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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피자와 콜라, 그리고 작아진 기대

by Jay Kang

여기서 알게 된 친구 중 일본인 학생이 하나 있다. 이름은 기세키(Kiseki).
일본에서 유학 온 20대 초반의 학생으로, 내가 고등학교에서 배운 제2외국어를 기억하고 있어서 몇 마디 건넸더니 친근하게 다가왔다. 마침내 룸메이트 요한과 같은 반이라 자연스럽게 더 가까워졌다.

평소 오전 브레이크 타임에는 룸메 요한과 자주 간식을 먹었는데, 기세키도 자주 우리 사이에 엮이며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기세키의 외모를 말하자면, 이곳 몰타에서도 보기 드문 ‘사계절 여름 복장’ 스타일이었다.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심지어 양말도 신지 않은 슬리퍼 차림으로 등장했는데, 계절로 보자면 한국의 늦봄 정도 되는 날씨였다.

내가 괜찮냐고 물으면 그는 늘 웃으며 “괜찮다”라고 답했다. 바람이 많이 불기로 유명한 해변 슬리에마에 갔을 때도, 역시 그는 한결같은 복장이었다.


한 번은 독일인 친구 아르뤼, 요한, 기세키와 함께 몰타 북서쪽에 있는 관광지 '골든 케이브(Golden Cave)'를 다녀온 적이 있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던 중, 기세키가 배가 고프다며 근처 레스토랑에서 햄버거를 하나 시켜 혼자 먹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긴 했지만, 그는 다른 친구들에게 식사 의향을 묻지 않았다.

요한이 피자를 먹자고 제안했지만, 독일인 친구는 돈 쓰기 싫은 눈치였고, 나는 분위기를 파악하며 말을 아꼈다.
결국 요한이 피자를 사게 되었는데, 그 상황을 보며 나 역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몰타의 해변가 레스토랑에서 피자 한 판이면 15유로 남짓.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룸메이트로서 요한의 경제 사정을 알기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피자가 나오자, 아르뤼는 자신이 싸 온 음식을 꺼냈고, 기세키는 이미 햄버거를 다 먹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주문한 피자를 나눠 먹으며 어색하지만 함께 식사를 마쳤다.

그날 오후 관광을 마치고 해가 저물 무렵, 요한은 친구들에게 저녁을 직접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피곤해서 쉬고 싶었지만, 요한이 이미 약속을 해버린 상황이라 옆에서 돕기로 했다.

기숙사로 돌아오자 허기가 몰려왔고, 요리는 예상대로 1시간 반 가까이 걸렸다.


요한의 콜롬비아식 요리는 정성 가득했고, 결과적으로 너무나 맛있었다. 모두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세키도 감탄하며 “다음엔 내가 일본 음식을 해줄게!”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며칠 후,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슬리에마 해변을 다녀온 날, 피곤해서 요리는 귀찮고 피자를 사주기로 했다.
내가 피자를 준비하겠다고 하자 기세키는 “콜라는 내가 가져올게”라고 말했다.


웰비 슈퍼마켓에서 냉동 피자 네 판을 사 와서 기숙사 치킨룸에서 친구들을 맞이했는데, 기세키가 가져온 콜라를 보고 살짝 당황했다.

딱 1.5리터 한 병.
우리는 다섯 명이었고, 피자 네 판이면 당연히 음료도 넉넉히 준비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콜라는 단 한 병. 그나마도 금세 바닥이 나서 조금씩 아껴 마셔야 했다.


이곳 몰타에서 느끼한 음식을 먹을 때 콜라는 거의 필수였다.
그날도 속으로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피자만 먹었다.
누군가 추가로 음료를 사 오길 기대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내가 가장 나이가 많고 이들의 ‘아버지뻘’인데, 굳이 나서서 사 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피자를 먹고 친구들은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자고 했지만, 나는 “오늘 즐거웠다”는 인사만 전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은 피곤했고, 마음속엔 이런저런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기세키는 어쩌면 아직 어리고, 낯선 환경에서 절약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자리에서 ‘함께 나누는 태도’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이 친구가 언젠가는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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