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주인 되기
이번 주가 지나면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새로 구한 집으로 완전히 이사를 나가야 한다.
정들었던 룸메이트 요한과 6층의 친구들과 이별을 해야 한다니, 마음의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오늘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요한이 서류 한 장을 들고 왔다.
내용을 보니 3월 30일 자로 새로운 학생이 방에 입주할 예정이라며, 방을 정리해 새로 오는 학생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안내문이었다.
정작 내가 떠나고 난 뒤에야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면 덜 섭섭했을 텐데, 아직 내가 나가기도 전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온다니 왠지 마음이 더 서운해졌다.
멀고도 낯선 이곳까지 와서 적응하느라 애썼는데, 아직 나에게 시간이 남아 있음에도 중간에 이별을 해야 한다니,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요한과는 점심과 저녁을 자주 나누어 먹었고, 오늘은 내가 점심을 준비하기로 되어 있었다.
요한은 신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지만, 얼마 전 신라면을 먹은 뒤 딸꾹질이 날 정도로 매운맛에 고생했던 일이 떠올라 망설여졌다.
‘혹시 내가 좋아하는 걸 아니까 일부러 맞춰주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신라면 대신 햄버거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직접 만들어보자며 요한도 흔쾌히 동의했다.
한국에서는 햄버거를 사 먹기만 했지, 이렇게 직접 만들어 먹은 건 처음이었는데 요한이 알려준 방식으로 만들어 먹어보니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햄버거 빵에 마늘 소스를 발라 오븐에 살짝 굽고, 간장에 볶은 양배추를 패티 위에 얹고, 치즈와 토마토를 추가한 그 맛은 프랜차이즈 햄버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음식을 다 먹고 나면 항상 설거지는 상대방이 맡기로 했는데, 오늘은 요한이 면접 준비로 바쁘다며 양해를 구했다.
솔직히 나도 힘들긴 했지만, 어린 요한이 취업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흔쾌히 설거지를 맡았다.
설거지를 마친 뒤 방에 돌아와 보니 요한은 없었고, 잠시 후 문자가 도착했다.
“면접 잘 봤고, 지금 시험도 보고 있어.”라는 요한의 말에 나도 안도감을 느꼈다.
2시간쯤 지나 돌아온 요한은 환한 얼굴로 면접과 시험에 모두 통과했다고 전해주었다.
기뻐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요한에게 어떤 직장인지, 언제부터 출근하는지 물으니 “4월 1일부터 몰타 북쪽 끝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주방일을 하게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요한은 콜롬비아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 교사 자격을 갖췄으며, 현재 몰타 랭귀지스쿨 최고 단계인 Advanced Level 과정까지 수료한 실력자다.
그런 요한이 식당에서 주방 보조로 일한다는 사실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그가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괜한 말로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이 일하게 될 레스토랑은 몰타 북쪽 끝에 있는 Melieha 지역으로, 우리가 있는 대학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다.
그는 하루 10시간 정도 일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첫 직장을 구할 때 그렇게 쉽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 요한의 앞길도 순탄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일을 하게 되면 단순히 수입을 얻는 것을 넘어서, 학생 비자에서 취업 비자로 변경하여 몰타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법적 요건도 충족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좋은 직장은 아니지만, 유럽에서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나는 요한에게 한국에서의 취업을 권한 적도 있다.
요한의 언어 실력이면 영어 교사로 충분히 일할 수 있었고, 한국의 출산율 저하로 인해 이민자 유입이 점점 증가하고 있기에, 장기적으로 보면 영주권을 얻을 기회도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요한은 콜롬비아에서 평균 월급이 한 달에 3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한국의 월급 수준을 알려주자, 깜짝 놀라며 “콜롬비아보다 몇 배는 많다”며 한국의 경제적 여건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만 살 때는 우리나라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외국에 나와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소통해 보니, 한국이 가진 장점이 참 많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오늘은 요한의 좋은 소식을 함께 축하하며, 커피와 빵을 나눠 먹으며 잔잔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새로운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