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첫날에는 한국인 가이드 투어를 통해 대략적인 지리를 익혔고, 둘째 날은 아무런 계획 없이 시간을 비워 두었다.
전날 투어 중 가이드는 헝가리에 지열이 풍부해 온천이 많다고 설명하며, 시내 인근의 유명한 세체니 온천을 소개해 주었다.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창문 너머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목욕을 즐겼던 사람이라, 이 말을 듣고 나니 오랜만에 공중목욕탕에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헝가리는 전반적으로 서유럽보다 물가가 저렴하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세체니 온천의 입장료를 검색해 보니 한국 돈으로 5만 원이 넘는 금액이었다. 아무래도 유명 관광지이다 보니 입장료가 다소 비싸게 느껴졌지만, 다시 부다페스트에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곳은 한 번쯤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유튜브에서 정보를 찾아봤지만, 세체니 온천 외의 다른 곳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구글과 네이버를 검색해 보니 몇몇 소규모 온천이 나왔고, 그중 하나는 호텔 부대시설로 고급스럽긴 했지만, 거리가 멀고 가격도 비슷해서 망설여졌다.
결국 현지 주민들이 자주 이용한다는 ‘Palatinus Strand’ 온천을 가보기로 했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도착하니, 정류장 바로 옆에 온천이 자리해 있었다.
일요일 개장 시간은 오전 9시였고, 내가 도착한 시간은 9시 30분쯤이었다. 입구 앞에는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고, 직원은 외국인인 나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며 입장을 유도해 주었다.
입장료는 한국 돈으로 8천 원 정도였고 저렴했지만, 막상 내부에 들어서니 이용 방식이 생소하여 약간 당황스러웠다. 남녀 구분 없이 옷을 갈아입는 공간이 같은 장소에 있어 어디서 갈아입어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게 됐다. 입장까지 시간이 좀 걸려 주변에 사람도 없어서 더 당황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처음 방문한 곳에서 이런 혼란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보통 갈아입는 부스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이곳은 시설이 크고 구조도 복잡해서 사람이 없는 틈에 그냥 내가 배정받은 캐비닛 앞에서 급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들어갔다.
한국에 있을 때 외국인이 사우나에 오면 괜스레 눈길이 갔던 기억이 나는데, 오늘은 그 시선들을 내가 온몸으로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니 건식 사우나와 온수탕이 보였다.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몸을 가볍게 씻고 온수탕에 들어가니, 물은 그리 뜨겁지 않고 미지근한 정도였다. 온도는 다소 아쉬웠지만 수압 마사지 시설이 있어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네댓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고온탕이 있어 그곳으로 옮겼다.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니 한국에서의 목욕 문화가 떠오르며 아련한 향수가 밀려왔다.
사전에 헝가리 온천 문화에 대해 조사해 두었던 덕분에 큰 수건, 수영복, 수영모, 수경 등을 챙겨갔고, 덕분에 추가 비용 없이 노천 온탕과 수영장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초겨울의 아침, 밖은 쌀쌀했지만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노천탕에 몸을 담그는 경험은 꽤나 색다르고 인상 깊었다.
노천탕 옆 수영장으로 옮겨 가볍게 몸을 풀고 수영을 시작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수영 라인마다 한두 명씩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는 가장자리에서 조심스럽게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온탕의 물이었기에 수영을 하는 동안은 춥지 않았다.
한참을 수영하다가 잠시 쉬며 옆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시설에 대해 물어보니,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후 온탕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현지인을 다시 마주쳤고, 이번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영어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안도감도 있었고, 대화 역시 불편함 없이 잘 이어졌다.
그는 나와 비슷한 연배로, 현재 미혼이며 스코틀랜드에서 IT 관련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고향이 부다페스트라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다고 했다.
혼자 사는 삶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자칫 예의에 어긋날까 조심스러워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유럽 문화, 나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끌었다.
학교 수업에서는 원어민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기 어려운 순간이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현지인과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는 한결 수월하게 느껴졌다.
내 이름을 알려주자 그는 “로버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름과 나이를 주고받고 나니 한층 친근감이 생겼고, 대화 도중 로버트가 사우나로 간다기에 함께 가도 되는지 물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사우나 안은 사람들로 거의 가득 차 있었고, 로버트와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화를 이어가던 중, 옆에 앉은 노년의 남성이 조용히 해 달라고 말해 대화를 잠시 중단했다.
외국 여행 중, 그것도 온천에서 현지인과 자연스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경험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2시간 남짓 온천욕을 즐기고 나서, 로버트가 먼저 돌아간다고 하여 나도 함께 나왔다.
생각보다 더 오래 머물 수 있었던 건 좋은 대화 상대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감사 인사를 전하자 로버트는 나의 부다페스트 여행이 즐겁길 바란다는 인사와 함께 악수를 청했다.
출출해진 나는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간이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굴뚝빵을 주문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비싸게 팔리는 그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꽤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었다.
커피는 아메리카노로, 굴뚝빵은 겉면에 설탕이 입혀진 시나몬 맛을 선택해 따뜻한 아침 식사를 마쳤다.
내 옆자리에 앉은 두 명의 동양 남성은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다소 경계심 있는 듯 보여 굳이 말을 걸진 않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고, 달콤한 굴뚝빵과 커피로 마무리한 일요일 아침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버스를 타고 전날 방문했던 ‘세체니 다리’로 향했다.
다뉴브강을 사이에 두고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이 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유명한 관광 명소였다.
오래전에 지어진 다리임에도 견고하고 도로도 넓어 교통량이 많았다.
입구부터 중간, 끝까지 도보로 천천히 걸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했다. 다뉴브강은 수량이 많고 물빛은 짙어 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부탁해 사진을 남기기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세체니 다리의 도보 체험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 공원 벤치에 앉아 있자니 문득 공허한 마음이 밀려왔다.
오늘 하루를 잘 보냈다는 만족감보다는, 갑작스레 어떤 공허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한국을 떠나 몰타에 살다가 다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벤치에 앉아 있는 지금, 문득 ‘여행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나의 유럽 생활이 서서히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유럽의 어느 한 도시에서, 낯선 언어 속에 혼자 서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과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온 것인지,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갖고 이곳에 도착한 것인지 나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1년이라는 시간을 유럽에서 살면서도, 유명한 장소를 가지 않았다면 나중에 분명 후회했을 것 같아서, 그저 의무처럼 이곳을 찾아온 건 아니었을까.
한국으로 돌아간 후, 유럽에서의 나날들을 어떤 감정으로 회상하게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나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들과 감정들을 이렇게 글로 남겨둔다면, 언젠가 이 기억은 다시 나를 그 시간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기억은 망각되지만, 내가 남긴 글은 나를 과거로 데려가는 도구가 되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