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몰타에서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되도록 수도는 피하려고 했다.
어느 나라든 수도에 가면 붐비는 인파와 교통체증으로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였고, 식비나 숙박비도 훨씬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에 유럽까지 왔는데 유명한 도시를 가지 않고 돌아간다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다시 한국에서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타고 오려면 마음의 결심도, 시간도, 체력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다소 무리를 감수하고 영국은 수도 런던을 방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같은 나라를 두 번 연속 방문할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나라별로 사전 조사가 꼭 필요하다. 교통, 숙소, 관광지, 음식 등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유여행은 꽤 번거로운 일이다.
EU 국가라 하더라도, 국경만 없어졌을 뿐 생활 방식이나 교통 시스템은 여전히 각자의 방식대로 운영되고 있어서, 비유럽인인 나에게는 매번 새로운 숙제를 안겨주었다.
어느 지역에 숙소를 잡아야 관광지에 접근이 좋은지, 대중교통은 어떤 수단이 저렴한지, 교통패스를 사는 것이 유리한지, 관광지 입장료는 무료인지 사전 예약이 필요한지 등 수많은 정보들을 미리 공부를 해야만 했다.
런던 역시 다른 도시들과는 또 달랐다.
교통 앱도 달랐고, 요금 체계도 복잡했으며, 도시를 권역별로 나눠서 요금이 다르게 책정되어 있었다. 그런 디테일까지 전부 조사하기는 무리였기에, 여행 경험이 있는 지인들에게 물어보거나 웹서핑을 통해 대강의 정보를 얻었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많았다. 결국은 몸으로 직접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런던에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무료로 개방된 박물관들이 많았다.
그래서 빅벤, 타워브리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같은 유명한 명소보다는 박물관을 중심으로 여행 동선을 짜기로 했다.
런던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빨간 2층 버스, 버킹엄 궁전, 템즈강 같은 이미지들이 그려진다.
나는 몰타에서 오전 11시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약 3시간 정도 날아 도착한 공항은 히드로가 아니라 루턴공항이었다. 지인 말로는 유럽의 저가항공은 대부분 히드로공항이 아닌 다른 공항을 이용한다고 한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날이 아직 밝아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회사 직원에게 요금을 묻자 17유로라 했고, 시내까지 1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영국은 생활비가 비싸기로 유명했고, 환율까지 오른 상황이라 1시간 반 거리의 버스 요금이 한국 돈으로 3만 원 가까이 된다는 것이 조금 억울하게 느껴졌다.
혹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을까 싶어 검색해 보니 가능하다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공항 근처에는 역이 없었고, 버스회사 직원에게 물어도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국 다시 검색해서 13유로짜리 빅토리아행 버스를 찾아 타기로 했다. 다행히 ‘빅토리아’라는 지명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기사에게 막힘없이 답하고 탑승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시내로, 그리고 숙소까지.
버스를 갈아타고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6시간 가까이 이동에 소요된 상태였다. 비행기 대기 시간까지 포함하면 무려 8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 셈이다.
예약한 숙소는 시내에서 다소 떨어진 조용한 주거지역에 위치한 저렴한 호스텔이었다.
2층 침대 아래쪽에 자리를 잡고 누웠는데, 침대 구조가 낮고 철제라서 누군가 2층을 사용하게 되어 몸을 뒤척일 때마다 침대 전체가 출렁거렸다. 그게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그리고 다음 날, 사전에 예약해 두었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을 방문했다. 예약 시간은 오전 10시. 박물관 입구에는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박물관 안내도를 보니 방이 백 개 가까이 되는 듯했고, 1~2층에는 메인 전시물들이, 그 외에는 다양한 국가의 전시가 이어지고 있었다.
박물관 관람은 약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사전 지식이 많지 않아 그냥 눈으로 훑기도 하고, 흥미를 끄는 전시물은 짧은 영어 설명을 읽어보며 천천히 둘러보았다. 나는 원래 박물관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워낙 규모가 크고 다양한 전시가 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오후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오전 중에 동네 카페에서 마신 커피와 빵 덕분에 허기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이번엔 ‘버로우 마켓(Borough Market)’으로 향했다.
템즈강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런던에서 꽤 유명한 시장이고, 특히 피시 앤 칩스를 꼭 먹어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시장 안을 둘러보았다.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이 줄지어 뭔가를 먹고 있어 확인할 필요도 없이 따라 줄을 섰다.
생선을 튀긴 요리와 감자튀김을 종이박스에 담아주는데, 가격은 14파운드. 한국 돈으로 약 25,000원이다. 시장인데도 테이블은 거의 없어 서서 먹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작은 공간을 찾아 앉으려다 옆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니 흔쾌히 자리를 내주었다.
튀김은 갓 만들어져 따끈했고, 감자튀김도 큼직해서 포만감이 꽤 있었다.
하지만 먹고 난 뒤의 소감은 “그냥 그렇다.”였다.
런던에 왔으니 안 먹고 가면 아쉬울 것 같아서 먹었을 뿐, 가격 대비 큰 감동은 없었다. 목표 하나를 이뤘다는 만족감 정도였다.
해가 지기 시작한 건 오후 5시가 채 되기 전이었다. 이른 어둠에 숙소로 돌아갈 생각으로 구글지도를 따라 정류장을 향해 걷던 중, 체인점으로 보이는 초밥집이 눈에 들어왔다.
비싸긴 했지만, 오랜만에 밥과 김을 먹고 싶어 들어갔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기에 회가 빠진 아보카도 김밥을 주문하고, 1인 테이블에 앉아 간단히 식사를 했다.
창밖을 보니 백인, 흑인,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런던도 역시 이민자가 많은 도시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그때, 매장 안에 있던 중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흑인 소년이 약간 시끄러운 목소리로 떠드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았다가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런데 잠시 후, 밖으로 나간 그 소년이 내 자리의 쇼윈도 유리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멀리 가버린 뒤였다.
‘왜 나를 건드린 걸까?’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곧 ‘그냥 할 일 없는 녀석이겠지’ 하고 넘기려 했다.
혹시 내가 낯설어서, 아니면 이방인처럼 보이는 내가 초밥집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던 걸까.
식사 중인 나를 괜히 건드렸다는 사실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나도 런던의 시민은 아니지만, 그 흑인 소년도 런던에서 오래 살아온 이민자의 후손일 것이다.
그는 이미 현지인처럼 이 도시에 스며든 존재일 테고, 그런 그에게 나는 명백한 ‘관광객’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경계감을 만들었는지,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끝내 알 수 없었지만, 낯선 도시의 어두운 유리창 너머에서 마주친 그 짧은 순간은 이상하게도 내 안에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