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가장 눈에 띄는 점 하나가 있었다. 우리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교통문화, 특히 보행자에 대한 태도였다.
유럽을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곳에서는 보행자들이 신호를 잘 지키지 않는다. 차량이 다니지 않는다면, 보행자 신호가 빨간불이라도 거침없이 도로를 건넌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나도 어느새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굳이 신호를 기다리기보단 빈 도로를 조용히 건너는 일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운전자들의 태도다. 보행자가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지 않고, 오히려 보행자 신호등조차 없는 길목에서는 먼저 멈춰 서서 보행자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끔은 한국에서의 습관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도로를 건너려다 차량이 오면, 내가 먼저 멈춰 서거나 비켜주고 차량이 지나가길 손짓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운전자는 오히려 나에게 먼저 건너라고 양보하곤 했다. 순간 머쓱해지면서도, 여긴 정말 보행자를 우선하는 문화구나, 실감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유럽 도시의 구조가 그런 문화를 가능하게 만든 듯하다. 수백 년 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유럽의 도시는 도로가 그리 넓지 않고, 차량 통행도 많지 않다. 자연스럽게 걷는 사람을 중심으로 도시가 운영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북유럽, 이를테면 네덜란드나 덴마크 같은 곳에 가면 사정이 조금 다르다. 남유럽에 비해 도로가 넓고 차량 통행도 많아,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결국 도로 환경에 따라 교통 문화가 달라진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런던에서의 경험은 또 다른 시사점을 주었다. 여행 마지막 날,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런던 시내 중심에서 ‘빅토리아’ 정류장까지 이동해야 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버스를 타면 약 40분이 걸린다는 안내를 보고 교통 체증을 걱정해 우버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잠시 후 도착한 하얀 벤츠 우버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운전자는 아랍 출신의 이민자였고, 런던에서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영어는 유창하진 않았지만,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대화는 가능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꽤 여유 있게 출발했다고 생각했지만, 시내 교통 상황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다. 구불구불 좁은 도로를 따라 각종 차량이 얽히고설켜 있었고, 내가 초행자였다면 절대 렌터카로 직접 운전할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런던에 왔으니 2층 빨간 버스도 탔다. 처음엔 신기해서 일부러 2층 맨 앞자리에 앉아 도로를 바라보는 걸 즐겼지만, 몇 번 타다 보니 불편함도 있었다. 탈 때마다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번거로움에, 한 번은 2층에서 내려오던 중 버스가 급정거해서 넘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 후로는 좀처럼 2층으로 올라가지 않게 됐다.
결국, 공항버스 출발 10분 전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져 근처 커피숍으로 뛰어 들어가, 눈치껏 ‘도둑 화장실’을 쓰고 나와 간신히 버스를 탔다.
목적지는 런던 외곽의 ‘Stansted 공항’이었고, 우리가 익숙한 히드로공항은 아니었다.
급하게 움직인 탓인지, 버스에 앉아도 한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공항버스는 시내를 벗어나려 정차와 출발을 반복했고, 어느새 넓은 왕복 4차선 도로로 진입했다. 이제는 조금 빠르게 갈 수 있겠다 생각했지만, 예상은 또 빗나갔다.
넓은 도로에서도 무단횡단하는 보행자들이 많아 버스는 자주 멈췄다. 심지어 신호가 파란불이어도 보행자 한두 명 때문에 45인승 버스가 멈춰서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 순간, “아무리 보행자 중심이라고 해도 이건 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 비행기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아찔했다.
보행자 중심의 교통 환경이 친환경적이고 인도적인 모습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불편함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이번 경험을 통해 절감했다.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문화와 구조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