듣기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해 여러 번 반복해 설명해 주신다. 덕분에 일상 대화는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수업은 교재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다이앤 선생님은 자주 사회비판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아마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고 이곳에 오래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엔 이 나라를 잘 몰라 비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1년 가까이 살다 보니 한국과 비교하여 부족한 점도, 반대로 좋은 점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수업이 끝난 후 우리는 예정대로 바다로 향했다. 처음에는 전 여사님이 Peter’s Pool에 가자고 했지만, 너무 멀고 교통도 불편하며 수영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데다, 어린 학생들이 다이빙하기에 좋은 장소라는 내 말에 신경이 쓰였는지 결국 북쪽의 Popeye Village로 목적지를 바꿨다.


Popeye Village는 어린 시절 만화에서 보던 뽀빠이 마을을 재현한 곳이었다. 여름의 끝자락이지만 관광객이 제법 있었다. 입구에서 한국에서 여행 온 부부를 만났는데, 그들은 “18유로를 낼 정도의 관광지는 아니다.”라며 솔직한 평가를 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입장하지 않고 근처 언덕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며, 바위 해변에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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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에서 오래 살면서 바다를 자주 봐 왔지만, 바다는 언제나 시원하고 청명하다. 저 멀리 고조섬이 보였고, 깎아지른 절벽은 정말 장관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영국에서 온 부부도 만나 대화를 하면서, 버스 안에서는 말이 조금 많았던 탓에 옆에 앉은 한 사람이 살짝 웃는 표정을 지었다. 몰타 사람인지 물었더니,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왔다고 한다.


지난번 폴란드 여행 후 헝가리를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헝가리에서 왔다니 괜히 반가웠다. 헝가리에 꼭 가보고 싶다고 말하자, 그 사람은 11월엔 비가 자주 오고 추우니 재킷을 꼭 챙기라는 실용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감사의 인사를 하고 헤어지며, 주말을 그렇게 마무리했다.


외국에서 산다는 건 어쩌면 쉬울 수도 있겠지만, 주말에도 숙제나 밀린 공부,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일요일 아침, 평일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주방을 보니, 전날 플랫메이트에 사용한 그릇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침마다 그릇이 한두 개씩 남아 있는 게 반복되어, 오늘도 그냥 내 그릇을 닦는 김에 같이 치웠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기분이 상했다. 별것 아닌 그릇 몇 개지만, 매번 남의 식기를 닦는 일이 귀찮기도 하고, 특히 나이지리아 친구 피우스의 냄비는 언제나 찐득한 소스와 불에 탄 자국이 남아 있어 신경이 쓰였다.


가스레인지를 보니 오늘도 온통 기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예전에도 기름 범벅인 가스레인지 상태가 지저분해 두세 번씩 손수 닦은 적이 있다. 그때도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기름 범벅이 되어 있었고, 오늘도 그랬다.

결국 피우스에게 한마디를 해야 했다. 나도 외국인이고 피우스도 외국인이다. 이 집에 사는 사람 모두가 외국인이다. 말투에 감정을 실으면 서로 기분이 상할 수 있으니 조심스럽게, “요리할 때 냄비를 열고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눈치를 챈 듯했다.


피우스는 평소에도 특별히 재료가 많지는 않은데 유독 기름이 많이 튄다. 아마도 대부분 튀기는 방식으로 요리하는 것 같았다. 그는 미안했는지 가스레인지는 자신이 닦겠다고 먼저 말했다. 그 말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요리하는 피우스를 뒤로하고, 굳은 몸을 풀 겸 캠퍼스 근처 수영장에 다녀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적어서 한 레인에 한 명씩만 사용할 정도로 한적했다. 간간히 동호회나 친구끼리 온 사람들만 있을 뿐 조용했다.

수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터데이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 벤치에 앉은 할머니는 강한 몰타식 억양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고, 사용하는 전화기는 놀랍게도 블랙베리 2G 폰이었다. 신기해서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할머니는 통화를 이어갔고 나는 조용히 기다렸다.


마터데이 정류장은 몰타의 주요 버스 정류장 중 하나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노선이 지나간다. 집에서 멀지는 않지만 귀찮아서 120번 버스를 기다렸는데, 내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버스가 정차하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자책하며 한숨을 쉬자, 옆에 있던 할머니가 나를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지난번에 너를 본 적이 있다. 너 필리핀에서 왔지?”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고, 할머니는 일주일 전쯤 자신의 친구와 내가 간단히 대화하는 걸 본 기억이 난다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기억이 떠올랐다.


마침 할머니가 탈 버스가 도착해 긴 더 이상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동양인인 나를 기억해 주고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 그 마음이 참 고마웠다. 떠나며 할머니에게 손을 들어 “바이”라고 인사했고, 나도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답했다. 그리고 문득 할머니의 손을 가볍게 잡아 인사하자, 할머니도 기꺼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아마도 그 따뜻한 손길이 없었다면, 나는 ‘21세기에 2G 폰을 쓰는 고루한 노인’으로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기억해 주고 살갑게 대해준 그 마음 덕분에, 겉으로만 보이는 노인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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